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화
8장 높은 곳으로 한 걸음(5)
게임 속 캐릭터들에게 내가 사는 세계를 소개하려면 어떤 걸 보여주는 게 좋을까?
보여줄 수 있는 건 많다.
높은 건물부터 시작해서 자동차나 기차, 비행기 등 중세 서양 배경인 하이어에선 볼 수 없는 과학 발전의 산물들을 구경시켜줄 수 있고 바다나 산처럼 멋진 풍경을 가진 관광지로 여행을 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 앞서 내가 선택한 것은….
“와! 군주님, 정말 여기 있는 거 다 먹어도 되나요?”
“음식이 이렇게 많이 있다니 믿기지 않네요, 마스터.”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고급스러운 요리가 인상적인 곳이군요, 주군.”
바로 5성급 호텔 뷔페였다.
백화점에서 옷을 사 입힌 후, 나는 캐릭터들을 데리고 백화점 바로 근처 5성급 호텔에 있는 뷔페로 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관광을 하더라도 배가 든든해야 구경하고픈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식사도 문화의 한 부분으로서 일상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한다.
쇼핑 다음 코스로 아주 적절하다.
다만 메뉴 선정이 좀 난감했는데, 캐릭터들이 어떤 걸 좋아하는지 알지 못했다.
하이어에선 캐릭터들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나와 있지도 않았거니와 이곳의 메뉴를 알려줘봤자 어떤 건지 알아듣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이들을 데리고 최고급 호텔 뷔페로 왔다.
일반적인 뷔페도 괜찮긴 하지만 한국에서 처음 먹는 음식이니만큼 최대한 다양하고 맛있는 요리를 대접하고 싶었다.
“마음껏 먹어. 계산은 먼저 했으니까.”
“헉! 군주님, 진짜 막 먹어도 되나요? 여기 거덜 날 수도 있는데요!”
“저희를 위해 이런 산해진미를 베풀어 주시다니…. 감사히 먹겠습니다, 마스터.”
“멋진 파티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군의 노고가 헛되지 않게 최선을 다해 참여하겠습니다.”
“아니, 그렇게 비장할 필요는 없는데….”
그냥 일반적인 뷔페에 불과하건만, 캐릭터들은 내가 주최한 파티로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녀석들은 접시를 들더니 다른 사람들을 따라 음식을 집었다. 그러고는 내가 자리 잡은 테이블에 앉아 먹기, 아니 폭식하기 시작했다.
스테이크와 랍스터부터 시작해 초밥, 탕수육, 볶음밥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가져와 흡입한 것이다.
‘입에 안 맞을까 걱정했는데 기우였네.’
행여나 맛없다거나 별로라고 하면 어쩌나 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제장이부터 다크어둠, 심지어는 진중한 땡길거야까지 접시에 가득 음식을 담아와 먹으며 감탄했다.
“와구와구! 군주님, 정말 맛있어요!”
“뒷골목에서 먹던 육포와는 차원이 다르군요! 정말 맛있습니다, 마스터.”
“천상의 맛이 따로 없군요. 왕성에서 먹던 것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이 성의 요리사들은 정말 뛰어난 실력을 가진 것 같습니다, 주군.”
“천천히 먹어, 얘들아. 부족하면 더 가져와도 되니까.”
애니메이션이나 시트콤을 보면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접시를 쌓으면서 먹는 장면.
지금 세 사람의 자리가 딱 그런 모습이었다.
물론 뷔페 직원들이 수시로 치워서 그 정도로 높게 쌓이지는 않았지만, 근처 테이블들과 비교했을 때 접시의 양이 몇 배는 더 많았다.
주변 사람들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와, 되게 잘 먹는다.”
“먹방 스트리머인가? 아이도 엄청 많이 먹는데?”
“접시 쌓이는 것 좀 봐!”
곳곳에서 신기하다는 평가와 시선이 쏟아졌다.
밥을 먹기엔 다소 불편해진 상황.
그러나 캐릭터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딸그락- 딸그락-!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든 웅성거리든 상관하지 않고, 꿋꿋이 음식들을 가져와 먹은 것이다.
그렇게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 시간이 흘러가자.
“저게 저렇게 맛있었나? 한 번 더 먹어 봐야겠네.”
“우리는 가자. 나갈 시간 다 됐어.”
구경꾼들도 하나둘씩 음식을 가지러 가거나 뷔페를 나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신기하긴 해도 유명 인사는 아니다 보니 다들 슬쩍 보고 마는 모습이었다.
‘슬슬 먹어 볼까.’
사람들이 줄어들자 나도 경계를 늦추고 식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세 사람과 한 테이블에서 밥을 먹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꼭 식구 같네.’
오랜만에 다른 사람이랑 같이 식사를 해서 그런지, 아니면 내가 플레이하던 캐릭터들이라서 그런지 이들이 꼭 가족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감상을 느끼고 나니 뷔페 이후의 행선지가 자동으로 떠올랐다.
“자, 슬슬 다 먹었으면 다음 코스로 가볼까?”
어느덧 느려진 식사 속도.
다크어둠은 더 이상 접시를 채우지 않았고, 땡길거야와 제장이도 숟가락과 포크를 내려놓았기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갈 준비를 했다.
이에 폭식 후, 쉬고 있던 세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엇, 뭔가 또 있나요? 전 배가 불러서 더는 못 먹을 것 같은데요, 군주님….”
“저도 비슷합니다, 마스터. 여기서 더 먹었다간 적들과 싸우는 데 지장이 있을 것 같아요.”
“걱정 마, 먹으러 가는 거 아니니까.”
“그럼 어떤 활동을 하실 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주군?”
쏟아지는 엄살 속, 나는 캐릭터들에게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거 하러.”
* * *
가족과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
사실 어렸을 때만 해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항상 집에서 볼 수 있었고, 언제까지나 함께 할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대헌터시대가 열리고, 몬스터가 세상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을 때 깨달았다.
영원할 줄 알았던 가족이 한순간 갑자기,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걸.
후회와 통한이 한동안 마음을 짓눌렀다. 그리고 그 뒤로 여러 아쉬움이 스며들었다.
가족들과 만든 추억이 몇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캐릭터들이 식구 같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나는 최대한 즐거운 시간을 많이 남기기로 마음먹었다.
함께 레이드를 하는 것도 즐겁지만 여기서만 할 수 있는 레저를 통해 여러 추억을 쌓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군주님! 이 레이싱 게임이라는 거 엄청나네요! 꼭 진짜 차라는 걸 타고 질주하는 것 같아요!”
“크윽, 저 멍청한 깡통 기사한테 지다니…! 진짜였다면 네 녀석은 목이 꿰뚫렸을 거다!”
“훗, 격투 게임이든 현실이든 10년은 이르다. 뒷골목의 부랑자여.”
도심에 몇 안 남은 오락실로 왔는데 세 명 모두 진짜로 몰입하면서 재밌게 플레이한 것이다.
게임에서 소환된 캐릭터가 게임을 하다니.
뭔가 아이러니한 모습이었지만 사실 겉모습만 보자면 세 명 모두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처음에 오락기를 조작하는 법을 배울 때는 조금 버벅거리긴 했지만 몇 판 하면서 적응이 되자, 그 뒤로는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뛰어난 실력을 보여줬다.
아니, 노는 거에 한번 맛을 들이자 나보다 적극적이었다.
“오오, 군주님! 저기 사람들이 모여 있어요! 저기도 한번 가보시죠?”
격투 대전과 레이싱 게임, 건 슈팅 등 여러 게임을 하는 것도 모자라 제장이가 앞장서서 다른 놀거리도 찾아 나선 것이다.
“잠깐, 저건 사진 가게인데?”
“사진이라…. 어떤 건지 궁금하네요, 마스터.”
“저기 많은 여인들이 웃고 있는 걸 보니 재밌는 것 같습니다, 주군.”
“가시죠, 군주님!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인생필름>
녀석이 가리키는 건 오락실 옆에 붙어 있는 스티커 사진 가게였다.
여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이었는데 보통의 남성이라면 들어갈 생각도 안 할 테지만 다른 세상의 존재여서 그런지 몰라도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결제를 한 뒤, 기계를 조작하자.
찰칵- 찰칵- 찰칵-!
여러 번의 셔터음 뒤로 사진이 인화됐다.
잘 나오진 않았다.
정면을 보고 있긴 했지만 다들 처음이라 시선 처리부터 표정, 자세까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땡길거야의 눈빛은 너무 날카로웠고, 다크어둠은 옆으로 한 발짝 떨어진 탓에 얼굴과 몸이 절반만 나왔으며 제장이는 작은 키 때문에 간신히 상반신만 찍혔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다시 찍자고 아우성일 정도였는데 캐릭터들은 신기하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반응했다.
“우와, 꼭 거울을 보고 그린 것 같은 초상화네요, 군주님!”
“마치 저 기계 안에 고위급 마법사가 들어가 있는 것 같군요, 마스터.”
“기념이야. 한 장씩 가져.”
“감사합니다, 주군. 가보로 지정해 보관하겠습니다.”
결과물만 놓고 보면 다시 찍는 게 맞지만 왠지 모르게 이런 게 더 좋았다.
“자, 이제 한 군데만 더 가면 끝이야.”
“이번엔 어디일지 정말 기대돼요, 군주님!”
나는 캐릭터들에게 사진을 한 장씩 나눠준 뒤, 가게를 나와 마지막 코스로 이동했다.
대망의 마지막 코스는 바로….
“여기도 처음 보는 물건이 많군요, 마스터.”
피시방이었다.
으레 친구들이 모이면 마지막 종착지가 피시방이 되듯 우리도 결국 이곳으로 오고 만 것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처럼 게임을 하러 온 건 아니었다.
지금 내 하이어 계정은 [캐릭터 소환]으로 인해 접속이 불가능한 상태고, 다른 게임을 하기엔 캐릭터들의 명의로 된 계정이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럼에도 피시방에 온 이유는.
“이제 사용법은 다 익혔지? 입찰하는 방법은 시간에 맞춰서 새로 고침한 뒤에 마우스로 클릭하면 돼.”
“넵! 맡겨만 주세요, 군주님!”
“이것도 게임의 일종 같군요. 이번엔 반드시 깡통 기사를 이기겠습니다, 마스터.”
“그런 일은 절대 없을 테니 꿈 깨도록, 암살자.”
던전 입찰을 위해서였다.
마음껏 먹고 놀았으니 마지막에 밥값은 하는 게 미덕이다.
길드 창설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은 상황.
하지만 텀이 생겼다고 해서 레이드를 멈출 순 없었기에 나는 캐릭터들을 데리고 피시방에 와서 단체로 B급 던전의 입찰을 시도했다.
No. 400 B급 던전.
별칭 열렙 던전으로 불리는 이곳은 다른 B급 던전보다 난도가 높지만 1.5배의 경험치를 주는 곳이다.
하여 입찰 경쟁이 심해 나도 여러 번 떨어졌던 곳인데 캐릭터들을 이용해 도전하기로 한 것이다.
열렙 던전의 입찰 오픈 시간은 오후 9시.
시계를 주시하던 나는 초를 세며 캐릭터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자, 다들 준비됐지? 셋, 둘, 하나, 눌러!!”
딸깍-! 딸깍-!
시계가 정각이 되자마자 네 개의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나와 캐릭터 세 명이 모두 입찰에 성공해 내일부터 나흘간 레이드를 진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오오, 군주님! 성공했어요!!”
“임무 완수했습니다, 마스터. 깡통 기사도… 아쉽게도 성공했네요.”
“100년이 지나도 네놈에게 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암살자.”
“좋아, 처음 해보는 입찰일 텐데 멋지게 성공했네. 모두 고생 많았어.”
땡길거야와 다크어둠이 신경전을 주고받긴 했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고 옆자리에 주르륵 앉은 녀석들의 공을 치하했다.
솔직히 실패할 줄 알았는데 세 명 모두 성공했다.
‘비전투 모드, 꽤 괜찮네. 앞으로 종종 활용하면 되겠어.’
사실 처음 비전투 모드를 획득했을 때, 크게 쓸모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마나가 거의 소모되지 않는다고 해도 캐릭터들을 일상에서 사용할 데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전투 외에도 캐릭터들과 일상을 보내니 즐거웠고, 이렇게 입찰에도 활용할 수 있으니 효용성이 크게 느껴졌다.
물론, 비전투 모드에는 이점만 존재하는 건 아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캐릭터들과 성공의 기쁨을 나누던 그때.
저 멀리, 피시방 출입구에서 웬 낯익은 얼굴이 들어오고 있는 게 시야에 잡힌 것이다.
그는 바로.
“음, 여기라고 했던 거 같은데….”
아신 길드의 길드장, 강철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