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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키운 캐릭터로 레벨업-62화 (62/169)

제62화

7장 전쟁의 서막(4)

“칫, 무슨 몬스터가 이렇게 많이…!”

서면의 A급 던전 앞, 이은하는 입술을 꽉 깨물며 사선으로 레이피어를 휘둘렀다.

그러자.

[낙화난무]

[세뇌된 켄타우로스(A)를 처치했습니다.]

[흑화된 아울베어(B)를 처치했습니다.]

[세뇌된 켄타우로스(A)를 처치했습니다.]

사사사사삭-! 촤악-!!

“갸악!!”

사방에서 달려들던 몬스터 십여 마리가 여러 갈래로 토막 났다.

스킬 하나에 열 마리가 넘는 A급 몬스터가 목숨을 잃고 재로 변한 것이다.

가공할 만한 파괴력.

이에 미처 도망가지 못했다가, 이은하에게 구조를 받은 시민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사, 살았다!!”

“A급? S급 헌터이실까?”

“바보야, 이은하 헌터님이잖아! 몰라?”

“진짜네? 설마 부산에 계실 줄은 몰랐지!”

“살았다! 이은하 헌터님이 올 정도면, 곧 해결되겠어!”

이은하에게 S급 헌터이자 헌터청의 간판이라는 명성이 있다 보니 기대에 부푼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의 염원과 다르게 이은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대체 몬스터가 왜 점점 많아지는 거야? 설마 던전 브레이크가 더 터진 건가?’

주변을 가득 메운 몬스터 때문에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지만, 최초 보고 이상으로 던전 브레이크의 수가 많아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정도 싸웠으면 전부 해결됐어도 이상할 게 없는데, 베어도 베어도 끝없이 몰려오는 몬스터들.

등급도 A급에서 B급으로 낮은 편이 아닌 데다 시가전이라는 특성상 건물들에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하다 보니 범위가 넓고 강한 스킬을 쓸 수도 없었다.

대인 전용 스킬을 최대한 활용하고, 기동력을 살려서 빠르게 처리했음에도 처치하는 속도가 몬스터가 나오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공무원 헌터들이 있긴 했지만, 머릿수 채우기로 온 인원들도 있어 큰 도움이 되진 않았다.

몬스터의 수가 불어나자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대로 쪽으로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으윽! 몬스터들이 너무 많습니다!”

“전원 후퇴! 후방에서 진형을 재정비하고 싸운다!”

“어디 계십니까, 이은하 헌터님!”

거대한 몬스터들 때문에 서로의 모습도 확인하기 힘든 상황.

“다들 대열 정비해서 싸우세요! 개별 지역 방어는 포기합니다!”

이은하는 공무원 헌터들에게 소리친 후, 알아보기 쉬운 높은 건물 근처의 입구로 자리를 옮겨 전투를 지속했다.

던전의 출입구를 봉쇄하는 작전은 실패했으니 차선책으로 주요 거점만 지키기로 한 것이다.

다만 게릴라전에서 지역 수비로 작전을 변경하려면 필요한 인원은 더 많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공무원 헌터는 열 명 남짓으로 턱없이 부족했다.

‘한상우 헌터는 어디 있지? 근처에 있으면 좀 더 수월할 것 같은데…!’

“샤아아악!!”

“칫!”

서걱-! 촤아아악-!!

이은하는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베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까 보여준 한상우의 실력을 생각하면 그의 지원만으로도 훨씬 여유로워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몬스터가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전, 농담을 주고받은 이후로 이은하는 한상우와 마주치지 못했다.

아무래도 계속 움직이면서 싸우다 보니 이은하에게 보이지 않는 곳까지 이동한 듯했다.

그때였다.

쿠우우웅-!!

빌딩 맞은편 저 멀리서 폭음이 들려왔다.

‘저쪽도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났다고?’

아마 저 폭발의 진원지에 한상우가 있겠지만, 그를 찾았음에도 이은하의 표정은 굳어졌다.

주변에 포진한 몬스터들과 반대편에서 터진 던전 브레이크를 고려해봤을 때, 지금 상황은 여기 있는 열 명이 조금 넘는 인원으로 커버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혼자서라도 어느 정도 수습을 할 수는 있었다.

다만 시가지에 피해가 없을 거라 장담할 수는 없었다.

아직 사용하지 않은, 가장 강력한 스킬을 사용하면 몬스터들은 정리할 수 있겠지만 건물들이 무너질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미처 도망가지 못한 사람들이 계속 나오고 있는데, 그 파괴의 여파에 휩쓸리기라도 한다면?

‘몬스터를 처치해 봤자,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다친다면 아무 의미 없어. 하지만 이대로 버틴다 해도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건 시간 문제인데….’

이은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강력한 스킬을 쓰지 않는다면 몬스터들의 물량을 따라갈 수 없고, 만약 보스 몬스터라도 나온다면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게 빤했기 때문이다.

‘그래, 차라리 시도라도 해보는 게 나아!’

촤차작-!

“케에에엑!!”

이은하는 [낙화난무]로 주변을 한 번 정리한 뒤, 더 강한 스킬을 쓸 준비를 했다.

그런데 막 비장의 스킬을 사용하려던 찰나.

뭔가 시야에 잡혔다.

검은 로브를 입은 정체불명의 사내들이 빌딩 맞은편의 건물 옥상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다가 사라진 것이다.

‘누구지?’

온갖 의문이 쌓인 지금 상황, 수상한 인물이 수상한 행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순간 강렬한 직감이 이은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최근, 강철만과 한상우를 습격한 루미나스와 이번에 발생한 이상 사태. 그리고 수상한 인물의 등장.

‘설마…?’

지금 당장 쫓아가고 싶었으나, 이은하는 그러지 못했다.

콰아아앙-! 촤악-! 촤자자자작-!!

“크웩!”

“캭…!!”

추격을 시작하려던 그때, 전황이 일변한 탓이었다.

쾅-! 쾅-! 콰과과과과광-!!

저 멀리, 대로 쪽에서 갑자기 굉음과 함께 폭발이 일어나더니 무수히 많은 몬스터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무, 무슨…?”

이은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형차량이나 가스관이 폭발한 건가 싶었지만 화염이 없는 걸 보니 그건 아닌 듯했다.

몬스터들을 날려버린 힘은 돌풍과 비슷했는데, 도로에서 시작되어 큰길을 따라 공무원 헌터와 이은하가 있는 쪽으로 내려왔다.

“헉! 저게 뭐야!”

“수, 숙여!!”

대로에 자리를 잡고 있던 공무원 헌터들은 아연실색하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돌풍이 몰려왔지만 주변이 온통 몬스터로 가득 차 있어 대피할 공간이 마땅찮았기 때문이다.

공무원 헌터들은 각자의 방어력에 기대며 폭발을 무사히 견디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콰과과과과-!!

“캬아악!!”

“엥…?”

“뭐, 뭐지? 왜 괜찮지?”

폭발을 정면으로 맞았지만, 공무원 헌터들은 아무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주변에 포진해 있던 몬스터들은 모두 휩쓸려 재로 변했지만 차와 버스, 공무원 헌터 등은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했던 것이다.

공무원 헌터들은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는데, 이은하는 돌풍이 다가오자 곧바로 그 원인을 파악했다.

판금 갑옷을 입은 금발의 기사.

헌터처럼 보이는 인물이 검과 방패를 빠르게 휘두르며 몬스터들을 날려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저, 저게 무슨…?’

다가오는 돌풍의 근원을 보며 이은하는 당황했다.

돌풍으로 착각할 정도의 빠른 속도, 두 배는 큰 덩치의 몬스터 수백 마리를 위로 쳐올리는 힘, 차와 사람에겐 피해를 주지 않는 섬세함 등.

금발 기사가 보여주는 퍼포먼스가 인간의 수준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퍽퍽-! 콰과과과과과-!!

“케에에에엑!!”

“캬악!!”

금발 기사는 이은하 근처에 있던 몬스터도 삽시간에 정리한 후, 골목길로 진입해 안쪽에 있는 몬스터들까지 정리하기 시작했다.

금발 기사는 S급?

…아니, 최소 SS급은 될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누, 누구지? 우리나라에 저런 SS급 헌터는 없는데?’

이은하의 머릿속엔 일치하는 정보가 없었다.

그녀는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8명의 SS급 헌터의 얼굴을 모두 알고 있었는데, 잠깐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금발 기사는 생전 처음 보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따라가서 정체라도 알아내야 할까.

이은하는 낙동강 오리알처럼 거리 한복판에 멍하니 선 채 머뭇거렸는데, 굳이 따라갈 필요는 없었다.

금발 기사가 지나간 자리 뒤로, 작금의 사태를 설명해줄 인물이 등장한 탓이었다.

“음, 강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제국을 수호하는 기사님이니까요. 사실 이것도 모든 힘을 개방한 건 아니실 거예요, 군주님!”

“그래, 기대되네. 전력을 다하면 어떻게 될지.”

콰득-!

“그어어…!”

한상우.

이번 사태 해결을 위해 용병을 부탁했던 한상우가 웬 꼬마와 함께 미처 제거되지 않은 몬스터들을 처치하며 대로를 내려오고 있었다.

분명 같은 적들을 상대했을 텐데도, 크게 힘들어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 알 수 없는 미묘함에 이은하는 홀린 듯 한상우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하, 한상우 헌터님? 혹시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줄 수 있으신가요? 그리고 옆에 있는 꼬마는…?”

금발 기사도 그렇지만 꼬마의 행색도 보통이 아니었다.

언뜻 봤을 땐 미처 대피하지 못한 아이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대장장이가 연상되는 짧은 망치를 들고 가죽 갑옷을 입은 행색은 영락없는 헌터였다.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일과 낯선 인물이 늘어나는 느낌이었는데, 한상우는 별거 아니라는 듯 간단하게 대답했다.

“친구를 좀 불렀습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서요.”

“치, 친구요? 인맥이 엄청나시네요. 저 금발 헌터 분, 최소 SS급은 되시는 것 같은데요? 혹시 누군지 말씀해줄 수 있으신가요?”

“그건 좀… 곤란하네요. 외국에서 온 친구 녀석인데, 비밀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도와주기로 한 거라서요. 신원을 물어도 대답해드릴 수 없네요. 저 친구한테 물어도 말없이 사라지기만 할 겁니다. 비밀이 많은 친구라.”

“아, 그렇군요. 어쩔 수 없죠. 이렇게 도와주시는데 답례를 해드릴 수 없어서 아쉽네요.”

“괜찮습니다. 저 친구 성격이면 개의치 않을 거예요.”

이은하는 땡길거야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지만 구태여 밝히려 들지 않았다.

해외에는 자신이 모르는, 수많은 SS급 헌터가 있기에 그중 한 명이겠거니 생각한 것이다. 무엇보다 이렇게 도움을 받는 와중, 굳이 심기를 거스를 필요도 없었다.

한상우의 말도 틀리지 않았고.

안 그래도 공무원 헌터들이 뒤늦게 금발 기사의 존재를 눈치채고 따라갔는데, 금발 기사는 신경도 쓰지 않고 던전 브레이크 해결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우우우웅-!

<부산 전 지역 던전 브레이크 발생 증가. 부산 헌터청 전 직원, 출동 바람. -부산 헌터청->

방금 온 문자를 확인해보니 지금은 금발 기사의 정체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이은하는 문자를 확인한 후, 다시 레이피어를 들고 뛰쳐나갈 준비를 하며 말했다.

“저는 다른 곳에 지원 가야 할 것 같아요. 여기 말고도 던전 브레이크가 심해진 것 같거든요. 내기는 제가 진 걸로 하죠.”

“음…. 진 걸로 하는 게 아니라, 진 겁니다.”

“제가 졌다니, 무슨 말씀이시죠?”

이미 몬스터를 누가 많이 잡느냐 따위의 내기는 중요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거침없이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해진 이은하가 묻자 한상우가 대답했다.

“제가 더 많이 잡았을 테니까요. 그리고 다른 곳의 던전 브레이크도 이미 해결되어 있을 테니 지원을 가실 필요도 없을 겁니다.”

이은하는 땅을 박차려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현장과 소통하고 있는 것도 아니건만 한상우가 다 알고 있다는 투로 확언했기 때문이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일까?

이은하로선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한상우에겐 그렇게 얘기할 근거가 있었다.

“저 금발 친구랑 같이 온 친구한테도 부탁했거든요. 부산 관광 좀 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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