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5장 보너스 타임(6)
“정신이 드십니까, 마스터?”
“군주님! 괜찮으세요?”
눈을 뜨자 나를 부축하고 있는 다크어둠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제장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소환 캐릭터의 기억을 체험하는 동안 의식을 잃은 듯했다.
“그래, 괜찮으니 걱정 안 해도 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몸 여기저기를 살펴봤다.
잠깐 기절하긴 했지만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상하게도 컨디션이 한결 나아진 느낌이었다.
새로운 스킬도 획득했고.
[암살자 연계 퀘스트를 클리어했습니다.]
[다크어둠의 그림자 밟기(1/1)]
[보상을 습득합니다.]
[Lv 1. 은빛 암살자의 잠행술을 획득합니다.]
기억 체험을 마치자 제국기사단의 검술을 배웠을 때처럼 다크어둠의 기술을 습득했다.
은빛 암살자의 잠행술.
다크어둠이 암살단에서 배운 것 중 하나로 적진에 침투하는 기술들의 총칭이었다.
나는 스킬을 눌러 잠행술의 목록을 살펴봤다.
[Lv 1. 은빛 암살자의 잠행술]
[은신]
[스킬 레벨이 낮아 개방되지 않습니다.]
[스킬 레벨이 낮아 개방되지 않습니다.]
[스킬 레벨이 낮아 개방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은신만 사용할 수 있군.’
다크어둠의 기억과 하이어의 스킬을 떠올려 보면 암살자의 잠행술에는 은신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은신밖에 사용할 수 없었는데 아무래도 스킬 레벨이 낮다 보니 그런 듯했다.
물론, 아쉬워할 일은 아니었다.
[스킬 : Lv 1. 은신 – 몸 주변을 마나로 덮어 신체를 투명하게 만듭니다. 스킬 레벨이 낮아 소리와 기척은 지울 수 없습니다. 피격당하거나 다른 스킬을 준비할 시, 은신이 해제됩니다. 표면적과 유지 시간이 늘어날수록 마나 소모량도 증가합니다. 사용 시, 기본 마나 20이 소모됩니다.]
은신만 해도 상당한 고성능 스킬로, 헌터들이 애용하는 편인데 이게 1단계라는 말은 이 이상의 스킬도 있다는 뜻이니까.
조금 의외인 건, 은신은 제국기사단의 검술과 달리 다른 헌터들도 가진 스킬이라는 점이었다.
[은신]
새로운 스킬도 얻었겠다, 나는 곧장 시연해봤다.
샤아악-!
“헛! 암살자님, 군주님이 갑자기 사라지셨어요!”
[은신]을 사용하자 뭔가 얇은 막이 몸을 감싸는 기분이 들더니 제장이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소리친 것이다.
“몸의 힘이 조금 빠져나간다 싶더니…. 밤의 길을 걷게 됐군요, 마스터.”
다크어둠도 약간은 놀란 눈치였지만 느낀 게 있는 듯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나는 [은신]을 해제한 뒤,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아직 흉내 내기에 불과하지만.”
“아닙니다, 마스터. 이미 충분히 훌륭합니다. 다만… 걱정되네요. 아시다시피 암살자의 길은 냉혹하고, 고독하니까요.”
정확한 기전은 알 수 없었지만, 다크어둠도 내가 자신의 기억을 체험한 걸 알고 있는 듯했다.
하이어에서도 플레이해 알고 있었던 암살자의 메인 스토리.
확실히 그 길은 아무나 걸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각성했을 때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런 아픔은 군주가 된 이상, 안고 가기로 결심했으니까.”
군주가 된다는 건 누군가의 삶을 책임진다는 의미다.
하이어의 군주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통솔하는 대상이 게임 속 캐릭터라 할지라도 그 틀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하이어의 군주라는 직위를 받아들이기로 했고, 그렇게 마음먹은 이상 캐릭터들의 삶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다.
고통으로 점철돼 있다고 하더라도 무너지거나 외면해선 안 된다.
[캐릭터 소환]이 단순히 캐릭터를 소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능력 중 일부를 나에게 스킬로 부여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이리라.
이게 누구의 뜻인지, 또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알 순 없었지만 나는 일련의 일들을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가짐은 캐릭터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된 듯했다.
조금은 붉어진 눈시울이 나를 향했다.
“마스터….”
“살기 위해 다른 생명을 앗아야 한다는 건 괴롭지. 하지만 꼭 그것만이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라는 걸 알려줄게. 여기 있는, 내가.”
암살자의 길이 고독하고 냉혹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같이 걷는다면 외롭고 고독했던 길 위에 따뜻한 기억을 한층 덮을 수는 있을 것이다.
나는 다크어둠의 군주로서 반드시 그렇게 하리라 다짐했는데 이건 제장이에게도 영향을 준 듯했다.
“멋져요! 군주님께서 저의 군주님이라는 게 너무 자랑스러워요!”
별것 아닌 대화이거늘 눈을 반짝이며 제자리에서 폴짝 뛴 것이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스터.”
다크어둠도 내게 묵례하며 호응했다.
그런데.
“그럼 저기 있는 몬스터의 생명도 취하지 않으면 될까요?”
“음…?”
뭔가 교훈이 이상하게 귀결된 듯했다.
나는 다크어둠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오염된 물의 여왕(C)]
저 멀리서 여체 형상을 한 물의 정령이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었다.
물의 여왕.
조금 전, 주변에 있던 물의 정령을 처치한 것에 분노했는지 이 던전의 보스 몬스터가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그래도 몬스터는 잡아야지.’
보스 몬스터를 발견하자마자 다크어둠의 질문과 맞물려 그런 대답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다행히 모양 빠지게 입 밖으로 내뱉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농담입니다. 다녀오겠습니다, 마스터.”
마지막에 했던 말은 다크어둠이 농담을 던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다행이다, 좀 더 깊게 이해해서.’
다크어둠과 한층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하이어 내에서 다크어둠이 가끔 농담을 던질 때가 있는데 그건 퀘스트를 클리어한 뒤, 친해진 NPC에게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내 느낌은 맞았다.
[캐릭터 : 다크어둠에 대한 이해도가 증가하였습니다.]
[캐릭터 : 다크어둠의 충성도가 120 상승합니다.]
[캐릭터 : 다크어둠]
[충성도 – 500 / 999]
[충성도가 500을 돌파하여 캐릭터 : 다크어둠이 처치한 몬스터에게서 얻는 경험치 획득량이 5% 상승합니다.]
충성도가 120이나 오르며 추가 효과도 생겼다.
땡길거야의 충성도 상승 효과는 마나 소모량 감소였는데, 다크어둠은 경험치 획득량 증가였다.
비록 얼마 안 되는 수치 같아 보일 수도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샤아아아아…!”
“너의 삶은 오늘까지다.”
저 멀리, 괴성을 지르며 다가오는 보스 몬스터에게 다크어둠이 뒤를 잡아 쌍단검을 내리꽂자.
[캐릭터 : 다크어둠이 오염된 물의 여왕(C)을 처치했습니다.]
[군주의 특성, 독존이 발동합니다.]
[경험치 10배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체력 +1, 마력 +1을 획득합니다.]
무수히 많은 메시지가 뜨면서 레벨이 상승한 것이다.
독존의 경험치 10배 효과와의 중첩을 생각하면, 5%는 결코 작은 양이 아니었다.
더불어 변한 것은 레벨뿐만이 아니었다.
번쩍-! 화아아아악-!!
밤을 베니, 낮이 찾아왔다.
보스 몬스터를 처치하자 물의 정령과 함께 오염되어 있던 숲과 저수지가 정화되면서 본연의 맑고 깨끗한 모습을 찾은 것이다.
먹구름에 가려져 있던 노을도 드러났다.
SNS에서 보던 물의 던전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와! 아름다워요, 군주님….”
제장이가 입을 헤 벌릴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아마 다른 헌터들이 있었다면 사진을 찍고 난리도 아니었겠지.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물의 던전에 진입하기 전, SNS를 통해 수없이 많이 보기도 했거니와 당장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제장이의 인벤토리에서 물병을 꺼내 보스 몬스터가 등장했던 웅덩이로 걸어가 물을 떴다.
[정화의 샘물을 획득했습니다(1/1)]
[조건 달성]
[캐릭터 : 제장이가 스킬 격상을 획득했습니다.]
[스킬 : 격상 – 대장장이의 긍지를 발휘해 아이템의 등급을 영구적으로 한 단계 상승시킵니다. 충전형 스킬로써 충전 횟수가 존재하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충전 횟수 : 1]
[충전 횟수는 재료 획득과 레벨 상승 등 특정 조건 달성 시 증가합니다.]
‘됐다!’
얼마나 고대했던 일이던가.
이거 하나 때문에 부산까지 내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이템의 등급을 영구적으로 한 단계 상승시켜 주는 스킬, [격상].
혹시라도 추가적인 퀘스트를 요구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정화의 샘물을 뜨는 것만으로도 퀘스트가 완료되면서 제장이가 스킬을 획득했다.
그러자 제장이도 정신을 차렸다.
“아앗, 내 정신 좀 봐. 이젠 제가 나설 차례네요. 멋진 걸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군주님!”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던 걸 멈추고, 내 앞으로 우다다 달려오더니 인벤토리에서 모루와 망치를 꺼낸 것이다.
그러고는.
“군주님, 찬란한 현자의 팔찌를 주시겠어요?”
“그래, 여기 있어.”
내게 팔찌를 건네받아 지금까지 모은 재료를 이용해 아이템 업그레이드를 시작했다.
[스킬 : 격상의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
제장이는 먼저 찬란한 현자의 팔찌를 네모난 모루 위에 올리고 정화의 샘물로 세척한 다음, 하이어에서 얻은 광물을 빛으로 빚어 팔찌와 합쳤다.
그리고.
깡-! 깡-!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열심히 두드리기 시작했다.
“뭔가 강인한 기운이 느껴지는군요, 마스터. 꼬마 대장장이의 실력이 보통이 아닙니다.”
“당연하지. 누가 키운 건데.”
망치로 아이템을 두드리는 것뿐이지만, 강인한 기운이 풍기는 게 전투 시에는 느껴지지 않던 제장이의 대장장이로서의 능력이 여실히 들어났다.
비록 레벨은 낮지만 제장이는 최고급 코스로 성장시켰다.
만렙 캐릭터를 육성한 노하우와 헌터 생활로 모은 자본금을 쏟아부어 동 레벨 대장장이 중에서는 대적할 자가 없을 정도였다.
부족한 시간 속에서 잠까지 줄여가며 키웠던 제장이.
만렙이 되기 전까진 큰 활약을 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지금 그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아아아앗!!”
모루 위에 올려진 팔찌와 광물을 향해 제장이가 있는 힘껏 망치를 내려치자.
[캐릭터 : 제장이가 격상을 사용합니다.]
번쩍-!!
[격상]이 발동하면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격상 효과를 받은 아이템의 등급이 상향됩니다.]
[‘찬란한 현자의 팔찌’가 ‘대현자의 팔찌’로 승급합니다.]
새롭게 변한 팔찌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