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4장 인연은 바람을 타고(12)
“부르셨습니까, 주군.”
“안녕하세요, 군주님!”
널따란 공동에 묵직한 음성과 해맑은 목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주변에 수백 마리의 몬스터가 있었지만, 그것 따윈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그럴 만했다.
제장이가 많이 성장한 것도 있지만, 땡길거야의 레벨이 999였으니까.
강화 실험체들 역시 땡길거야가 등장하자 포위망을 더 이상 좁히지 못하고 엉거주춤 뒤로 살짝 물러났다.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땡길거야는 자신들이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그만큼 레벨 차이에서 오는 압박감은 대단했는데, 동료라 그런지 제장이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모습이었다.
지금 제장이의 레벨은 89로 땡길거야의 레벨과는 900 넘게 차이가 나는데도 전혀 긴장을 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밝게 인사했다.
“와! 반가워요, 수호 기사님! 잘 지내셨나요!”
“오랜만이군, 꼬마 대장장이.”
땡길거야도 지금껏 본 적 없는, 친절한 목소리로 제장이를 대했다.
그 모습에 한상우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둘이 아는 사이야?”
“그렇습니다, 주군.”
“네! 대장간에서 가끔 마주쳤어요! 지금 수호 기사님이 입고 계신 갑옷도 제가 수리한 거예요!”
그러고 보니 하이어에서 메인 에피소드를 진행할 때 다른 직업의 캐릭터들이 함께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게 실제로 반영되는 듯했다.
그리고 캐릭터 간의 관계는 단순히 안부를 묻는 것에 국한되지 않았다.
[두 캐릭터를 동시에 소환했습니다.]
[캐릭터 간의 상성에 따라 동시 소환 효과가 발생합니다.]
[수호 기사 – 대장장이]
[동시 소환 효과 – 상생 : 수호 기사와 대장장이는 상생하는 관계입니다. 동시 소환으로 수호 기사가 착용한 장비의 능력치가 5% 상승합니다. 대장장이는 자긍심을 얻어 모든 스탯이 5% 상승합니다.]
땡길거야와 제장이를 같이 소환하자 동시 소환 효과, [상생]이 발생했다.
두 캐릭터를 동시에 소환하면 서로를 알아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시스템적으로 추가적인 효과가 생겼다.
‘이거… 생각보다 더 강해질 수 있겠는데?’
당장 땡길거야만 해도 999레벨로, 더 이상 레벨이 상승하지 않을 정도로 강한데 거기에 추가 효과가 붙었다.
만약 여러 캐릭터의 상성 효과가 중첩된다면?
제장이처럼 아직 약한 캐릭터는 물론이고, 땡길거야처럼 강한 캐릭터도 여기서 더욱 강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중의 일이고, 당장은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았다.
우선 강철만을 빠르게 지원하는 게 급선무였는데, 그러기 위해선 몬스터부터 처치해야 했다.
“카르르…!”
“컹컹!!”
강화 실험체들은 땡길거야의 기운에 쉽사리 다가오지 못했지만, 아예 후퇴할 마음은 없어 보였다.
처음에만 주춤거렸지 점점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게다가.
[긴급 퀘스트 발동]
[군주로서 타파해야 할 사특한 기운을 감지했습니다.]
[몬스터가 된 강화 실험체를 처치하세요(0/976)]
시스템도 퀘스트를 통해 경고하고 있었다.
이규진이 몬스터가 됐을 때와 마찬가지로 긴급 퀘스트가 발동한 것이다.
무려 1,000마리에 가까운 적의 수.
혼자서 상대하기에는 물리적으로 지나치게 많은 수였지만, 한상우는 동요하지 않고 차분하게 서 있을 따름이었다.
아니, 오히려 슬며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한상우의 눈엔 주변을 둘러싼 몬스터들이 목숨을 위협하는 적이 아니라 경험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얘들아.”
한상우는 화산검을 들어 올리며 명령했다.
“쓸어버려.”
“명 받들겠습니다, 주군.”
“알겠습니다, 군주님!”
한상우의 명령을 시작으로 전투가 시작됐다.
땡길거야는 재빠르게 앞으로 치고 나가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베었고, 제장이는 후미로 움직여 한 손으로 망치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으랏차아!!”
[캐릭터 : 제장이가 철의 분노를 사용합니다.]
[캐릭터 : 제장이가 내려찍기를 사용합니다.]
[캐릭터 : 제장이가 올려치기를 사용합니다.]
스킬을 사용해 달려드는 강화 몬스터들을 후려쳤다.
아직 레벨이 100도 되지 않아 평균 B급인 놈들을 상대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일시적으로 대장장이의 공격력을 40% 상승시켜주는 [철의 분노]와 망치를 위아래로 휘두르는 [내려찍기], [올려치기]를 통해 몬스터들을 상대한 것이다.
물론, 레벨이 낮아 한계는 있었다.
일격에 몬스터를 처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적의 수가 너무 많아 한상우에게 달려드는 놈들을 모두 잡아낼 순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제장이는 차선책을 선택했다.
“군주님, 버프 걸어 드리겠습니다!”
[캐릭터 : 제장이가 꼬마 대장장이의 용기를 사용합니다.]
[스킬 : Lv 1. 꼬마 대장장이의 용기 – 1분 동안 제작 아이템 사용자의 능력치를 20% 상승시킵니다.]
제장이는 한상우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스스로 판단해 버프를 걸어줬다.
‘충성도가 높아진 덕분인가?’
이전에는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는 특별한 행동을 한다고 느껴지지 않았는데, 이젠 알아서 챙기는 느낌이었다.
“고맙다, 제장아. 그럼 나도 슬슬 몸 좀 풀어볼까.”
B급 몬스터는 미해결 던전에서 단독으로 사냥한 적이 있었고, 지금은 그때보다 강해졌지만 버프 하나도 소중했다.
이렇게 적이 많다면 장기전이 될 확률이 컸고, 이후 루미나스와의 전투까지 생각하면 최대한 체력을 보전해둘 필요가 있었다.
한상우는 화산검과 화산방패를 들고 땡길거야와 제장이가 막지 못하는 구역으로 뛰어들어 전투를 시작했다.
그리고.
“깨갱!!”
“캬욱…!!”
학살이 시작됐다.
[강화 실험늑대(B)를 처치했습니다.]
[군주의 특성, 독존이 발동합니다.]
[경험치 10배를 획득했습니다.]
[캐릭터 : 땡길거야가 강화 실험개(B)를 처치했습니다.]
[군주의 특성, 독존이 발동합니다.]
[경험치 10배를 획득했습니다.]
[…….]
[캐릭터 : 제장이가 강화 실험쥐(C)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 10배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모든 스탯 +1을 획득합니다.]
한상우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제장이와 땡길거야가 얻은 보상까지 열 개가 넘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적은 많았지만, 오랜 시간 방치된 실험체들이어서 그런지 체감상 던전의 B급 몬스터들에 비해 약한 느낌이었다. B급 말고 C급, D급 몬스터가 섞여 있기도 했다.
덕분에 몬스터를 처리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그렇게 10분 정도 사냥했을까.
한상우는 머리를 노리고 달려드는 강화 실험개를 화산검으로 베어버리며 남은 몬스터의 수를 확인했다.
[긴급 퀘스트]
[몬스터가 된 강화 실험체를 처치하세요(403/976)]
두 캐릭터를 동시에 소환했기 때문인지 전투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400마리가 넘는 몬스터를 처치해냈다.
훌륭한 성과였다.
하지만.
“후우, 아직도 절반 넘게 남아 있다니….”
한상우는 잠시 숨을 고르며 화산검에 묻은 몬스터의 피를 털어냈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마나 포션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키면서 생각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네.’
땡-그랑!
빈 포션병을 손에서 놓자 바닥에 쌓여 있던 포션병들과 부딪히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몬스터 처치 속도가 지금도 나쁘지 않았지만, 마나의 소모 속도에 비해서는 빠르지 않았다.
이유는 있었다.
한상우는 몬스터들과 전투를 벌이는 땡길거야와 제장이를 쳐다보았다.
“갸오오…!”
“흡!!”
쿵-! 후두둑-!
지하 공동이 제장이가 망치를 내려치는 작은 충격에도 흔들리며 돌가루를 떨어트렸다. 땡길거야의 공격에는 더 많은 양이 낙하했다.
아무래도 공동을 급하게 만들어서 그런 것 같았다. 천장과 지반이 약하다 보니, 공동이 붕괴할 위험이 있어 땡길거야가 광범위한 스킬을 사용하지 못하는 듯했다.
사실 한상우도 전투 초반부터 이런 위험을 깨닫고 [분화]를 쓰지 않고 있었다.
일반 던전에서 5분이면 잡몹 1,000마리를 광역 스킬로 쓸어버리고 남을 시간이지만, 여기서는 일일이 상대하다 보니 아직 절반도 처치하지 못한 것이다.
또, 마나의 소비 속도가 너무 빠른 탓도 있었다.
지금까지 두 명을 동시에 소환할 일이 없어서 몰랐는데, 상대적으로 소모량이 적은 제장이라도 땡길거야의 마나 소비량을 더하니 결코 적지 않은 양이었다.
하지만 시간을 조금이라도 단축하기 위해선 둘의 동시 소환이 불가피했고 그 결과가 바로.
달그락.
발치에 쌓인 포션병들이었다.
즉, 마나의 소비 속도는 평소보다 빠른데 광역 제거는 할 수 없어 체감 속도가 떨어진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나를 위해서라도, 더 분발해서 빨리 끝내는 수밖에 없어.’
한상우는 왼손으로는 마나포션을, 오른손으로는 화산검을 고쳐 쥐고, 다시 땅을 박찼다.
그리고.
[제국기사단의 검술 제2식 – 반월 베기]
검 끝에 오러를 생성해 칼날을 더욱 길게 만드는 [반월 베기]로 적진을 파고들어 강화 실험체들을 도륙했다.
촤악-! 촤아악-!!
“키에에엑!!”
화산검을 휘두를 때마다 더 많은 강화 실험체들이 갈라졌다.
일반적인 B급 헌터라면 일격에 강화 실험체들을 베지 못했을 테지만, 한상우는 화산검을 들고 제장이의 버프까지 받은 상태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이러한 전술에 단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홀로 적진 한복판에 뛰어들어 무쌍을 찍고 있다는 건, 자연히 적에게 둘러싸이고 등 뒤를 노려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상우에게는 뒤를 지켜주는 이가 있었다.
“뒤를 조심하세요, 군주님!”
퍽-!
“찌직…!!”
[캐릭터 : 제장이가 강화 실험쥐(C)를 처치했습니다.]
강화 실험쥐가 한상우의 등을 노리고 뛰어오르자 제장이가 달려와 망치로 날려버렸다.
“캬오오!!”
그리고 그런 제장이의 주변으로 강화 실험체 수십 마리가 달려들자.
“하앗!!”
이번엔 땡길거야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놈들을 [방패 치기]로 날려버렸다.
“꼬마 대장장이, 무리하지 말도록.”
“감사합니다, 수호 기사님!”
합이 척척 맞는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일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캐릭터들이 알아서 최상의 호흡으로 전투를 펼쳤다.
‘마치 파티 플레이를 하는 느낌이다. 아니, 이때까지 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돼.’
화산검으로 강화 실험체들을 베며 한상우는 지금 벌어지는 전투를 평가했다.
파티 플레이의 경험이 많진 않지만, 소환 캐릭터들과 함께하는 지금이 가장 편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다른 헌터들과 할 때는 어떤 형식으로든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했는데, 자신의 캐릭터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척척 알아서 하는 느낌이랄까.
마치 한 몸 같은 기분이었다.
이때까지는 하나의 캐릭터만 소환하거나 순간 소환으로 위기에 대응했기에 느끼지 못했지만, 두 캐릭터를 동시에 소환하니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건 착각이 아니었다.
“끄웨에엑!!”
[몬스터가 된 강화 실험체를 처치하세요(923/976)]
사냥을 시작한 지 15분.
한상우는 두 캐릭터와 함께 1,000마리에 달하는 강화 실험체들을 거의 다 쓸어버렸다.
땡길거야의 힘은 강했지만 공동의 구조상 제한된 상태였고, 제장이의 전투력은 높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한상우의 통제 아래 정확히 합을 맞춘 세 사람은, 1,000마리에 달하는 몬스터를 거침없이 쓸어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가장 큰 활약을 한 것은 한상우였다. 제장이의 버프가 있었지만 땡길거야와 달리 힘조절을 할 필요가 없어 한복판에서 마구 날뛸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에 따른 체력의 소모는 어쩔 수 없었다.
“하아, 하아….”
어느덧 휑하게 변한 주변과 턱 끝까지 차오른 숨.
한상우는 화산검을 늘어뜨린 채 공동의 끝으로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위층으로 연결된 계단과 함께.
“크워어어!!”
[거대한 강화 실험곰(A)]
보스 몬스터처럼 보이는 녀석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