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5장 보너스 타임(8)
“휴가 한번 거하게 즐기네.”
바다가 보이는 광안리의 호텔.
샤워를 마친 후, 나는 가운을 입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얼마 만에 가지는 휴가던가.
던전 보초를 설 땐 휴가라고 해봐야 일을 쉬고 하루 종일 집에서 하이어를 하는 게 전부였건만, 어느새 부산으로 내려와 바다를 보며 휴가를 즐기고 있다.
물론 오늘은 던전 레이드를 목적으로 왔지만, 마음만큼은 진짜 휴가를 온 것처럼 여유 있고 가슴이 뛰었다.
우선 장소가 탁 트인 바닷가인 것도 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입꼬리가 절로 올라갈 만큼 좋은 걸 얻었기 때문이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 조금 전에 얻었던 아이템을 들어 바라봤다.
[대현자의 팔찌]
[등급 : 전승]
[효과 : 지력 +30, 마력 +60, 마법 저항 +8]
[추가 효과 1 : 마나 증가 - 착용자의 최대 마나를 25% 증가시켜 줍니다.]
[추가 효과 2 : 마법사의 지혜 – 스킬 사용에 소모되는 마나의 양을 35% 감소시켜 줍니다.]
[추가 효과 3 : 현자의 비호 – 착용자에게 가해지는 마법 스킬의 피해량을 5% 감소시킵니다.]
퀘스트 완료 후, 제장이가 [격상]으로 업그레이드한 팔찌다.
등급은 희소에서 전승 등급이 됐다.
명칭은 [찬란한 현자의 팔찌]에서 [대현자의 팔찌]로 바뀌었고, 스탯 효과는 2배 가까이 상승했으며 추가 효과 역시 소폭 증가했다.
마나 증가의 최대 마나가 20%에서 25%로, 마나 소모 감소는 30%에서 35%로 올랐으며, 현자의 비호라는 추가 효과가 새로 생겨 마법 계열 스킬의 피해량이 5% 감소하게 되었다.
찬란한 현자의 팔찌만 해도 상당한 고성능의 아이템이었는데 대현자의 팔찌는 웬만한 랭커도 탐낼 만큼 좋은 아이템이었다.
[캐릭터 소환]의 고질적인 문제인 마나 부족을 일부 해소해주고 마법 저항력까지 높여주니 말이다.
이 정도면, 동시 소환까지는 몰라도 땡길거야나 다크어둠 하나를 유지하는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즐거운 일은 이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여섯 번째 업적은 선행 조건을 달성할 시 개방됩니다.]
[선행 조건 – 레벨 100 달성(99/100)]
물의 던전을 클리어하면서 여섯 번째 업적의 선행 조건인 100레벨까지 단 1레벨만 남겨둔 것이다.
‘음, 이대로 끝내기엔 뭔가 아쉬운데. 당장 들어갈 수 있는 던전 없나.’
원래는 제장이의 [격상] 퀘스트만 완수할 생각이었지만, 남은 레벨이 1밖에 되지 않자 마무리 짓고 싶은 욕심이 생겨났다.
과연 100레벨이 되면 이번엔 어떤 업적과 보상이 생길 것인가.
미리 짜뒀던 계획은 휴식을 취하는 것이었지만, 이대로는 궁금증과 기대감에 잠을 잘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당장 들어갈 수 있는 던전이 있나 찾아나 보자. 없으면 말고.”
나는 하이어 자동 사냥을 켜놨던 폰을 집어 헌터 어플에 들어갔다.
그리고.
“운 좋네.”
광안리 사냥터에 있는 D급 던전 입찰을 진행했다.
물의 던전이 워낙 인기가 많은 지역이다 보니, 물의 던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던전이 매진되지 않은 상태였다.
‘딱 100레벨만 찍고 쉬자.’
게임할 때 악착같이 하던 그 버릇이 어디 가진 않았다.
다만 내 몸은 게임 속 캐릭터처럼 무한정 움직일 순 없기에 휴식이 필요하긴 하다.
만약 보상이나 추가 퀘스트가 뜨더라도 그건 내일 확인하리라.
나는 그렇게 굳게 다짐한 뒤, 옷을 갈아입고 사냥터로 나섰다.
* * *
“드디어 밖에 나왔네. 다들 수고했어.”
“오빠도 고생 많으셨어요.”
광안리 사냥터, 물의 던전 앞.
레이드를 마친 헌터들이 밖으로 나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고생은 무슨. 오늘 뒤풀이는 다들 갈 거야?”
“아뇨, 저는 약속이 있어서 안 될 거 같아요.”
“저도 집에서 불러서 힘들 것 같네요.”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사실 뒤풀이할 분위기가 아니기도 하고….”
보통 레이드를 성공적으로 마치면 들뜨기 마련인데, 물의 던전을 나온 헌터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좋지 않았다.
더불어 레이드 후에 예정되어 있던 뒤풀이도 대부분 핑계를 대며 참석하지 않으려는 모습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하, 기분 뭐 같네….”
이번 레이드의 파티장인 윤형민 때문이었다.
복면을 쓴 헌터와의 전투에서 기절하고 깨어난 뒤, 윤형민은 파티원들과 함께 물의 던전 레이드를 진행했다.
사실 기절에서 깨어났을 때, 던전을 돌 만한 기분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맞아 기절한 것은 윤형민이 처음 겪는 일이었으니까.
원래 성격대로라면 윤형민은 눈을 뜨자마자 복수하기 위해 복면을 쓴 헌터를 찾아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주변에 있는 너무 많은 인파의 주목이 쏠려 생소한 느낌이 밀려온 탓이었다.
수치심.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윤형민은 정신을 차린 후, 복면을 쓴 헌터를 찾는 대신 도망치듯 물의 던전으로 들어와 레이드를 진행했다.
파티원들이 따라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중요한 건 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는 것이었고, 당장 거기서 도망칠 명분이 필요했다.
윤형민은 물의 던전으로 들어가 몬스터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고, 파티원들은 그 뒤를 따라 들어가 윤형민의 기분을 풀어주려 노력했다.
그러나 파티원들의 노력은 소용없는 짓이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윤형민은 표정을 구기며 불편한 심기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레이드 분위기가 박살 나는 건 당연지사였고, 그 여파 때문인지 본래 목적이었던 SNS용 감성 사진 역시 잘 나오지 않았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윤형민의 성격은 평소에도 괴팍했던지라, 종종 분위기를 망쳐도 나름 잘 극복해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해 파티원들도 피로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다들 다음에 보자고.”
“네, 들어가세요.”
파티원들은 그대로 작별 인사를 나누고 뿔뿔이 흩어졌다. 심복으로 부리던 갑옷 헌터도 윤형민의 눈치를 보다가 꾸벅 인사하고 도망쳤다.
‘쳇, 당분간은 혼자 다녀야겠네.’
분위기상 앞으로 다시 모이기는 힘들어 보였지만, 윤형민도 미련을 두지 않고 사냥터를 벗어났다.
그런데 광안리 해수욕장을 벗어나려던 그때.
‘잠깐, 저 녀석은…?’
뭔가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B급 헌터.
자신에게 개망신을 선사했던 그 녀석이 자신보다 한 박자 빠르게 사냥터를 벗어나 해수욕장 거리를 걷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녀석을 발견한 순간, 윤형민은 같은 방향으로 걷던 파티원 한 명을 불러세웠다.
“야, 서희진. 이리 와봐.”
“네? 저, 저요…?”
윤형민의 부름에 단발머리 여성이 모래사장을 걷다 말고 몸을 흠칫 떨었다.
그녀는 옆에 있던 동료 헌터를 쳐다봤지만,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별 방법이 없다는 뜻.
서희진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는 윤형민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윤형민이 저 멀리, 인파 사이에 있는 한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놈 아까 그 B급 헌터 맞지?”
“어? 네. 맞는 것 같아요.”
검은 재킷과 머리 스타일이 앞서 봤던 B급 헌터와 일치했다.
또다시 싸움을 걸려는 것일까.
서희진은 불안한 눈빛으로 윤형민을 바라봤는데 역시나 불길한 느낌은 맞아떨어졌다.
“역시. 크큭, 다행히 운이 좋았네. 아니, 나쁘다고 해야 하나?”
멀리서 한상우를 B급 헌터를 쳐다보던 윤형민은 낮은 웃음을 흘리고는 서희진에게 말했다.
“야, 너.”
“네, 네?”
황급히 자리를 뜨려고 하던 서희진은 자신을 부르는 윤형민의 싸늘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저 새끼 어디서 묵는지 알아내.”
“네…? 제가 왜….”
“닥치고 하라면 해.”
순간 윤형민의 안광이 붉고 사납게 번뜩였다. 몬스터이기는 하지만 생명을 수없이 거뒀기에 가질 수 있는 근본적인 위압감.
각성자지만 싸우는 걸 싫어해 실전 경험이 거의 없는 서희진은 순식간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미행을 하든, 가서 직접 물어보든 그건 네가 알아서 하고. 알았어?”
끄덕.
서희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윤형민은 벌벌 떨고 있는 서희진을 보며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 쫄아? 누가 보면 내가 너 잡아먹는 줄 알겠다.”
서희진은 윤형민의 말에 다시 한번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그의 말대로 한상우가 묵는 곳을 찾기 위해 뒤를 쫓았다.
잘못된 일이라는 것도, 자신이 윤형민의 명령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았지만 세포 하나하나에 새겨진 듯한 공포감이 그녀의 몸을 맘대로 움직이게 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속도가 빠른 것도 아니고, 그저 거리를 좀 벌려서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됐으니까.
다만 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뒤따라가고 있는 사람은 조금 전, 윤형민을 기절시켰던 복면을 쓴 헌터와 함께 바람처럼 사라졌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인물이 자신에게 쉽사리 뒤를 잡힌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중간에서 멈출 수는 없었다.
잠깐 머뭇거린 사이, B급 헌터가 호텔로 들어가 엘리베이터 앞에 선 탓이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늦었다간 놓칠 것 같았다.
서희진은 빠른 걸음으로 따라붙었다. 그리고 B급 헌터와 같이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혹시 바깥에도 맥박이 들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마와 등에도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눈치채면 어쩌지?’
서희진은 엘리베이터 벽에 붙어 땀에 젖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는데, 다행히 B급 헌터는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띵-!
11층입니다-
엘리베이터가 목표 층에 도착하자 아무 의심 없이 내린 것이다.
서희진은 B급 헌터를 따라 11층에 내렸다. 그런데 느릿느릿 걸으며 B급 헌터가 배정받은 방의 호수를 확인하려는 순간.
“뭐 하세요?”
무심한 목소리에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서희진은 지금 방문을 열려고 하는 B급 헌터의 앞에서 멍하니 서 있는 상황.
누가 봐도 수상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왜일까?
서희진은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던 몸이 조금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세포에 새겨져 있던 윤형민의 살기가 씻겨 나가는 감각이기도 했다.
그리고, B급 헌터에게 조금 다가가 입을 열었다.
“조심하세요.”
“……?”
상황에 어울리진 않지만 서희진은 나직이 말을 남긴 다음,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쿵쾅쿵쾅-!
이제 심장 박동이 가슴을 뚫고 나오는 게 아닐까 걱정될 지경이었다. 귀도 화끈거렸다.
그녀는 심호흡을 통해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는데 큰 의미는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자, 호텔 바깥에서 윤형민이 기다리고 있었다.
“알아냈냐?”
“…….”
“대답해.”
다시 한번 낮게 깔리는 윤형민의 목소리.
“…1106호예요. 전 이만 가볼게요. 그리고 앞으로 연락하지 마세요.”
길게 얘기할 것도 없었다.
서희진은 핵심만 전달한 다음, 그대로 몸을 돌려 길거리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친구에게 돌아갔다.
대답을 하고 나자 긴장이 확 풀린 서희진은 쌀쌀맞은 태도로 대답했지만, 윤형민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감히 나한테 망신을 줘? 너 이 새끼, 오늘 뒈졌어.”
그의 목표는 오로지 B급 헌터, 한상우였기 때문이다.
윤형민은 고개를 들어 호텔 창문을 올려다봤다. 그러자 서희진의 정보가 사실인 듯 아까까지 꺼져 있던 11층의 한 곳에 불이 켜져 있는 게 보였다.
“아깐 템이 좀 부실했지만… 풀템은 다를 거다.”
한상우의 거처를 확인했지만 윤형민은 곧바로 움직이지 않고,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제대로 조져주마.’
윤형민은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자신이 아이템만 갖추면 한상우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