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6장 한계 돌파(1)
“흐음, 이걸 어쩐다….”
광안리의 호텔 방, 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허공에 뜬 메시지를 바라봤다.
근래 이렇게까지 고심한 적이 있었던가.
점심 메뉴를 고를 때보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지만 고민을 멈출 순 없었다.
[축하합니다!]
[레벨 100 달성에 성공하였습니다.]
[선행 조건 – 레벨 100 달성(100/100)]
[여섯 번째 업적 개방 전, 레벨 100 달성 기념으로 특별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특별 퀘스트 – 군주의 시험(0/1)]
광안리 사냥터에서 100레벨을 달성하자 여섯 번째 업적 대신, 군주의 시험이라는 특별 퀘스트가 생긴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반나절 전, 나는 D급 던전을 입찰받고 광안리 사냥터로 향했다.
레이드는 순조로웠다.
D급 던전이라 그런지 혼자 들어가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았고, 경험치도 알맞게 들어와서 던전을 클리어하자 딱 100레벨이 되었다.
단숨에 달성한 목표.
나는 기존의 계획대로 100레벨을 달성한 직후, 곧바로 호텔로 돌아왔다.
피로가 몰려오기도 했거니와 원래 100레벨을 달성하면 휴식을 취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화장실 들어갈 때의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고.
던전에 진입하기 전엔 레벨 100이 되면 모든 걸 끝내고 쉴 것이라 다짐했지만, 막상 목표를 이루자 계속해서 진행하고픈 욕망이 몰려왔다.
결국, 나는.
‘퀘스트 내용만 확인해보자.’
[군주의 시험]을 클릭해 퀘스트 내용을 살펴봤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특별 퀘스트]
[군주의 시험(0/1)]
[일정한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자신이 군주에 걸맞은 존재인지 증명하세요.]
[퀘스트를 진행할 시, 포탈이 생성되어 임시 던전으로 진입합니다.]
[해당 던전은 난도가 높아 도전 유무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경고 : 도전하기 전에 만반의 준비를 해주세요.]
[선택 가능 시간 – 11시간 08분]
[해당 시간이 모두 소진될 시, 특별 퀘스트는 자동 포기됩니다.]
막상 내용을 확인해보니 특별 퀘스트에 시간 제한이 있었던 것이다.
선택 가능 시간도 11시간으로 자고 일어나면 빠듯할 듯했다.
기존의 계획을 따라서 한숨 자고 갈 것인가, 아니면 당장 갈 것인가.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도전하지 않는 건 선택지에 없었다.
난이도가 높다는 경고가 뜨긴 했지만, 오히려 그 경고가 클리어했을 때의 보상이 크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게임이라면 반드시 랭커를 찍는 고인물의 입장에서 이런 퀘스트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
당장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도전해야 했다.
물론, 꺼림칙한 게 없는 건 아니었다.
‘조심하세요.’
레이드를 마치고 객실에 들어오기 전, 복도에서 한 여인이 내게 뜬금없이 경고를 남기고 도망쳤다.
호텔에 들어오기 전부터 계속 누군가 뒤를 쫓는 게 느껴졌지만, 살기나 수상한 기색은 없어서 그냥 내버려 뒀었다. 그런데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떠난 것이다.
뭘 조심하라는 건지 맥락조차 파악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 짚이는 건 있었다.
루미나스.
얼마 전, 강철만과 함께 녀석들을 일망타진하다시피 했으니 다시 한번 보복을 감행할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그러한 가능성이 떠오르자 마냥 휴식을 취할 수만은 없었다.
좀 더 강해져야 한다.
“좋아, 얼른 깨자.”
위기의 징조가 보이는데 느긋하게 휴식을 취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면 빨리하는 게 낫다.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린 후, 아이템을 장착하고 특별 퀘스트를 깨기 위해 장비를 점검했다.
퀘스트 중 처음으로 경고 메시지가 뜬 만큼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 크게 준비할 건 없었다.
지금 내가 착용하고 있는 장비는 화산검과 화산방패, 그리고 대현자의 팔찌가 전부니까.
그 외엔 [캐릭터 소환]을 쓰기 위해 구비한 마나 포션 수십 개가 전부였다.
다소 적게 느껴질 수 있는 아이템의 수.
그러나 결코 부실한 건 아니었다.
장비의 수는 세 개밖에 되지 않지만, 모두 전승 등급인 데다 [캐릭터 소환]은 SS급 몬스터를 처치할 정도로 강력하다.
“그럼 시작해볼까.”
나는 인벤토리에 보관한 마나 포션의 수를 확인한 다음, 메시지를 눌렀다.
촤아아아악-!
호텔 방 한가운데로 푸른 균열이 생겨났다.
크기는 작으나 사냥터에 형성된 것과 똑같이 생긴 포탈.
이 안에는 과연 어떤 게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두려움과 기대감이 반씩 섞인, 묘한 기분이 전신을 휘감았다.
그리고 그 뒤로 나는.
저벅-
[군주의 시험에 도전합니다.]
발걸음을 내디뎌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 * *
“음,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B급 용병과 레이드를 나섰는데 매복하고 있던 루미나스와 마주했다는 거지? 그 과정에서 실험실을 발견, 홍진성과 황대건 등 몬스터로 변한 녀석들도 처단했고.”
“맞아, 정확해.”
“얘기만 들어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는 게 느껴지는군요. 특히나 실험실 부분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뭔가 계략을 꾸미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 추악한 짓을 벌이고 있었을 줄이야….”
“아오, 개같은 루미나스 새끼들! 아주 아작을 내버려야 돼! 내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게 한이다, 한이야!”
은은하게 빛을 반사하는 샹들리에 아래, 네 명의 남녀가 동그란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언뜻 봤을 땐 고급 호텔의 세미나실에서 담소를 나누는 평범한 광경이지만, 만약 누군가 본다면 입이 쩍 벌어질 것이었다.
강철만, 지소영, 서지환, 추성태.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들은 대한민국의 헌터계를 이끄는 SS급 헌터들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 8명밖에 없는, 대통령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무소불위의 권력자들이 한데 모여 있다니.
일간지의 1면에 실릴 만한 일이었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들이 모두 막강한 힘으로 공익을 추구하는 집단, 디바인 실드 소속이라는 것이었다.
당사자와 핵심 관계자 몇몇을 제외하곤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극비사항.
일련의 사건을 겪은 후, 강철만은 디바인 실드의 일원으로서 동료들에게 연락해 소집을 요청했다.
그리고.
루미나스 소탕.
서울의 한 고급 호텔 세미나실에서 자신이 겪었던 일을 빠짐없이 얘기했다.
한상우와 미해결 던전을 클리어한 직후부터 실험실로 추격해 몬스터 홍진성을 처치한 것까지.
남양주에서 겪었던 일을 동료들에게 알린 것이다.
그러자 다음과 같은 반응이 돌아왔다.
이성적인 판단을 중시하는 지소영은 이야기를 정리했고, 공감 능력이 뛰어난 서지환은 강철만을 위로했으며 불같은 성격을 지닌 추성태는 테이블을 내리치며 이를 갈았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일차적인 반응이었으니, 얘기를 정리한 지소영이 강철만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다른 건 그렇다 치고 마지막에 홍진성은 어떻게 처치한 거야? 루미나스 한국 지부 부지부장이라 실력도 만만찮을 테고, 염력 계열 능력자라 상성에서도 꽤 고전했을 것 같은데.”
“듣고 보니 그렇네요. 루미나스 수십 명을 상대하느라 힘을 많이 쓰셨을 텐데요. 녀석이 예의 강화 물약을 마셨다면 더 강해졌을 것이고요. 숨겨둔 비장의 무기라도 있으셨던 건가요?”
“음? 그렇게 되나? 강철만 강하잖아. 그냥 때려눕힌 거 아냐?”
과연 SS급 헌터였다.
추성태는 터프한 성격이라 별생각이 없었지만, 지소영과 서지환은 강철만의 얘기에서 특이한 점을 파악하고 의문을 제기했다.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그냥 넘길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 둘 다 SS급 헌터이고 직접 루미나스를 상대해 봤기에 눈치챈 것이다.
‘역시 다들 제대로 파악하네.’
강철만은 하나부터 열까지 얘기하긴 했지만, 마지막에 봤던 한상우의 동료들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그들에 대해선 한상우가 숨기고 싶어하기도 했거니와 강철만도 아직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해 언급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정보는 발설하지 않았는데, 그걸 빼고선 몬스터 홍진성을 처치한 게 말이 되지 않았다.
사실상 이번 사건의 핵심이 되는 이야기.
이걸 말하기 위해 동료들을 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강철만은 숨을 고른 후, 말문을 열었다.
“홍진성은 B급 용병, 한상우 헌터의 도움을 받아서 처치했어. 솔직히 그자가 없었다면 난 이 자리에 있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게 가능해? B급이 어떻게 SS급을 상대했다는 거지?”
“힘을 숨기고 있었나 보군요.”
“그런 것 같아. 사실대로 얘기해주진 않았지만 그런 느낌이었어.”
사실과 약간 다르긴 하지만, 강철만은 최대한 자신이 받은 느낌을 얘기하며 정체불명의 사내들에 대해서는 숨겼다.
그리고 틀린 말도 아니었다.
만약 자신의 추측이 맞는다면… 그건 한상우의 힘이기도 하니까.
다행히 동료들도 믿어주는 모양새였다.
강철만은 그제야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하는 얘기인데…. 셀리나 칸데바에게 한상우 헌터를 소개할까 하는데 어때?”
“뭐? 디바인 실드 핵심 멤버로 받아들이자는 말이야?”
“B급 헌터를요? 너무 고평가하는 거 아닌가요?”
“이야, 그 헌터가 엄청 마음에 들었나 본데? 천하의 강철만이 추천을 다 하고 말이야.”
강철만의 얘기에 동료들이 모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셀리나 칸데바.
미국에 거주하는 디바인 실드의 수장으로, 각 나라에서 믿을 수 있는 랭커들을 모아 신성력과 신성 스킬 사용법을 전수해주고, 디바인 실드의 규율을 정립한 여인이다.
사실상 디바인 실드의 창립자로 강철만을 비롯한 SS급 헌터들도 여러 차례 만났지만,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불가사의한 존재.
그녀에게 한상우를 소개하고 싶다는 건 한마디로 디바인 실드의 입단을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이건 가벼운 뜻이 아니었다.
디바인 실드의 입단은 셀리나의 선택 혹은 기존 단원들의 추천으로 이루어지는데, 추천의 경우 2년에 한 번만 할 수 있는 것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셀리나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신성력을 무한정 전수해줄 수는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추천 후 당사자가 테스트에서 통과하지 못하면 다음 추천은 2년 뒤에나 가능하다.
그만큼 디바인 실드 단원들 입장에선 신중하게 결정할 수밖에 없는데 강철만이 추천을, 그것도 B급 헌터를 셀리나와 만나게 하고 싶다고 발언한 것이다.
평소 사이가 좋은 디바인 실드 단원들이었지만 이 문제만큼은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지소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추천권은 나라별로 2년에 한 번씩만 사용할 수 있는 거 알지?”
“그리고 그 추천권은 해당 국가에 있는 디바인 실드 인원의 과반수가 동의해야만 유효하고요.”
“지금 모인 건 네 명이니 우리 중 세 명 이상이 찬성해야 되겠군.”
“응, 알고 있어.”
지소영의 뒤를 잇는 서지환과 추성태의 말에 강철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곧바로 투표가 시작됐다.
다들 바쁜 몸이니만큼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간 것이다.
시작은 추성태였다.
“난 찬성! 강철만을 믿으니 지지하도록 하지!”
길게 말하지도 않았다. 바로 얻게 된 찬성표 하나.
비록 국내의 모든 디바인 실드 인원이 모인 건 아니었지만 투표권은 참석한 인원에게만 있기에 이제 딱 한 명만 더 찬성하면 한상우를 추천할 수 있게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반대할게요. 그간 전도유망하다고 하는 S급 헌터들도 자체 심사에서 떨어졌는데, 이제 갓 데뷔한 B급을 추천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하긴, 디바인 실드에 입단하려면 최소 S급은 넘어야 해. 아무리 B급을 뛰어넘는 실력이라 하더라도 그 정도가 될 것 같진 않아. 추천권을 이런 데 써버리면 한국 지부에 대한 신뢰를 잃을 수도 있어.”
희망을 가진 순간, 서지환과 지소영이 반대 의사를 내비쳤다.
셀리나에게 추천하기엔 한상우의 등급이 너무 낮은 데다 S급을 뛰어넘는 실력을 보여주지 못할 것 같다는 이유였다.
‘역시 무리였나.’
나름 겪었던 일을 상세하게 설명하면 설득이 될 줄 알았지만, 직접 본 게 아니라 그런지 쉽지 않았다.
강철만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그때였다.
“그럼 찬성 두 표, 반대 두 표로 부결된 걸로 처리하지.”
“잠깐, 나 아직 표결 안 했는데?”
돌연 지소영이 손을 번쩍 들었다.
부정적인 의견을 내긴 했지만 반대표로 던진 건 아니었다는 것이다.
강철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음? 반대한 거 아냐?”
“보류야. 한상우 헌터랑 같이 레이드할 자리를 만들어 줘. 직접 보고 자격이 있는지 판단하겠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다들 괜찮지?”
“오! 그거 괜찮네. 지소영이면 여기서 제일 객관적인 편이니까 말이야!”
“뭐, 좋습니다. 저도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어요.”
지소영의 제안에 추성태와 서지환이 동의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호재라 볼 순 없었으니, 지난 몇 년, 이렇게 내부적으로 테스트를 본 사람 중 통과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사실상 제로나 다름없는 가능성.
하지만.
“좋아, 조만간 S급 이상으로 던전 레이드 자리를 만들어 볼게.”
강철만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제안을 받아들인 이상, 추천권은 떼놓은 당상이라는 듯 미소까지 곁들인 것이다.
그 모습에 서지환이 걱정스럽다는 듯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흠, 너무 자신만만한 거 아닌가요? B급이 아니라 A급이라 하더라도 S급 던전 레이드는 쉬운 게 아닌데요.”
“걱정 안 해도 돼. 내 예상이 맞는다면 한상우 헌터는….”
강철만은 폐공장에서 봤던 광경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말도 안 되는 성장 속도를 가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