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5장 보너스 타임(5)
-얘기 들었어? 간밤에 잡화상점 직원 토레스가 도적단한테 당했대.
-그저께는 나무꾼 반탈레만이 산적한테 죽지 않았나? 후, 이거 무서워서 살 수가 있나.
-제국군은 뭐 하는지 모르겠어. 치안이 이렇게나 안 좋은데 말이야.
-이런 촌구석은 신경 쓰기 싫다는 거겠지. 세금은 꼬박꼬박 받아 가면서 말이야.
귓가로 들려오는 아저씨들의 대화.
나는 앙상한 팔과 다리를 흐느적거리며 오물과 악취가 풍기는 뒷골목을 걷고 있었다.
시야가 갑작스럽게 바닥과 가까워지고, 온몸에는 힘이 쭉 빠졌지만 크게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다크어둠의 기억 체험.
풍경이 바뀌기 전, 메시지로 확인하기도 했거니와 이전에도 몇 번 겪어 이제는 익숙해졌다.
나는 오감에 몸을 맡기며 다크어둠의 어린 시절에 동화됐다.
저벅- 저벅-
다크어둠이 된 나는 수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도시의 뒷골목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러자.
-쯧, 저 아이도 부모가 살아 있었다면 저리되지 않았을 텐데.
-그러게 말이야. 저 아이의 부모는 집에 조용히 있었는데 도적단과 암살단의 싸움에 휘말려서 죽었지? 참 운도 지지리 없어. 하필이면 판자촌이 전장이 되다니 말이야.
골목길에 서서 대화를 나누던 아저씨들이 나를 보며 혀를 찼다.
더불어.
-얘야, 이리 와서 이거나 하나 먹어라.
부모와 집을 잃고 돌아다니는 내가 딱해 보였는지 빵 한 조각을 내밀었다.
이미 지나온 길이었지만 다시 돌아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곧장 아저씨들한테 다가갔고, 한 조각밖에 되지 않는 빵을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어휴, 며칠을 굶었는지 아주 그냥 뱃가죽이 등이랑 붙었네.
-쯧, 이놈의 세상이 어떻게 될는지. 꼬마야, 이걸로 고아원이라도 들어가라. 절대 뺏기지 말고.
내 모습이 도저히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수준인 걸까.
부자도 아니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차림새였지만 아저씨들은 주머니에서 은화를 한 닢 꺼냈다.
돈!
눈이 절로 휘둥그레졌다.
저 돈이면 아끼고 아껴 앞으로 한 달은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은화 한 닢을 받으려는 그 순간.
쉬이이이익-! 퍽-!
-끄아아아악!!
갑자기 멀리서 단검이 날아오더니 은화를 건네던 아저씨의 팔을 관통했다.
범인은 근처에 있던, 뒷골목을 운영하는 도적단의 단원들이었다.
-참 희한하지. 아까는 분명 상납금이 없다고 했으면서 은화는 어디서 나셨나?
-이래서 호의를 베풀면 안 돼. 감히 우리를 속여먹으려 들어!
-죄, 죄송합니다. 살려 주십시오!!
갑자기 나타난 도적 두 명.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아저씨들은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 애원했지만 도적들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고, 자비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킥킥, 그럼 거짓말을 하지 말았어야지!
촤아아악-!!
-크헉!!
-아, 안 돼…! 으악!!
은화를 건넸던 아저씨뿐만 아니라 그 옆에 있던 아저씨까지 단검으로 베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자, 이 꼬맹이는 어떻게 할까….
-노예 상인한테 넘기자고. 어리니까 값을 제법 쳐줄 거야, 큭큭!
피가 묻은 단검을 털어내며 내게 다가왔다.
탐욕 가득한 눈빛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도적들은 나를 폭행하고 노예로 팔아버릴 심산인 듯했다.
그러나 그들의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푹-!
내가 아저씨의 잘린 팔에 박혀 있던 단검을 뽑아 다가오는 도적의 허벅지에 꽂아버렸기 때문이다.
-끄아아악! 저 망할 꼬맹이가…!
-킥킥! 애한테 당하냐? 열심히 도망쳐라. 잡히면 죽는단다, 아가야!
기습에 성공한 직후, 나는 바닥에 떨어진 은화까지 주운 다음 뒤도 돌아보지 않고 퀴퀴한 골목을 내달렸다.
어리고 비쩍 마른 몸으로 해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몸놀림.
그러나 아무리 빠르다고 한들 어린아이가 성인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킥킥! 잡았다, 이 쥐새끼 같은 놈!
-으윽!
한참 달리던 도중, 발에 뭔가 걸리더니 몸이 바닥을 굴렀다.
뒤쪽에서 쫓아오던 도적에게 붙잡힌 것이다.
그런데 앞서 봤듯, 다크어둠은 몸이 마르긴 했지만 운동 신경 하나는 뛰어났다.
스칵-!
어지럽게 도는 시야 속, 들고 있던 단검을 던져 발을 건 도적의 얼굴에 상처를 낸 것이다.
-크악! 이 망할 놈이…! 목숨은 살려주려 했더니 안 되겠다. 그냥 죽어!!
방금까지 희희낙락하던 도적이었지만 막상 볼에서 피가 흘러내리자 생각이 바뀐 듯했다.
도적은 손으로 내 목을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키더니 그대로 단검을 내리꽂았다.
그런데.
푹-!
정작 목이 꿰뚫린 건 내가 아니라 도적이었다.
단검이 내려오는 찰나, 웬 길쭉한 칼날이 날아와 도적의 목을 관통해버린 것이다.
털썩-!
내 얼굴 위로 쏟아지는 피 분수.
순간, 환상인가 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가, 감히 누가…!
허벅지를 찔려 절뚝거리며 쫓아오던 동료 도적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그런데 더더욱 현실성이 없는 건 그 이후에 등장한 사람이었다.
-‘감히’? 저 골목을 넘으면 암살단의 구역이라는 걸 잊었나?
도적의 목을 꿰뚫은 장본인이 골목 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었지만 동료 도적도, 나도 곧바로 그를 알아봤다.
-헉! 아, 암살단장 제프…!
암살단을 이끄는 리더, 암살단장 제프가 쇠꼬챙이를 돌리며 나와 도적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제, 젠장! 꼬맹이 자식, 언젠가 꼭 죽여주마!!
그를 발견한 직후, 동료 도적은 곧바로 뒤로 돌아 도망쳤다.
싸움에 승산이 없다는 걸 깨닫고 줄행랑친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이상, 도망치고 싶다고 도망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커헉!
푹-! 털썩-!
앞선 도적과 마찬가지로 동료 도적 역시 멀리서 던진 쇠꼬챙이에 목이 뚫려 그대로 절명했다.
순식간에 도적 두 명이 제거됐다.
그리고 이젠 내 차례였다.
저벅- 저벅-
가까워지는 발소리.
나는 도적의 시체에 깔려 조용히 최후를 기다렸다.
두렵지는 않았다. 다크어둠의 마음은 부모님이 절명하셨던 그날,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므로.
그런데.
-생명은 다른 생명을 짓밟고 살아가는 거다.
제프는 나를 죽이지 않았다.
대신 도적의 시체를 발로 밀고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더니.
-살고 싶으냐? 그렇다면 너에게 다른 생명을 빼앗을 기회를 주마.
살려 주겠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나는 물끄러미 그 손을 바라보다가 맞잡았다.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한 원흉으로 볼 수도 있지만 내심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생명은 다른 생명을 짓밟고 살아가는 것이라는 제프의 말이.
그 뒤로 나는 암살자가 됐다.
-밤길을 걸을 땐 어둠과 하나가 돼라. 마나를 두르고, 숨을 참아라.
-적의 뒤를 잡았다면 망설이지 마라. 잠깐만 머뭇거려도 빛이 당도할 수 있으니.
-단검을 어디다 던지는 거지? 투척술은 암살자의 기본이다.
암살단에 입단,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잠입술을 비롯해 각종 암살 기술 등을 배웠다. 그리고 귀족들에게 의뢰를 받아 정적이나 적국의 주요 인사를 처리하는 암살자로 활약했다.
처음엔 초보 암살자에 불과했지만, 하이어의 임무를 진행하며 나는 암살자로서 이름을 날렸다.
임무를 받는 족족 성공하기도 했지만, 목표를 처치한 후에 노잣돈으로 은화 한 닢을 남겨두는 기행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이다.
은빛 암살자.
은화에서 따온 다크어둠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져만 갔다.
그런데 임무를 받고 동료 암살자들과 수행에 나선 어느 날.
푹-!
나는 동료 암살자들에게 배신당해 배를 관통당했다.
-크윽!
-고생 많았다, 다크어둠. 이번 목표물은 백작이 아니라 너다.
-이유가 뭐지?
기습에 관통상을 입었지만 나는 반격과 동시에 거리를 벌려 큰 피해를 면했다.
다만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단검에 독이 묻어 있어 의식이 조금씩 흐릿해지는 게 느껴졌다.
배신한 암살자들의 인원 역시 30명이 넘어 혼자서 상대하기엔 무리였다.
그러나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억울한 척, 동료들에게 말을 걸어 배후를 알아내는 동시에 비상용으로 입안에 숨겨놓은 해독제를 씹어 몸을 회복시켰다.
다행히 눈치채는 이는 없었다.
동료 암살자들이 거만한 표정으로 질문에 답했다.
-이유야 이것저것 갖다 붙일 수 있겠지만 가장 큰 건 하나다. 제프 단장님께서 네게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지. 우리 역시 마찬가지고.
-어렸을 때부터 봐왔지만 다크어둠, 넌 너무 뛰어났어. 모든 암살자가 질투할 정도로 말이야.
-그러게, 거물급 계약은 독식하지 말았어야지. 너 때문에 우리 수입이 얼마나 줄었는지 알아?
나오는 말은 많았지만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다크어둠이 워낙 많은 거물을 처치하다 보니 암살단장은 압박감을 느끼고, 일반 단원들은 수입이 줄어 반감이 생긴 것이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했던가.
재능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 모두가 위협을 느끼는 지경에 이른 듯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삶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함께 나눴던 우애도 여기까지군.
나는 짤막한 인사를 남기곤, 30명이 넘는 암살자들을 모두 제거했다.
그리고.
온몸이 피로 물든, 만신창이의 몸을 이끌고 성으로 잠입했다.
-다, 다크어둠! 네 녀석이 여길 어떻게…!
-제프 단장,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저놈을 죽여 이제까지의 암살 의뢰를 묻어 주겠다고 하지 않았소!
암살단장 제프는 제국의 실세인 미하일 백작과 대작하고 있었다.
암살자들은 사선을 넘나들고 있는데 유유자적하게 술이나 마시고 있다니.
나는 태연하게 두 사람 앞에 다가가 술을 들이켠 후, 탁자에 거칠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예전에 네가 말했었지. 생명은 다른 생명을 짓밟고 살아가는 거라고.
어렸을 땐 이해하지 못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초식동물이 살기 위해 풀을 뜯고, 새가 살기 위해 벌레를 먹듯 인간 역시 살기 위해선 다른 생명을 취해야만 했다.
나는 동료들을 베었던 쌍단검을 들고, 암살단장과 백작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살아갈 것이다. 오늘의 너를 짓밟아서.
선전포고였다.
-가, 감히 애송이 녀석이…!
-암살자 주제에 기고만장하기 짝이 없구나!
제프와 미하일이 검을 뽑아 저항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옛날의 비쩍 마른 꼬마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각종 검술과 마법을 동원해 나를 죽이려 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나태했던 세월은 몸을 둔하게 만들었고, 발버둥을 칠수록 역습할 기회만 줄 뿐이었다.
서걱-! 촤악-!
-크헉!!
백작성에 울려 퍼지는 단말마.
혈투를 벌였지만 암살단장과 백작은 쌍단검에 쓰러졌다.
-헉! 백작님께서 쓰러지셨다…!
-잡아라! 암살자가 잠입했다!!
백작의 호위 기사들이 뒤늦게 방으로 뛰쳐 들어왔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팅-!
나는 바닥에 쓰러진 백작과 암살단장의 신형 앞에 은화를 튕겨 보낸 뒤, 그대로 성에서 뛰어내려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윽고.
[다크어둠의 기억 재현을 종료합니다.]
화아아아악-!!
내 의식도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