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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키운 캐릭터로 레벨업-69화 (69/169)

제69화

8장 높은 곳으로 한 걸음(4)

“후우, 진짜 됐네.”

노을이 내려앉은 거리.

나는 길을 걷다가 손에 쥔 종이를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길드 창설 신청서>

<길드명 : 군주>

<길드장 : 한상우>

<…….>

헌터청에서 복사해준 길드 창설 신청서의 내역이 눈에 들어왔다.

최대천과 만난 이후, 나는 신대훈과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가 길드 창설에 필요한 서류를 작성했다.

내가 길드를 만들다니.

솔직히 처음에는 안 될 거라 생각했다.

신대훈이 말하길 신원 미상의 인원들을 데리고 길드를 창설하는 건 헌터청 역사상 전례가 없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헌터청의 수장인 최대천을 만나 담판을 지었고, [캐릭터 소환]도 들키지 않았으며 마침내 캐릭터들을 길드원으로 넣어 길드를 만들어냈다.

“재밌네.”

길드 창설 신청서를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옛날과 비교했을 때 강철만, 이은하, 최대천 등 정점에 선 인물들을 만나니 감회가 새롭기도 했거니와.

<길드원 : 김수호, 이암, 박제장>

길드 창설 신청서에 적힌 캐릭터들의 가명이 웃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성을 이용해 붙인 캐릭터의 가명들.

땡길거야는 캐릭터 명이 이름으로 적합하지 않아서 직업이 수호 기사이니 김수호.

다크어둠도 우리말로 하면 암흑이지만 이암흑이라고 하면 너무 오글거리니 짧게 이암.

제장이는 이름으로 쓰기에 괜찮으니 그냥 박제장이라고 지었다.

그래도 나름 현실에서 쓸 이름이라 최대한 자연스럽게 짓긴 했는데 캐릭터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름 어때? 급해서 내 마음대로 짓긴 했는데.”

나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뒤따라오던 땡길거야와 다크어둠은 대답하지 않고 멀뚱멀뚱 날 바라볼 따름이었다.

‘아참,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었지?’

청장실에서 [캐릭터 소환]을 쓴 당시, 나는 둘에게 절대 말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었다.

길드 창설 신청서를 작성한 후, 헌터청을 나올 때도 소환과 명령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헌터청을 나오면서 상황은 끝났지만 신대훈이 입구까지 마중을 나오기도 한 데다 바로 [캐릭터 소환]을 해제하기엔 오히려 거리에 보는 눈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헌터청에서 여기로 걸어올 때까지 땡길거야와 다크어둠의 소환을 해제하지 않고 비전투 모드로만 바꾸었는데, 녀석들은 내 명령에 따라 단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고 있었다.

요즘 시대엔 보기 힘든 우직함이라고 해야 할까.

흔치 않은 광경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제 말해도 괜찮아.”

“주군께서 직접 새로운 이름을 하사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기품이 느껴지는 작명입니다, 마스터. 평생 기억하겠습니다.”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든 것일까?

땡길거야와 다크어둠은 길 한복판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까지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나는 볼을 긁적이며 난감함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렇게까지 띄울 필요는 없는데.”

“아닙니다. 정말 마음에 듭니다, 주군.”

“저 역시 그렇습니다, 마스터.”

솔직히 작명 센스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지금 우리가 있는 곳도 길 위라 특이한 행동을 하면 이목을 끌기 딱 좋았다.

반응은 곧바로 나타났다.

“우와, 저기 봐. 외국 헌터들인가? 복장 되게 신기하네.”

“영상 찍는 거 아냐? 방어구도 그렇지만 얼굴이 완전 고급진데?”

“그렇네. 배우인가?”

길을 걷던 사람들이 어느덧 걸음을 멈추더니 왕을 대하듯 한쪽 무릎을 꿇은 두 사람을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몇몇은 핸드폰을 들어 사진과 영상을 찍기도 했다.

‘곤란하네. 당장 소환을 해제할 수도 없고…. 잠깐, 굳이 소환 해제를 해야 하나?’

쏟아지는 시선에 고민을 거듭하던 찰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땡길거야와 다크어둠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황급히 들여보낼 필요가 있을까?

물론, 인터넷과 각종 뉴스에 부산 던전 브레이크의 영상이 떠돌아서 알아볼 위험성이 있긴 하지만 일반인이 눈치챌 확률은 낮았고, 사실 이쯤 되면 알아봐도 잡아떼면 그만이다.

게다가 둘 다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내가 키운 자식(?)들인데 구태여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이제는 나도 어느 정도 성장했고 길드도 만들었으며, 헌터청에 공인된 신분도 있으니까.

나는 아직도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녀석들을 보며 입을 뗐다.

“얘들아, 여기 구경 좀 할래?”

“마스터, 구경이라 하시면….”

“그냥 말 그대로 구경이야. 관광이라고 하면 알아 들으려나. 너희들, 소환되면 싸우기만 했잖아. 여기서 보낼 시간이 앞으로 더 많아질 테니 이곳의 일상도 알게 되면 어떨까 싶어서.”

뭔가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지금까지 너무 전투만 치르게 한 것 같아 내가 사는 세상의 일상을 이들에게도 경험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 비전투 모드가 생겨 싸우지 않는다면 마나 소모를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기도 했고, 길드 창설이 전산까지 적용되려면 이틀 정도 걸린다고 안내를 받았기에 여유 시간도 생긴 상황이었다.

“주군의 일상을 알게 된다니 영광입니다.”

“재밌을 것 같네요, 마스터. 그럼 원활한 구경을 위해 주변 정리부터 할까요?”

내 제안에 다크어둠은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쌍단검을 뽑으려 했다.

이거 큰일 날 놈일세.

나는 서둘러 녀석을 제지했다.

“아니, 날 따라오기만 하면 돼. 그냥 뒤에서 보고 들으면서 여기 문화를 익히도록.”

“명 받들겠습니다, 주군.”

“예, 마스터.”

전투에 관해서는 가르칠 게 없었지만, 이쪽의 문화는 알려줄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나는 주변을 돌아보며 이동 경로를 짠 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우선 옷부터 갈아입자.”

한상우 투어의 첫 번째 코스는 옷 쇼핑이었다.

지금 행색으로는 어딜 가나 주목받기에 아이템을 벗고 일상복으로 갈아입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마침 멀지 않은 곳에 백화점이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을 데리고 의류 브랜드 스토어로 들어갔다. 그리고 여러 옷의 디자인과 사이즈를 살펴본 후, 땡길거야에겐 네이비 셋업 슈트를, 다크어둠에겐 브라운 계열의 가죽 자켓과 청바지를 내밀었다.

그런데.

“저… 주군, 이 옷들은 어떤 효과도 붙어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마스터. 이런 걸 입고는 적과 싸우기 힘들 것 같은데요. 움직이기도 불편할 거 같고요.”

웬일인지 둘이 난색을 표했다.

옷에 아이템처럼 추가 효과가 없는 데다 생소한 디자인이라 거부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나는 둘의 모습을 바라보다 씩 웃음 지었다.

조금 궤가 다르긴 하지만 동시에 거부하는 모습을 보니 꼭 형제가 옷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뭐야, 너희 대립 관계 아니었어? 갑자기 왜 의견이 일치하지?”

“저는 수호 기사로서 언제나 올바른 시각을 유지합니다. 삐뚤어진 암살자가 드디어 정신을 차린 게 아닐까 추측됩니다.”

“여전히 환상에 빠져 살고 있군, 오만한 깡통 기사. 나는 그저 실용을 추구할 뿐이다. 현실 따윈 전혀 모르는 궁중 샌님과는 다르지.”

웬일로 죽이 잘 맞나 했더니 대화를 나누기 무섭게 둘이 서로를 바라보며 으르렁거렸다.

역시 친해지는 건 안 되는 건가.

관계 개선을 해서 대립 효과를 상생으로 바꾸고 싶었지만 아직은 무리인 듯했다.

나는 나직이 한숨을 내쉰 후, 양손에 들고 있는 옷을 두 사람에게 들이밀며 말했다.

“그만 싸우고 입고 와. 어차피 지금은 몬스터 잡을 일 없을 테니까.”

“주군의 체통을 위해 참겠다, 뒷골목의 부랑자여.”

“피차일반이다, 깡통 기사.”

둘은 끝까지 티격태격하더니 각자 탈의실로 들어가 장비를 벗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혹시 혼자서 못하나 싶었지만,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탈의실에서 몇 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자 내 시야에도 메시지가 떠올랐다.

[소환 캐릭터의 착장 교체를 감지했습니다.]

[비전투 모드용 인벤토리가 자동으로 열립니다.]

[착용 해제한 아이템은 비전투 인벤토리에 보관되며 전투 모드 전환 시, 입고 있는 복장과 자동으로 교체됩니다.]

[캐릭터 : 땡길거야가 착용 아이템을 해제했습니다.]

[캐릭터 : 다크어둠이 착용 아이템을 해제했습니다.]

‘음, 이런 시스템이 있었군.’

비전투 모드를 활용한 횟수가 적어서 몰랐지만, 착용 아이템을 해제하자 메시지와 함께 비전투 인벤토리라는 게 생겼다.

한눈에 봐도 여러모로 편리한 기능인 것 같았는데 캐릭터들도 잘 활용하는 모습이었다.

딸각-

“음, 이렇게 입는 게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주군.”

“나왔습니다, 마스터.”

둘 다 전언으로 알려주지 않아도 알아서 갈아입고 탈의실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쭈뼛쭈뼛 나오는 녀석들에게 박수를 치며 말했다.

“잘 어울리는데?”

“어색하군요. 하지만 외형만큼은 갑옷보다 더 멋진 것 같습니다, 주군.”

“동의합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편하네요. 선물 감사합니다, 마스터.”

땡길거야와 다크어둠은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 멋있었다.

처음 입어 보는 옷을 어색해하긴 했지만, 얼굴을 공들여 커스터마이징한 것도 있고 기본적으로 비율도 좋다 보니 외형만 보자면 연예인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멋있었다.

땡길거야는 정갈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다크어둠은 마스크 때문인지 신비한 분위기를 풍겼다.

‘좋아, 내친김에 제장이도 소환해볼까?’

멋지게 빼입은 두 사람을 보자니 제장이도 소환하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올라왔다.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나는 매장 내의 계단을 이용해 위층으로 올라가 아동복 코너에서 멜빵 바지와 셔츠, 신발 등을 가지고 내려왔다.

그리고 탈의실로 들어간 뒤, 제장이를 소환했다.

[캐릭터 소환 : 제장이]

[비전투 모드가 활성화됩니다.]

“제장아, 너도 투어 합류해.”

“안녕하세요, 군주님! 군주님의 세상을 구경시켜 주신다니 너무 설레요!”

어떻게 알았는지, 소환하자마자 제장이는 들뜬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래, 이거 입어 볼래? 도와줄게.”

“감사합니다! 혼자서도 할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장이는 혼자서 꼬물꼬물 움직이더니 아이템을 벗고, 내가 준 꼬마 셔츠와 멜빵 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하긴 레벨이 상대적으로 낮다뿐이지 웬만한 헌터들 이상인데, 너무 애 취급을 한 듯했다.

나는 제장이가 스스로 갈아입도록 내버려 뒀는데 마침 새로 확인할 메시지도 생겼다.

[캐릭터 소환: 세 캐릭터를 동시에 소환했습니다.]

[캐릭터 간의 상성에 따라 동시 소환 효과가 발생 및 중첩됩니다.]

[수호 기사 : 상생, 대립 – 모든 스탯 5% 증가, 충성도 3% 감소]

[암살자 : 상생, 대립 – 모든 스탯 5% 증가, 충성도 3% 감소]

[대장장이 : 상생, 상생 – 모든 스탯 10% 증가]

‘세 명을 동시에 소환하면 동시 소환 효과가 중첩되는구나.’

세 캐릭터를 한꺼번에 소환하면 어떻게 될지 궁금했는데, 각자의 관계에 따른 동시 소환 효과가 중첩되었다.

혹시 세 명을 동시에 소환하면 관계가 미묘하게 변해서 동시 소환 효과도 달라지지 않을까 했는데, 앞서 생겼던 것들이 쌓이기만 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새롭게 떠오른 동시 소환 효과를 탐구하고 있었는데, 별안간 아래에서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내려보니 제장이가 허리춤 부분의 멜빵을 제대로 집지 못하고 고군분투를 하고 있었다.

“뒤돌아봐. 그건 혼자 하기 힘들 거야.”

“아앗! 군주님, 감사합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옷을 제대로 입힌 후, 제장이를 데리고 탈의실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멋쟁이가 됐군, 꼬마 대장장이.”

“이야, 소녀들 마음 제법 훔치겠는데?”

대장장이와는 상생 관계여서 그런지 땡길거야와 다크어둠이 다가와 앞다투어 제장이를 칭찬했다.

뭐랄까. 명절에 만난 친척들이 담소를 나누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왠지 모르게 정겨운 풍경에 나는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계산대로 걸어갔다.

“입은 것 전부 계산하겠습니다.”

“네,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

카드를 건네받은 직원이 단말기를 긁어 계산했다.

그런데.

<총금액 : 3,825,000원>

백화점이라 그런가, 세 명이 입은 옷의 총금액이 무려 삼백만 원을 훌쩍 넘겼다.

웬만한 직장인의 한 달 봉급보다 더 나가는 금액.

하지만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결제했다.

비싸긴 해도 내 캐릭터들에게 사주는 첫 선물이라 전혀 아깝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성한 이후 번 돈을 쓸 시간이 없어 통장 잔액에 부족함이 없었기에 무리가 되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제 어디로 가나요, 군주님!”

땡길거야와 다크어둠 사이에서 해맑게 웃는 제장이를 보니 더 좋은 걸 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매장에서 나와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따라와, 눈 번쩍 뜨이게 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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