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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키운 캐릭터로 레벨업-74화 (74/169)

제74화

8장 높은 곳으로 한 걸음(9)

일 처리는 완벽해야 한다.

아신 길드의 비서실장 남희건은 항상 그런 마음가짐으로 일에 임했다.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다.

그저 강철만과 함께 일하면서 생긴 버릇이었다.

많은 사람에게 존경뿐만 아니라 시기와 질투도 받는 대형 길드이다 보니 작은 흠도 허투루 넘길 수 없었다.

비록 월급쟁이에 불과하지만 남희건은 최선을 다해 강철만을 보좌했고, 그 능력을 인정받아 비서실장 자리까지 올랐다.

준비는 꼼꼼하게, 실행은 힘 있게, 대처는 깔끔하게.

이것은 남희건이 세운 나름의 규칙이었고, 오늘은 그 첫 단계인 준비를 하는 날이었다.

내일 있을 S급 No. 510 악몽의 던전 레이드에 대비해 게이트 주변의 동선과 안전을 체크하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여러 물품을 준비하는 것이다.

“자자! 응급 의료함은 저기 천막 아래에 두고, 내일 비가 올 수도 있다고 하니까 천막 더 깔아둬. 기자들 자리도 사진 잘 나오도록 이쪽에 배치하고.”

남희건은 물자를 옮기는 길드원들을 보며 꼼꼼하게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이야. 우리 남 비서님, 역시 일 처리가 남다르셔요. 보너스 더 챙겨 드려야겠는데요?”

언제 왔는지 강철만이 뒤에서 흐뭇한 미소와 함께 엄지를 치켜들었다.

고개를 돌린 남희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언제 오신 겁니까, 길드장님? 대통령님과의 식사는 어떻게 하시고요?”

“대충 먹고 왔죠. 그놈의 영감탱이랑 나눌 얘기가 뭐 있다고. 차라리 여기 와서 레이드 진행 상황 보는 게 훨씬 더 재밌어요.”

“뭐, 그렇긴 합니다만…. 대통령실에서 한 소리 하겠네요.”

“그거야 능력이 출중한 우리 비서실장님께서 잘 해결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높은 사람 비위 맞추는 것보다 당장 내일 있을 일이 더 중요하니까요. 일반적인 레이드도 아니고 말이죠.”

강철만이 너스레를 떨었으나 남희건은 받아치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같이 너스레를 건네거나 농담을 했을 테지만, 남희건도 내일 있을 S급 레이드의 무게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상우 헌터의 디바인 실드 추천 시험.

이번 S급 레이드는 단순히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 외에도 한상우의 실력을 테스트하는 의미도 있으니, 더 꼼꼼하게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해당 시험은 디바인 실드와 강철만의 심복인 자신만 알고 있는 행사이기에 최대한 일반적인 레이드처럼 보여야 하는 것이다.

“확실하게 준비할 테니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급하게 나오느라 식사도 제대로 못 하셨을 것 같은데, 근처 식당에서 식사라도 하고 오시죠.”

“역시 남 비서님은 절 너무 잘 아신다니까요. 그럼 잠깐 근처 가게에서 숯불 치킨 좀 먹고 올게요.”

“…미리 봐두셨군요.”

“하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오는 길에 눈에 띄더라고요. 그럼 먼저 가 있겠습니다. 일 끝나면 오세요!”

역시 유쾌함의 대명사랄까.

진지할 땐 한없이 진지하지만, 평상시엔 천방지축 그 자체인 강철만이었다.

남희건은 자신의 상관을 향해 귀엽다는 듯 피식 웃은 뒤,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주변을 돌아다니며 물자 배치 장소와 재고 확인 등 행사의 전반적인 준비 상황을 점검한 것이다.

그런데 한창 일하고 있던 그때.

“……?”

뭔가 낯선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S급 던전 포탈을 제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이트 뒤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게이트 뒤쪽은 수풀로 가려져 있고, 배치될 장비도 없는 상황.

남희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리의 진원지로 다가갔다.

딸그락- 딸그락-

수풀 안쪽에는 웬 신형이 쭈그려 앉아 뭔가를 조작하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어디서 오셨어요?”

야구모자도 모자라 그 위에 후드티의 후드까지 푹 눌러쓴 행색.

게다가 얼굴엔 검은 마스크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수상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는데 행동은 더욱 이상했다.

질문이 날아오자.

“칫…!”

퍼엉-!

돌연 남희건에게 무언가를 던졌고, 거기서 풍기는 시커먼 연기에 몸을 숨겨 그대로 달아났다.

“크윽, 저 자식이…!”

남희건은 소매로 코를 막으며 신원미상자를 추격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쉬이익- 우우우우웅-!

연막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대신 신원미상자가 있던 자리에 웬 기계가 남아 있는 탓이었다.

“이게… 뭐지?”

남희건은 추격을 잠시 뒤로 미룬 채 정체불명의 기계에 다가갔다.

컴퓨터 본체만 한 크기에 물통이 달린 기계가 게이트와 연결되어 있었다.

게다가.

[주입 완료 : 100%]

기계에 부착된 작은 화면 위로 웬 글자와 숫자가 떠 있었다.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빨리 잘라야 해…!’

남희건은 검을 빼 들어 게이트에 연결된 선을 끊어내려 했다.

이 기계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몰랐지만, 본능적으로 좋은 게 아니라는 걸 느낀 것이다.

그리고 그 직감은 맞아떨어졌다.

남희건이 검을 내리치려는 순간.

콰아아아앙-!!

갑자기 게이트가 폭발하면서 막대한 충격파가 일어났다.

“크악!!”

몇 미터나 날아간 걸까.

남희건은 바닥을 구르다가 간신히 몸을 추슬러 앞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안정적인 푸른빛을 뿜어내던 던전의 색깔이 급격히 빨간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더, 던전 브레이크…!”

“다들 도망쳐요!”

먼저 소리를 친 것은 근처의 인부들이었다.

“젠장, 아까 그 자식 설마…!”

남희건은 몸을 일으키며 이를 갈았다.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떠오르는 가능성이 있었다.

부산 던전 브레이크 사태의 배후로 지목되었던 루미나스와 수상한 옷차림의 남자.

마음 같아선 당장 쫓아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눈앞의 사태를 수습할 필요가 있었다.

S급 던전 브레이크는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남희건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강철만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신호음이 울리기도 전에 핸드폰을 놓을 수밖에 없었으니.

“샤아아…!”

[악랄한 밤의 약탈자(S)]

2m 남짓한 키에 푸르스름한 피부를 가진 도적 몬스터가 남희건의 뒤쪽에서 나타나 철퇴를 내리꽂았기 때문이다.

“미친…!”

상황을 보고할 겨를도 없었다.

남희건은 기습을 눈치채자마자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몸을 날렸다.

쿠웅-!

약탈자의 철퇴가 땅과 부딪쳐 지축을 울렸다.

바닥이 움푹 파이고, 돌들이 산산조각이 나는 걸 보니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면 이승을 떴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위기에서 벗어난 건 아니었다.

지상에서의 기습은 피했지만.

“캬아아악!!”

[만티코어를 탄 밤의 약탈자(S)]

악몽의 던전에서 나온 몬스터가 한둘이 아니라 공중에서 이어지는 협공은 도저히 피할 각이 나오지 않았다.

사자의 몸에 날개가 달린 신화 속 몬스터, 만티코어.

단독으로도 A급 몬스터인 만티코어를 타고 있는, S급 ‘만티코어를 탄 밤의 약탈자’들이 이번엔 남희건에게 창을 겨누며 활강했다.

‘제길…!’

당황스러움에 욕지거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남희건은 검으로 방어 자세를 취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의 헌터 등급은 A급.

방어 스킬을 사용하긴 했지만, S급 몬스터들의 협공을 막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런데 모든 걸 포기한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쩌어어어엉-!!

“키에에에엑!!”

분명 비명은 자신이 질러야 하건만, 가까이 다가오던 몬스터에게서 괴성이 터져 나온 것이다.

진상은 곧 밝혀졌다.

“뭐야, 이 방해꾼들은? 던전 브레이크까진 좀 남았는데 왜 벌써 기어 나왔어?”

“기, 길드장님…!”

숯불 치킨을 먹으러 갔던 강철만이 어느새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대검에 묻은 만티코어의 피를 털어낸 그가 입에 물고 있던 닭 뼈를 뱉으며 말을 이었다.

“남 비서님, 괜찮으시죠? 괜찮은 거 아니까 브리핑 좀 빠르게 해주세요.”

이보다 더 든든할 수가 있을까.

평소 일은 빠르게 끝내버리고 게임에 열중하는 모습만 봐서 잊고 있었지만, 강철만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SS급 헌터였다.

남희건은 벅차오르는 감동에 소매로 눈가를 훔치곤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방금 게이트 뒤쪽에서 정체불명의 장치를 조작하는 신원미상자를 발견했습니다. 게이트에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정황을 확인했으며, 던전 브레이크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네요. 주변 시민들을 대피시키고, A급 이상 정예 부대 긴급 소집하세요. 헌터청과 근처에 있는 길드에도 긴급 지원 요청하시고요.”

“예! 알겠습니다, 길드장님!”

지시가 떨어지자 남희건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강철만도 서둘러 땅을 박찼다.

가만히 서서 담소만 나누기엔 상황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캬아아아악!”

“샤아아아…!!”

던전 포탈에서 쏟아져 나온 S급 몬스터들이 도심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대로 둔다면 막대한 인명피해가 발생할 터였지만.

“하아아아앗…!”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만티코어를 탄 밤의 약탈자(S)를 처치했습니다.]

[악랄한 밤의 약탈자(S)를 처치했습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강철만이 대검을 휘둘러 녀석들을 정리한 것이다.

3타 혹은 4타.

S급 몬스터들이 몇 번 안 되는 공격에 먼지로 소멸했다.

과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SS급 헌터라고 할까.

“엇, 저거 강철만 길드장님 아니셔?”

“S급 몬스터를 저렇게 손쉽게 처치하다니…!”

던전 브레이크에 시민들을 대피시키고, 마지막으로 퇴각하던 인부들도 멀리서 강철만의 활약을 보고 감탄했다.

그러나.

‘수가 너무 많아.’

전투를 진행하는 당사자의 속내는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포탈에서 나오는 몬스터의 수가 점점 많아지고 있거니와, 특히 던전 브레이크 마지막에 보스 몬스터가 등장할 것까지 생각하면 혼자서 끝까지 상대하기에는 너무 벅찼기 때문이다.

물론 강철만의 레벨은 595로, SSS급으로 분류하는 601레벨에 준하기에 조금 무리하면 혼자서도 S급 던전을 클리어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악몽의 던전은 난도가 높아 디바인 실드의 힘까지 개방해야 할지도 몰랐다.

‘제길, 한 명이라도 제대로 된 지원군이 왔으면 좋겠는데….’

“하아아아앗…!”

이마를 지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

강철만은 포탈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을 대검으로 썰어버리며 한시라도 빨리 지원군이 도착하길 기도했다.

그러자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강철만의 간절함이 닿은 것일까?

슈화아아아악-! 서걱-!!

“키에에에엑!!”

근처 건물 사이에서 웬 오러 블레이드가 날아와 일렬로 나오던 몬스터들을 도륙했다.

누구인지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연락받고 왔습니다. 파티가 좀 빨리 시작됐네요.”

골목길에서 나오는 신형이 꽤나 익숙했기에.

“한상우 헌터…!”

강철만이 감동한 눈망울로 불시에 찾아온 구세주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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