제36화
4장 인연은 바람을 타고(11)
“……!”
강철만의 동공이 커졌다.
통유리 안에 뭔가 있다는 건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나가 조금씩 느껴지길래 몬스터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사람.
한상우의 말마따나 통유리 안에는 투명한 액체와 함께 죽은 듯 새파랗게 질린 사람이 들어 있었다.
한 통에 한 명씩.
통로에는 수십 명이 넘는 인원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문제는 인원뿐만이 아니었다.
아기부터 노인까지.
루미나스는 연령을 가리지 않고 인간들을 가둬두고 있었다.
“이 미친놈들이…!! 대체 무슨 짓을…!!”
강철만은 기다란 통로로 튀어 나가 참상을 확인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으로 제발 모형이길 바랐지만, 현실은 진짜라는 걸 확인시켜줄 뿐이었다.
통유리 아래, 희생자들의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다.
<12호>
<나이 : 27>
<분류 : 헌터>
<25호>
<나이 : 45>
<분류 : 일반인>
이름마저 잃어버리고 투명한 통에 둥둥 떠 있었다.
한상우도 강철만의 뒤를 따르며 참상을 확인했다.
“이곳에서 사람들을 납치해 실험 같은 걸 한 모양이네요. 헌터들도 있는 걸 보니, 이규진과 강두식이 저와 헌터청의 공무원 헌터들을 습격했던 것도 이것 때문인 것 같고요.”
한상우는 차분하게 사태를 분석했다.
강철만처럼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군주의 특성, 평정 덕분에 감정보다 이성이 먼저 작동했다.
그러자 강철만도 마음을 가라앉힌 듯 차분해진 눈빛으로 주변을 다시 돌아봤다.
“듣고 보니 그렇군요. 루미나스 녀석들이 포션 같은 걸 마시고 강해지길래 뭔가 했더니, 여기 있는 희생자들에게 마나를 추출했던 것 같습니다.”
“확실히 기계의 생김새랑 이전의 정황으로 미뤄보면 그렇네요. 이분들은… 살아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안타깝지만… 그런 것 같습니다. 몇몇 사람들한테 마나가 미약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외형으로 봐선 이미 죽은 게 아닌가 싶어요.”
희생자들은 통유리 안의 투명한 액체에 잠겨 선 채로 떠 있었다.
또한, 대부분의 신체가 부패하고 훼손되어 살아 있다고 판단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한상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끔찍하네요. 강해지기 위해 다른 사람을 가지고 실험을 하고, 이렇게까지 인륜을 저버리다니.”
“그래서 루미나스가 전 세계에 수배령이 내려진 것입니다. 이놈들은… 선이라는 걸 모르거든요. 녀석들을 빨리 처치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피해를 줄이는 방법입니다.”
“네, 그런 것 같네요. 어째서 길드장님이 루미나스를 끝까지 추격하자고 했는지도 알 것 같습니다. 얼른 가서 소탕해 버리죠.”
한상우는 강철만의 의견에 동의하며 통로를 걸어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루미나스는 둘의 생각보다 훨씬 더 악랄했다.
두 사람이 통로 한가운데로 들어오자.
펑-! 와장창-! 촤아아아악-!!
“끄어어어…!”
액체가 가득 찬 유리관이 깨지더니 그 안에 있던 실험체들이 한상우와 강철만을 습격한 것이다.
이건 누가 봐도 함정이었다.
한상우가 화산검과 화산방패를 들며 말했다.
“우릴 기다리고 있었나 보군요.”
“크윽! 개자식들…!”
강철만도 이를 갈며 대검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고통받는 실험체(E)]
[고통받는 실험체(D)]
[고통받는 실험체(D)]
[…….]
[고통받는 실험체(F)]
F급부터 D급까지.
몬스터는 수십 마리나 되었으나 등급이 높지는 않았다.
게다가 전투력도 세지 않았다.
대부분 좀비처럼 신체가 훼손되거나 부패해 전투는커녕 제대로 걷는 것조차 못하는 모습이었다.
허수아비.
몬스터가 되긴 했어도 한상우와 강철만이 검을 한 번 휘두르기만 하면 실험체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차마 검을 휘두르지 못했다. 화산방패와 대검의 넓은 면으로 방어만 했다.
이들은 이규진이나 황대건처럼 욕심에 눈이 멀어 몬스터가 된 게 아니라 실험에 희생된, 무고한 피해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막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쏴라!!”
“예!!”
통유리가 나열된 통로 끝, 도망쳤던 루미나스 헌터들이 나타나 화살과 단검, 스킬 등을 난사했다.
쉬익-! 쾅쾅-! 콰과과과광-!!
“캬아아아악!!”
기다란 복도에 연쇄적으로 폭발이 일어났다.
자신들의 장비와 실험체들도 피해를 입었지만 루미나스 헌터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목표는 오직 하나.
한상우와 강철만을 죽이는 것뿐이었다.
“저 미친놈들이…!”
강철만은 양손으로 대검을 쥔 채 점프, 실험체들의 머리와 어깨 등을 밟으며 앞으로 치고 나갔다.
무고한 희생자들을 끝까지 이용하는 루미나스의 행태에 분노한 것이다.
불꽃과 연기가 시야를 가렸지만, SS급 헌터인 강철만은 몸으로 뚫고 나갔다.
“이 개자식들아…!!”
후우우웅-!! 촤아아아악-!!
[유성참]
강철만이 폭발을 뚫고 나오며 대검을 휘두르자 검풍을 따라 하얀빛의 검기가 날아갔다.
유성이 낙하하듯 빠르게 날아간 검기가 루미나스 헌터의 스킬과 화살, 단검 등을 파괴하며 적들을 향해 쇄도했다.
그대로 나아가기만 한다면 막대한 피해를 입힐 파괴력이었다.
하지만.
쿠궁-! 화아아악-!!
강철만의 스킬은 루미나스 헌터들에게 닿지 못하고 사라졌다.
[유성참]이 날아오기 전, 제1 지원팀장 민수아가 지팡이를 앞세워 보호막을 펼친 것이다.
투명한 방어막과 부딪쳐 폭발하고 사라져 버린 오러.
민수아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더니 강철만을 향해 이죽거렸다.
“뭐야, SS급 헌터도 별거 없잖아?”
“첫 끗발이 개끗발인 법이지. 두 번째, 세 번째도 막아낼 수 있는지 보자고.”
타앗-!
강철만도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바닥에 착지하더니 다시 앞으로 돌격하기 시작했다.
원거리 공격이 막혔으니 아예 가까이 다가가 대검으로 베어버릴 작정이었던 것이다.
강철만이 루미나스 헌터들과 점점 가까워지던 그때.
“길드장님, 잠깐…!”
뒤에서 한상우가 강철만을 불러세웠다.
다급한 목소리.
그러나 이미 몸에 가속이 붙은 상태라 강철만은 멈출 수가 없었다.
그 결과.
펑-! 펑-! 퍼퍼퍼퍼펑-!!
바닥이 폭발하는 함정에 휩쓸리고 말았다.
강철만이 달려오던 길부터 루미나스 헌터들이 진영을 갖춘 지점까지 바닥이 폭발하며 시커먼 구덩이를 만든 것이다.
어둠밖에 보이지 않는,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깊이의 무저갱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폭발 직전에 강철만이 바닥을 차고 뛰어올라 천장에 있는 파이프를 잡았다는 것이었다.
다만 그것도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저런. 두 번째 기회는 없을 것 같은데 이를 어쩌나? 모두 쏴라!”
“예! 알겠습니다!”
민수아의 명령 아래, 루미나스 헌터들이 다시 단검과 스킬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콰과과광-!!
‘제길…!’
강철만은 다시 아래로 추락했다.
루미나스 헌터들이 강철만이 아닌, 파이프가 연결된 천장을 노리고 공격했기 때문이다.
발을 디딜 바닥도, 공중을 나는 스킬도 없는 강철만은 그대로 자유낙하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함정으로 떨어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으니.
“잠시만 기다려요!”
파지지직-! 촤아아악-!!
뒤쪽 통로에 있던 한상우가 실험체들을 쓰러트리고 순간 소환을 사용, 강철만을 땡길거야의 [끌어오기]로 잡아당겼다.
“헛! 고맙습니다, 한상우 헌터!”
오러로 된 채찍이 몸통을 둘둘 감은 상황, 강철만은 자초지종을 파악하고 고개를 돌려 한상우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런데 한상우가 강철만을 끌어오던 그 순간.
“빙고.”
루미나스가 추가로 함정을 발동시켰다.
퍼펑-! 콰아아아앙-!!
“……!”
이번엔 한상우가 서 있는 바닥을 폭파한 것이다.
처음부터 모든 함정을 발동시키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이 나머지 한 사람을 구할 때, 추가로 함정을 발동시켜 둘 모두를 함정에 빠트리는 작전이었다.
물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지는 못했다.
휘이이이익-!!
[끌어오기]의 오러 채찍이 강철만을 계단이 있는 통로 입구로 던져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조에 집중하느라 한상우는 제때 피하지 못하고 폭발에 휩쓸려 버렸다.
“크윽!”
“하, 한상우 헌터…!!”
“끄어어어….”
한상우의 신형이 실험체들과 함께 깊은 어둠 속으로 낙하했다.
강철만은 바닥을 밟은 직후, 절벽이 되어버린 통로 끝으로 달려갔지만 구출할 수는 없었다.
쿠우웅-!
한상우가 낙하한 직후, 웬 넓적한 철판이 날아와 무저갱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제기랄…!”
[연속 유성참]
강철만은 루미나스 헌터들을 향해 [유성참]을 여러 번 날린 후, 아래로 뛰어내려 철판을 밟고 구덩이 속으로 내려가려 했다.
마나로 아래의 지형을 감지해본 결과, 바닥이 보이지 않긴 하지만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는 깊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강철만의 계획은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쿵-! 쿵-! 쿠우웅-!!
두 개, 세 개, 네 개.
어떻게 보면 루미나스가 원하는 대로 몸소 무저갱 속으로 떨어지려고 하는데, 철판들이 날아와 구덩이를 막아버린 것이다.
“하아아아앗!!”
강철만은 철판을 부수기 위해 대검을 치켜들었다.
그런데.
‘뭐지?’
대검이 움직이지 않았다.
분명 아무런 제약이 없는데 무언가에 묶이기라도 한 듯 대검이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강철만은 단번에 눈치챘다.
스킬.
누군가 스킬을 사용해 자신의 행동을 제약하고 있는 것이었다.
‘대체 누가…?’
SS급인 자신을 막다니.
그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강철만은 고개를 돌려 계단을 내려오는 신형을 주시했다.
범인은 곧 밝혀졌다.
“어디 가려고?”
발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로브를 입은 신형.
루미나스 한국 지부 부지부장, 홍진성이 강철만을 내려다보며 섬뜩한 웃음을 지었다.
“넌 나랑 놀아야지.”
* * *
쩌어어엉-!! 쿵-! 쿵-!
끼기기기기긱-!!
빛 한 점 존재하지 않는 암흑 속.
갑자기 충격음이 발생하면서 불꽃이 튀었다.
고요한 세계에 일어난 사건 하나.
불꽃과 소음은 점점 아래로 이동하더니 바닥에 이르러서야 멈췄다.
그리고 그 뒤로.
“후, 겨우 내려왔네.”
한상우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루미나스 헌터들의 함정에 휘말려 강철만 대신 무저갱 속으로 떨어졌지만, 화산방패로 절벽을 미끄러지듯이 타고 무사히 바닥으로 내려온 것이다.
하강 도중, 혹여나 바닥에 작살이나 끓는 기름 같은 거라도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그렇게 치밀한 함정은 없었다.
그러나 상황이 좋지 않은 것만큼은 분명했다.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니 희미한 빛이 보이는 게, 무언가로 구멍을 막은 듯했다.
강철만이 위에 혼자 남게 된 것이다.
‘빨리 합류해야겠어.’
SS급인 강철만이지만 루미나스의 거점에 홀로 들어온 거라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강철만을 지원하는 게 좋을 듯했다.
나가는 길은 찾으면 있을 것 같았다. 벽에 띄엄띄엄 불 꺼진 전구가 박혀 있는 걸 보니 위쪽과 연결된 곳이 분명 있을 터였다.
문제는.
“이 녀석들이 순순히 보내줄지 모른다는 거지.”
한상우는 위로 향했던 고개를 내려 주위를 둘러봤다.
“찌익, 찌익….”
“카르르….”
[강화 실험 쥐(C)]
[강화 실험 개(B)]
[강화 실험 고양이(B)]
[강화 실험 토끼(B)]
어두컴컴한 공동, 천 개는 족히 넘는 안광이 일제히 빛을 발했다.
깊이 고민할 것도 없었다.
위층이 사람들을 실험했던 공간이라면, 이곳은 여러 동물을 실험했던 곳인 듯했다.
문제는 위쪽의 실험체들보다 수가 훨씬 더 많고, 등급 또한 더 높다는 것이었다.
아까보다 확연히 증가한 난이도.
하지만.
“이제 혼자가 됐으니 눈치는 안 봐도 되겠네.”
한상우는 자신을 포위한 몬스터들을 보며 씩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와라, 얘들아.”
[캐릭터 소환 : 땡길거야]
[캐릭터 소환 : 제장이]
두 캐릭터를 동시에 소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