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6장 한계 돌파(6)
화아아악-!!
눈 부신 빛이 번쩍이며 배경이 바뀌었다.
다시 돌아온 군주의 성 앞 들판.
바닥에 누워 있던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지켜줄 이도 없는데 던전 안에서 의식을 잃는 것만큼 위험한 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기절해 있는 동안 몬스터가 추가로 등장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더불어 기억 재현이 끝나자.
[4층 - 빛바랜 망자들의 왕을 처치하세요(1/1)]
[4층 클리어 완료]
[금제 : 캐릭터 소환 제한이 해제됩니다.]
[군주의 성을 클리어했습니다.]
[진정한 군주의 자격을 증명했습니다.]
[메시지를 터치할 시, 보상이 지급됩니다.]
한 층당 캐릭터 하나만 소환할 수 있던 제한이 풀렸고, 4층 퀘스트가 클리어되면서 보상도 얻었다.
과연 어떤 보상이 올 것인가.
나는 땅바닥에 앉은 채 허공에 떠 있는 메시지를 올려다봤다.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보상은 금방 수여됐다.
[진정한 군주의 자격을 증명했습니다.]
[모든 스탯이 5 증가합니다.]
[소환 캐릭터의 비전투 모드가 개방됩니다.]
[비전투 모드 : 공격 스킬을 사용하지 않는 안정된 상태가 됩니다. 캐릭터 소환 시, 전투 모드 대비 마나 소모량이 95% 감소합니다. 전투가 시작될 시 자동으로 해제됩니다.]
전체적으로 스탯이 증가하고, 새로운 기능인 비전투 모드를 습득했다.
‘비전투 모드? 이건 처음 보는 건데…. 한번 써볼까?’
지금까지 웬만한 스킬이나 능력은 하이어를 플레이하며 경험해 봤지만 비전투 모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마침 금제도 해제됐기에 나는 마나 포션을 여러 병 마셔 보유 마나를 100%로 만든 뒤, [캐릭터 소환]을 사용했다.
[캐릭터 소환 : 제장이]
[캐릭터 : 제장이가 비전투 모드로 소환됩니다.]
[캐릭터 소환 유지의 마나 소모량이 95% 감소합니다.]
[남은 마나 : 99%]
“안녕하세요, 군주님…. 헉! 많이 다치신 것 같아요!”
“이건 괜찮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보다, 너는 어때?”
“저요? 음… 저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요.”
“망치를 휘두르거나, 힘을 주거나 하는 게 어렵진 않고?”
“아! 자고 일어난 것처럼, 주먹을 쥐려고 해도 힘이 잘 안 들어가기는 해요!”
겉보기에도 그렇고 본인도 그렇고 비전투 모드라고 해서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성능은 확실했다.
제장이를 소환하고 시간이 지나도 마나 보유량이 크게 줄지 않은 것이다. 사실상 지금 소환을 유지하는 데에는 마나가 줄지 않는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캐릭터 소환]을 유지하려면 마나가 제법 많이 들기에 지금까지는 레이드를 할 때만 쓰거나, 순간 소환 등을 활용해 어떻게든 마나를 아끼려고 했는데 이제는 그런 부담이 좀 덜어질 듯했다.
사냥이 아닌 던전 탐사나 일상생활 등에도 활용할 수 있고 말이다.
파직-! 화아아아악-!!
보상으로 받은 비전투 모드를 확인하고 있는데 들판 저 멀리, 파공음과 함께 출구로 보이는 포탈이 형성됐다.
‘끝인가? 직접적인 보상은 이게 다인가 보군.’
보상을 받고 나서 생성되는 포탈을 보자 퀘스트를 완료했다는 게 실감 났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바닥을 손으로 짚었다.
그 순간.
파각-!
무언가가 손바닥에 눌리면서 바스라 졌다.
고개를 내려보니 여기저기 칼자국이 난 화산방패의 끝자락이 내 손바닥에 눌려 부서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장비가 많이 훼손됐네.’
화산방패뿐만 아니라 화산검 역시 격전에 군데군데 이가 나가 있었다.
아예 못 쓸 정도는 아니었지만, 두 장비 모두 제법 손상이 커서 성능이 떨어질 것은 불가피했다.
나는 제장이에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안. 네가 신경 써서 만들어준 건데 만신창이가 됐네.”
“괜찮아요! 검과 방패는 수리하면 되죠. 군주님만 무사하시면 됩니다!”
“고맙다, 제장아. 그럼 수리 부탁할게.”
왠지 모르게 기특하다는 감정이 들었다.
나는 제장이의 머리를 헝클어트린 후,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제장이가 부서진 화산방패를 들다 말고 내 팔을 잡으려 했다.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아냐, 방패만 챙겨 줘. 땡길거야 부르면 돼.”
내 말에 제장이는 넵!하고 대답한 뒤 방패를 두 손으로 들었다. 워낙 체구가 작아서 그런가, 방패를 드니 앞이 거의 보이지 않아 뒤뚱거리며 걷는 제장이의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는 피식 웃은 후, 추가로 땡길거야를 소환했다.
[캐릭터 소환 : 땡길거야]
“부르셨습니까, 주군. 홀로 분투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래. 일단 여기서 나가야 할 것 같으니 부축 좀 해줘.”
“알겠습니다. 그런데 괜찮으시다면, 잠시 응급 처치를 해도 되겠습니까? 상처가 생겼을 때 적절히 처치하지 않으면 상처가 곪고 후유증이 남을 수 있습니다.”
“아, 그래. 부탁한다.”
땡길거야는 크게 자상이 나 있는 상처 부위들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잠시 중얼거렸다. 그러자 환한 빛과 함께 어느 정도 지혈이 되면서 고통도 많이 줄었다.
[방패 치기]와 마찬가지로, 수호 기사의 기본 스킬 중 하나인 [응급 처치]였다.
힐러처럼 심각한 상처를 빠르게 치료하진 못하지만 마나가 소모되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사용할 수 있는 게 장점인 스킬이다.
잠깐의 치료가 끝난 뒤, 땡길거야는 나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출구 포탈로 모시겠습니다.”
“잠깐, 들러야 할 곳이 있어. 성 안으로 들어가자.”
“성 안 말씀이십니까? 임무가 모두 끝났는데 이유가 있으십니까?”
“두고 오신 게 있으시면 제가 다녀올게요, 군주님! 명령만 내려주세요!”
사실 그동안 [캐릭터 소환] 스킬의 양상을 봤을 때, 캐릭터들은 소환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내 주변 상황을 아는 듯했는데 내가 체험한 기억의 재현에 대해서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설명하자니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 나는 땡길거야와 제장이에게 솔직하게 얘기했다.
“아냐, 설명하기엔 길어. 오래 안 걸릴 테니까 들어가자.”
“알겠습니다, 주군.”
“예! 장애물은 제가 치우겠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자 둘은 군말 없이 나를 따라왔다.
땡길거야는 날 부축해 부서진 성문으로 향했고, 제장이는 길에 널브러진 잔해들을 부서진 화산방패로 쳐서 날려버렸다.
그렇게 성안으로 들어온 후, 나는 칼레스의 기억에 따라 지하 창고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이 근처인 것 같은데. 제장아, 주변 수색 좀 해볼래?”
“넵! 군주님!”
기운차게 대답한 제장이는 주변을 여기저기 둘러보기 시작했다.
“흠… 이런 구조면 장치가…. 여기는 없을 테고…. 여긴가?”
벽을 통통 치기도 하고, 바닥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듣기도 하며 무언가를 찾던 제장이가 이내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군주님, 여기! 여기에 수상한 벽이 있습니다!”
대장장이는 무기를 만드는 것 외에도 갖가지 장치들을 만들 수 있는데, 그 덕분에 실내의 구조와 장치도 파악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콰직-!!
왕성 중앙 계단 뒤쪽에 숨겨진 가벽을 부수자 웬 커다란 문이 나타났다.
비밀 장치를 이용해 가벽의 문을 여는 방법이 있는 듯했는데, 지금은 그걸 찾을 시간이 없었다.
“잘했다, 제장아. 잠깐 나와 볼래?”
“넵, 군주님!”
콰아아앙-!!
나는 제장이가 벽에서 떨어지자마자 [분화]를 사용해 출입구를 부숴버렸다.
그러자 아래로 내려가는 지하 계단이 드러났다.
“어둡습니다. 계단 조심하십시오, 주군.”
“불 밝힐게요, 군주님!”
깡-! 치익-!
땡길거야는 조심스럽게 날 부축했고, 제장이는 인벤토리에서 부싯돌을 꺼내 복도에 걸린 횃불들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화륵-! 화륵-! 화르르륵-!!
암흑천지였던 지하 통로에 빛이 드리우며 복도 끝, 제단에 놓인 상자를 비추었다.
빛바랜 망자들의 왕, 칼레스의 기억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다른 점이라곤 먼지가 수북하게 쌓였다는 것뿐.
“와, 이런 장소가 숨겨져 있었군요!”
“주군, 잠시 함정이 있나 확인해 보겠습니다. 자, 출발하자. 꼬마 대장장이.”
“네, 기사님!”
비밀 창고가 드러나자 제장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감탄했고, 땡길거야는 부축하던 걸 풀고 상자 뒤쪽 지점까지 가서 안전을 확인했다.
“함정은 없는 것 같군요. 오셔도 됩니다, 주군.”
“상자 위의 먼지는 제가 쓸어 드릴게요!”
“고맙다, 얘들아.”
나는 아직 통증이 올라오는 왼쪽 갈비뼈를 부여잡은 채 비밀 창고 중앙에 놓인 상자 앞으로 다가갔다.
얼마나 오래된 건지, 또 무슨 의도로 준비했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날 위해 준비됐다는 것이다.
나는 한쪽 무릎을 꿇은 뒤,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보석…?”
조막만 한 보석이 놓여 있었다.
루비.
모든 걸 태워버릴 듯 붉은 화염을 머금은 보석이 낡은 상자 정중앙에서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티팩트인가? 아니면 단순 보석?’
외형으로만 봐선 어떤 능력을 가진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는데, 어떻게 사용하는지 탐구할 필요는 없었다.
보석을 잡기 위해 손을 댄 순간.
파아아앗-!!
갑자기 칼레스의 대검과 마찬가지로 루비가 빛으로 분해되더니 내 가슴으로 들어온 것이다.
“주군…!”
“헛! 군주님!”
[캐릭터 : 땡길거야가 전투 모드로 전환합니다.]
[캐릭터 : 제장이가 전투 모드로 전환합니다.]
땡길거야와 제장이가 경계를 시작하자 비전투 모드도 자동으로 해제됐지만, 나는 손을 들어 둘을 제지했다.
“괜찮다. 별거 아니야. 아니, 별거긴 한데 나한테 좋은 거야.”
빛이 몸속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나한테 좋은 것이었다.
“아, 그런 것 같네요.”
“감축드립니다, 주군. 군주로서의 위용이 더욱 높아지셨군요.”
제장이와 땡길거야도 내가 강해진 걸 느끼는 듯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방금 보석이 흡수되면서 획득한 건 일반 스킬이 아니었으니까.
[히든 보상]
[숨겨진 군주의 힘을 발견했습니다.]
[군주의 힘을 획득합니다.]
[획득한 군주의 힘을 어디에 사용할지 결정하세요.]
[강화 / 개방]
[두 개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선택 보상인가. 이런 건 또 처음이네.’
이번 보상은 처음 보는 형식이었다.
정해진 스탯이나 스킬을 자동으로 획득하는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 방식이었다.
선택지는 두 개로, 강화와 개방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었다.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다만 오랜 게임 경력으로 충분히 유추는 할 수 있었다.
강화란 강하게 만든다는 말이니 기존의 능력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이고, 개방은 잠겨 있던 능력을 해방하는 것이니 새로운 능력을 얻을 확률이 높았다.
둘 중 어느 쪽이 정답일 것인가.
고민은 됐지만 길게 끌 필요는 없었다.
하이어뿐만 아니라 여러 게임을 플레이한 게이머로서 이런 경우에 어떤 걸 선택해야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턱을 괴며 잠깐 고심한 뒤, 검지를 옮겨 선택창을 클릭했다.
그리고.
“잘 쓰겠습니다, 칼레스.”
이 공간에 있었던, 먼 옛날의 왕에게 감사 인사를 남긴 뒤, 군주의 성을 빠져나왔다.
* * *
[상태창]
[이름 - 한상우]
[레벨 - 101]
[고유 특성 - 하이어의 군주]
<스탯>
[힘 : 198] [민첩 : 181] [지력 : 257] [체력 : 222] [마력 : 315]
<스킬>
[유일 스킬 – Lv 5. 캐릭터 소환] [Lv 3. 제국기사단의 검술] [Lv 1. 은빛 암살자의 잠행술] [Lv 1. 꼬마 대장장이의 축복] [Lv 1. 침투] [Lv 1. 분화] [Lv 1. 용암 전개]
<특성창 열기>
<장비>
“고생 끝에 낙이 오네.”
부산 광안리의 한 호텔.
나는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서 상태창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평가를 남겼다.
각성한 이후 쉬지 않고 달린 덕분에 레벨은 어느덧 100이 넘었고, 전체적인 스탯 역시 대부분 200을 넘겼다.
특히 지력과 마력은 대현자의 팔찌 덕분에 다른 스탯보다 수치가 월등히 높았다.
‘이 정도면 A급은 충분히 되겠는데? 아니, SS급 몬스터도 처치했었으니 SS급이라고 봐야 하는 건가?’
헌터청의 기준으로 레벨은 여전히 D급이었지만 스탯은 A급이고 스킬은 다크어둠으로 몬스터 홍진성을 처치했으니 SS급이라 봐도 무방했다.
예전에 던전 보초를 설 때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지개벽 수준으로 강해진 것이다.
각성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린 끝에 달성한 결과.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아직 선출하지 못한 하이어의 캐릭터들을 소환하고, [독존]을 십분 활용해 레벨도 계속해서 올린다면?
아마 SS급을 넘어 한국 최초로 SSS급 헌터도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 그 전에.
‘후우, 이젠 진짜 쉬자.’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휴가를 즐긴다는 마음으로 내려왔는데, 실제로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했기 때문이다.
빛바랜 망자들의 왕이 만든 상처에서 아직 통증이 올라오기도 하고.
나는 폰으로 하이어 자동사냥을 돌려놓은 다음 눈을 감았다. 알람도 껐다.
그런데.
세상은 아직 내가 쉬길 바라지 않는 것 같았다.
모처럼 마음먹고 푹 자려고 하는데.
콰앙-!! 쨍그랑-!
뭔가가 창문을 박살 내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