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화
8장 높은 곳으로 한 걸음(7)
언제였더라.
던전 보초를 서던 시절, 강 영감님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삶을 바꿀, 일생일대의 행운이 반드시 찾아온다네. 그 행운이 한 번으로 끝날지 두 번, 세 번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결코 잡을 수 없다는 것이지. 그러니 언제든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스스로를 연마해야 해.
사실 그때 당시, 귀에 들어오는 얘기는 아니었다.
자기 계발서에 흔히 나오는 얘기이기도 하거니와, 던전 보초를 서며 게임을 하고 있는데 행운이니 기회니 하는 게 내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니 강 영감님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S급 던전 레이드라…. 이 정도 레벨업하면 되려나?”
널따란 동굴 던전 안, 나는 턱 끝에 맺힌 땀을 닦으며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열정의 꿀벌(B)을 처치했습니다.]
[열정의 말벌(B)을 처치했습니다.]
[캐릭터 : 다크어둠이 레어 열정의 여왕벌(B)을 처치했습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힘 +1을 획득합니다.]
지난 시간 동안 노력한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경험치 획득 메시지와 몬스터의 흔적이 바닥에 즐비했던 것이다.
나는 화산검에 묻은 몬스터의 피를 털어낸 뒤, 검집에 넣었다.
그러자.
“축하드립니다, 마스터. 수없이 노력하신 끝에 한층 더 강해지셨군요.”
함께 레이드를 뛴 다크어둠이 고개를 숙이며 축하를 전해왔다.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고생해준 덕분이지. 이제 쉬어도 괜찮아.”
“아닙니다, 마스터. 아이템 회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캐릭터 : 다크어둠이 비전투 모드로 전환합니다.]
휴식을 권유했건만 다크어둠은 고개를 가로저은 후, 아이템을 줍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레이드를 뛴 나를 배려하는 듯했다.
강철만에게 디바인 실드 입단 제안을 받은 지도 어언 일주일.
그동안 나는 B급 열렙 던전을 비롯해 수많은 던전을 돌았다.
강 영감님이 말했던 대로 인생에 몇 번 안 되는 행운을 잡기 위해서는 레벨을 대폭 올릴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땡길거야와 다크어둠이 있다고 해도 136레벨로 S급 던전에 가는 건 무리였기에, 나는 강철만에게 최대한 시간을 달라고 했다.
다만 많은 시간을 확보할 수는 없었으니, 악몽의 던전의 던전 브레이크가 열흘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제 하루밖에 남지 않은 날짜.
촉박한 일정 속에서 나는 남은 시간을 모조리 던전 레이드에 쏟아부었다.
그 결과.
[레벨 - 183]
B급 헌터로 분류되는 180레벨을 넘겼다.
일주일 남짓 되는 시간에 약 50레벨 가까이 올린 것이다.
레벨이 높아질수록 올리기도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속도였지만, 나한테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캐릭터 소환]으로 땡길거야와 다크어둠의 힘을 빌리면 던전을 도는 데 많은 시간이 들지 않을뿐더러, 독존으로 인해 10배의 경험치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닷새 전, 150레벨을 달성한 순간.
[축하합니다!]
[레벨 150 달성에 성공하였습니다.]
[선행 조건 – 레벨 150 달성(150/150)]
[선행 조건 완수 보상으로 군주의 힘을 획득합니다.]
[획득한 군주의 힘을 어디에 사용할지 결정하세요.]
[강화 / 개방]
[두 개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선행 조건 완수 보상으로 군주의 특성을 얻거나 강화할 수 있게 됐다.
‘이때의 선택이 폭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지.’
다크어둠이 아이템을 줍는 사이, 나는 잠시 그때의 상황을 회상했다.
열렙 던전의 보스 몬스터, 광기의 골렘을 처치한 직후 떴던 선택지.
빛바랜 망자들의 왕을 처치하고 압도를 획득했을 때처럼 군주의 특성을 강화하거나, 개방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어떤 걸 택하는 게 최선일 것인가.
빛바랜 망자들의 왕을 처치한 뒤엔 새로운 특성을 확인하는 게 베스트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또 달랐다.
나는 잠깐 고민한 뒤, 손가락을 움직여 강화를 선택했다.
그러자.
[강화될 군주의 힘을 선택하세요.]
[지휘] [평정] [독존] [압도]
[하나만 선택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선택지가 떴다.
네 개의 특성 중 하나만 강화할 수가 있었고, 무작위가 아니라 선택권이 존재했다.
‘다행이네, 선택할 수 있어서.’
특성이 임의로 선정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직접 고를 수 있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미리 생각했던 특성을 선택했다.
내 결정은 바로.
[강화 특성으로 독존을 선택하셨습니다.]
[군주의 특성, 독존이 강화됩니다.]
[특성 3 : 독존 - 군주는 남 밑에 들어갈 수 없는 지고한 존재입니다. 자신보다 레벨이 높은 이와 파티를 맺을 경우, 획득 경험치가 99% 감소합니다. 반대로 혼자서 몬스터를 처치할 경우에는 획득 경험치가 2,000% 상승합니다.]
독존의 강화였다.
S급 던전 레이드가 얼마 남지 않은 만큼 빠른 레벨업을 위해 독존을 강화한 것이다.
이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비록 나보다 고렙인 인원과 파티를 했을 경우 경험치가 사실상 사라진다는 단점은 그대로였지만, 혼자 사냥할 때 20배나 더 많은 경험치를 얻게 됐다.
실로 어마어마한 수치가 아닐 수 없었다.
10배일 때의 성장 속도만 해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는데, 20배라니.
이건 단순 수치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 나타나는 효과도 엄청났다.
독존을 강화한 지 고작 나흘밖에 되지 않았는데 레벨이 150에서 183이 된 것이다.
독존을 강화하기 전에 사흘 동안 던전을 돌았을 때는 136에서 150으로 14레벨이 상승했는데, 독존을 강화한 나흘 동안은 150에서 183레벨로 33레벨이 상승했다.
산술적으로도 2배 넘는 수치이지만 레벨이 높아질수록 필요 경험치도 늘어난다는 걸 감안하면 실로 사기적인 특성이 아닐 수가 없었다.
물론, 이렇게까지 폭렙을 해도 여전히 부족한 레벨이긴 했다.
S급 던전에 가는 헌터들은 대개 A급으로, 최소 레벨만 230이 넘어가니까.
“그래도 이 정도면 훨씬 할 만해.”
하지만 130레벨일 때보다는 상황이 나아졌다고 볼 수 있었고, [제국기사단의 검술]이나 [은빛 암살자의 잠행술], 제장이의 버프 등을 생각하면 A급 헌터에게 밀리는 것도 아니었다.
“마스터, 아이템 습득을 완료했습니다.”
“고생 많았어. 슬슬 밖으로 나가볼까.”
그렇게 지난 일주일 동안의 성과를 정리하고 있는데 아이템 수거를 마친 다크어둠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나는 고생했다는 의미로 녀석의 어깨를 다독인 뒤, 소환을 해제하고 보스방의 포탈을 통해 던전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밖으로 나오자마자.
“와, 미쳤다. 이번에도 벌써 나왔어. 한 시간도 안 걸린 거 같은데?”
“어떻게 B급 던전을 혼자서 도는데 저렇게 빨리 클리어하는 거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S급 헌터인가?”
사람들의 감탄이 들려왔다.
던전을 워낙 빠르게, 또 많이 돌다 보니 사냥터에 있던 헌터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다만 그렇게 많은 수는 아니었으니, 아침이라 대기하는 인원이 대여섯 명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주위를 한 번 쓱 돌아본 후, 사냥터 출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전엔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을 우려했으나 레벨을 올리고 나니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주요 길드에는 나에 대한 정보가 조금씩 퍼진 것인지 미행을 하는 이도 없었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오늘의 레이드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우우우웅-!
폰이 울리면서 문자가 하나 날아왔다.
<우체국입니다. 우체국 등기를 오늘 배달할 예정입니다. 예상 도착 시간은 10:00 – 11:00입니다. 오늘 수령하지 못하실 경우, 17:00까지 우체국에 보관됩니다.>
‘아참, 이거 오늘 받아야 하지?’
던전 레이드에 온 신경을 집중하다 보니 우편을 받을 시간도 없었다.
등기는 본인이 직접 받지 않으면 수령이 되지 않기에 놓고 가라고 할 수도 없었다.
꼭 받아야 하는 서류기도 하고.
마침 시간도 딱 맞았기에 나는 근처의 빌딩으로 이동, 며칠 전에 임대했던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수선한 안을 정리하며 잠깐 기다리자 집배원이 사무실에 방문했다.
“여기 혹시 한상우 님 계실까요?”
“예, 접니다.”
“사인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체부가 건네준 건 B4 크기의 서류 봉투였다.
발신인은 헌터청 본청이었는데, 서류 봉투를 뜯고 안에 든 종이를 꺼내자.
<길드 등록증>
<길드명 : 군주>
<길드장 : 한상우>
<길드 등록 번호 : 170-882-930>
<…….>
정식으로 길드를 창설했음을 알리는 문서가 자태를 드러냈다.
“진짜 길드를 만들었네.”
전산상으로는 이틀 전부터 창설되었지만 직접 문서로 받으니 더욱 실감이 됐다.
‘사무실도 차렸고 말이지.’
나는 길드 등록증을 든 채 주위를 돌아봤다.
40평 남짓한 공간에 설치된 파티션과 책상, 그리고 의자들.
이곳은 일주일 전에 임대받은 길드 사무실이다.
길드를 등록하려면 사업장이 필요하기에 소형 길드에서 쓰던 오피스텔 방 하나를 사무실 용도로 인수한 것이다.
“사무실 정리 좀 해야겠네. 고장 난 것들도 수리하고.”
인수한 지 일주일 가까이 됐지만 방문한 건 두 번째였다.
그간 레벨업에 초점이 맞춰져 잡다한 일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는데, 입찰받았던 던전을 다 돌았으니 미뤄뒀던 일을 처리해야 할 것 같았다.
[캐릭터 소환 : 땡길거야, 다크어둠, 제장이]
“얘들아, 사무실 정리하는 것 좀 도와줄래?”
“새로운 업무 공간을 만드셨군요. 경축드립니다, 주군. 지시하신 대로 폐기해야 할 물품을 한데 모으겠습니다.”
“저는 옷에 먼지 하나 묻지 않도록 바닥 청소를 하겠습니다, 마스터.”
“고장 난 것들은 저한테 맡겨주세요, 군주님!”
[캐릭터 소환]을 사용하자 땡길거야와 다크어둠, 그리고 제장이가 나와 축하와 함께 역할을 분담하기 시작했다.
일일이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청소 정도는 다들 하이어의 세계에서도 했었는지 따로 가르쳐주지 않아도 잘 수행한 것이다.
땡길거야는 쓰레기들을 한데 모았고, 다크어둠은 빗자루와 쓰레받기로 바닥 청소를 했으며 제장이는 꼬마 망치로 고장 난 의자를 수리했다.
“고맙다, 얘들아. 허드렛일이지만 부탁 좀 할게.”
문득 수백 대의 레벨을 호령하는 하이어의 고급 인력들을 이런 데 써도 되나 싶었지만 그래도 손해 보는 일은 아니었다.
“바닥에 먼지가 보이는군. 대충 쓸지 말고 물걸레질을 하라, 뒷골목 암살자여.”
“왕성에서 검만 휘둘러서 청소가 뭔지 모르나 본데, 물걸레질은 마지막에 하는 것이다. 멍청한 깡통 기사 같으니.”
함께 청소하다 보니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형성됐을 뿐만 아니라 캐릭터의 성장에도 도움이 됐다.
깡-! 깡-!
“군주님, 다 고쳤습니다!”
제장이가 의자의 수리를 마친 순간.
[고장 난 물건의 수리를 완료했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캐릭터 : 제장이의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제장이의 레벨이 300이 되었습니다.]
[조건 달성]
[스킬 격상의 횟수가 충전됩니다.]
[스킬 : 격상 – 대장장이의 긍지를 발휘해 아이템의 등급을 영구적으로 한 단계 상승시킵니다. 충전형 스킬로 충전 횟수가 존재하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충전 횟수 : 1]
[충전 횟수는 재료 획득과 레벨 상승 등 특정 조건 달성 시 증가합니다.]
갑자기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엥…?”
제장이는 그저 의자를 수리했을 뿐인데 레벨이 오르면서 격상의 횟수가 충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