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9장 화려한 축제(11)
“무, 무슨…?”
발밑으로 번지는 짙은 그림자.
루미나스 헌터들이 땅을 내려다보며 우왕좌왕했다.
어느 틈에 새겼는지는 몰라도, 아스팔트 바닥에 그려진 알 수 없는 문양을 중심으로 하수구가 역류하듯 땅이 점점 검은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난생처음 겪는 현상.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가아아아아-
땅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울림과 함께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제일 먼저 반응한 건 한상우였다.
한상우는 한 손으로 이은하의 허리를 감싸더니 뒤로 훌쩍 뛰어 마법진과 거리를 벌리며 말했다.
“이은하 헌터님, 물러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공무원 헌터들도 물러나도록 지시해 주세요.”
“네? 그, 그럴게요.”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고, 한상우도 곧바로 손을 풀고 떨어졌지만 갑작스럽게 훅 들어온 스킨십에 이은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공무원 헌터 전원, 포위망을 넓히세요!”
이은하는 한상우의 말대로 공무원 헌터들에게 거리를 벌릴 것을 지시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저, 저게 뭐지…?”
“모르겠어. 근데 뭔가 안 좋은 기운이….”
이은하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공무원 헌터들이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끼고 단체로 뒷걸음질 친 것이다.
꺼림칙한 기운을 느끼는 건 루미나스 헌터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뭐, 뭔진 모르겠지만 빠져 나가야겠어.”
“맞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어…!”
마강진의 명령이 떨어지지도 않았건만 하나둘 검게 변한 땅에서 탈출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벗어날 수 없었다.
“뭐, 뭐야! 투명한 벽이 막고 있잖아…!”
“이쪽도 마찬가지야! 제길! 깨지지도 않아!!”
어둠이 퍼지는 땅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마법진 가장자리에 웬 투명한 보호막이 설치되어 있어 나갈 수가 없었다.
수많은 이들이 보호막을 검으로 내리찍고 스킬을 난사했지만,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그렇게 루미나스 헌터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죽음이 다가왔다.
쩌어어억-! 콰직-!!
검게 물든 땅에서 돌연 물고기의 아가리처럼 생긴, 거대한 암흑의 실루엣이 솟아나서 한쪽에 몰려 있던 루미나스 헌터 백여 명을 한입에 삼키고 들어갔다.
섬뜩한 소리와 함께 사라져버린 실루엣.
“뭐, 뭐야…!”
“으아악! 사람 살려!!”
남은 루미나스 헌터들은 패닉에 빠져 대응조차 하지 못했다.
물론, 대응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제길, 저게 무슨…!”
포션을 마시며 마나를 회복하던 마강진이 땅속으로 사라진 괴물을 향해 [공간 왜곡]을 사용했지만.
“…….”
어떤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공간 왜곡]을 사용했고 마나까지 소모됐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된 거지…?’
[공간 왜곡]이 제대로 시전되지 않다니?
각성 이후, 수없이 많은 스킬을 써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망할…. 하필이면 마나가 바닥일 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조금 전, 한상우를 공격할 때 쓴 [공간 파동]에 마나를 대부분 사용했기에 [공간 왜곡]을 연속해서 쓰기는 힘들었다.
마강진은 추가 대응 대신 다시 마나 포션을 마실 수밖에 없었는데, 그사이에 피해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쩌어어어억-! 콰직-!!
마법진의 빈 곳을 채우며 점점 넓어지는 암흑 속에서 다시 괴물의 아가리가 튀어나와 루미나스 헌터들을 집어삼킨 것이다.
이번엔 제법 많은 이들이 먹혀 이제 루미나스 헌터는 백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지, 지부장님! 이대로는 전멸입니다!!”
남은 루미나스 헌터들이 마강진을 바라보며 대책을 요구했다.
사실 마강진도 뚜렷한 방법이 없었다.
마법진 주위에 형성된 보호막은 건틀릿으로 쳐도 깨지지 않았고, 시야에 보이는 곳으로 이동하는 스킬 [공간 이동 포탈]도 마법진 바깥으로는 좌표를 설정할 수 없었다.
이렇게 근본적인 대처가 불가능한, 해결 방법이 없는 스킬은 처음이었다.
이에 마강진은 그저 다음 공격이 자신을 향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를 악물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다음 실루엣이 올라오려는 순간.
마강진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아직 사용하지 않은 방법이 하나 남아 있었다.
마강진이 [공간 왜곡]으로 계단 같은 발판을 만들며 소리쳤다.
“공중! 다들 공중으로 도망쳐라!!”
땅 아래나 마법진 바깥으로는 [공간 왜곡]이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공중으로는 스킬이 제대로 작동했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마강진은 땅을 박차고 높이 뛰어올라 [공간 왜곡]으로 만든 발판을 밟고 섰지만.
“사, 살려 줘…!”
“으아아아아악!!”
쩌억-! 콰직-!!
도약할 수 있는 높이가 얼마 되지 않는 루미나스 헌터들은 암흑 괴물의 밥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녀석이 솟구친 순간, 마강진은 목도했다.
[심연의 공허충(???)]
고래보다 더욱 큰 아가리와 지금껏 본 적 없는 등급의 인식표를.
“미친! 저게 뭐야…!”
“물음표라니! 설마 SSS급보다 더 강한 건가…!”
괴물의 정체를 확인한 건 마강진만이 아니었다.
마법진 바깥의 공무원 헌터들도 인식표를 보고 경악했다.
몬스터의 인식표엔 반드시 등급이 표시되는데, 검은 땅에서 솟아난 녀석은 물음표로 등급을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단서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힘으로만 봤을 때, 소문으로만 존재하는 SSS급보다 상위등급일 확률이 높았다.
“말도 안 되는….”
혹시 헛것을 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마강진은 작금의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부정한다고 현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루미나스 헌터들을 모조리 집어삼킨 괴물이 검은 물처럼 변한 땅에서 빙글 돌며 다시 한번 솟구칠 준비를 했다.
“모든 걸 쏟아부어 주지.”
이판사판이었다.
마법진 바깥으로는 포탈이 열리지 않아 도망칠 수도 없었다.
남은 방법은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뿐.
마강진은 강화 물약을 입에 털어 넣은 뒤,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려 구체 모양의 [공간 파동]을 압축시켰다.
그리고.
“하아아아앗…!!”
그워어어어어어-!
입을 쩍 벌린 채 솟구쳐 오르는 심연의 공허충을 향해 있는 힘껏 내리꽂았다.
남은 마나와 힘을 모두 짜낸 비기.
상대가 처음 보는 등급이라 데미지가 얼마나 들어갈지는 몰라도 최소한의 타격은 있을 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건 마강진의 착각이었다.
우우웅-!
압축시킨 [공간 파동]을 던진 순간, 공허충의 입에서 웬 보라색 광선이 쏟아져 나오더니.
콰아아아아아아-!!
마강진의 비기를 파괴하며 하늘로 솟구친 것이다.
“뭐 이딴…!”
그야말로 막강한 파괴력이었다.
마강진이 급하게 [공간 왜곡]으로 방패를 만들었지만, 의미 없는 짓이었다.
화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악…!!”
공허충의 거대한 브레스가 급조한 방패를 뚫고 그대로 마강진을 삼켜버렸다.
그 뒤로.
“…….”
전장엔 적막만이 맴돌았다.
땅이 검게 변하고 5분 정도 지났을까.
겨우 라면 하나 끓일 시간에 루미나스 헌터 수백 명과 비공식 SS급인 지부장 마강진 이 허무하게 죽었다.
전쟁이 끝났다는 안도감과 승리의 기쁨보다는, 압도적인 힘이 가져다주는 공포에 이은하와 공무원 헌터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몇몇 공무원 헌터들은 전투를 준비하듯 무기를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 정체불명의 몬스터와 싸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
[캐릭터 : 매직킹이 금제 개방을 해제합니다.]
[유폐된 차원이 봉인됩니다.]
심연의 공허충이 마강진을 처치하고 땅으로 들어간 직후, 매직킹이 스킬을 해제하며 마법진을 지워버렸다.
헌터청 주차장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 뒤로.
“짜잔! 이상, 사람이 사라지는 마술이었습니다.”
매직킹이 한상우와 이은하 그리고 공무원 헌터들에게 안심하라는 듯 마술사처럼 한 발을 뒤로 빼고 팔로 가슴을 가리면서 허리 숙여 인사했다.
다만 효과는 크지 않았다.
매직킹이 익살스럽게 행동해도 막강한 힘이 각인시킨 공포는 가실 줄을 몰랐다.
단 한 사람, 한상우를 제외하고.
‘수고했다, 매직킹. 첫 등장부터 금제 개방을 쓰다니 의외였어.’
-어쩔 수 없죠. 저 정도 되는 놈들을 한 번에 정리하려면 강한 마법을 써야 하는데, 최상급 원소 마법을 썼다간 로드의 마나가 바닥나는 건 물론이고 이 일대가 통째로 날아가 버릴 테니까요.
[금제 개방].
하이어에서 마법사가 900레벨에 얻는 필살기 중 하나로, 보유 마나의 절반을 소모해 고대 마법사가 봉인한 다른 차원의 괴물을 잠깐 불러오는 스킬이다.
파괴력은 뛰어나지만 피아 구분이 불가능하고, 적을 마법진 안에 가둬야 한다는 제약이 있어 매직킹이 선호하는 스킬은 아니었다. 하지만 주변 상황을 고려해 사용한 듯했다.
단순히 적을 처치하는 걸 넘어서 근처 환경까지 신경 쓰는 세밀함.
물론, 공무원 헌터들은 이 사실을 모르기에 매직킹에게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 한상우 헌터님, 저분은 대체….”
이은하도 거리를 두고 한상우의 옆에서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매직킹을 바라보는 눈빛에 담긴 수많은 두려움.
한상우는 공무원 헌터들에게 매직킹의 센스와 배려심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고생 많았다, 매직킹. 마나가 바닥이라 여기까지 해야겠어.’
-예, 다음에 또 이 멋진 세계에 불러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로드.
[캐릭터 : 매직킹의 소환을 해제합니다.]
우선 마나가 부족해 [캐릭터 소환]을 계속해서 유지하기도 힘들었고.
“쿨럭, 쿨럭…!!”
[금제 개방]이 이루어졌던 바닥 끝자락에 마강진이 널브러진 채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망할, 마법사… 자식…! 가만두지, 않겠다…!”
‘그 공간 스킬을 사용한 건가?’
공허충의 브레스는 제대로 맞으면 마강진이라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만한 일격이었다. 하지만 공간을 다루는 마강진의 스킬을 생각하면 살아남은 방법은 예상이 됐다.
아무래도 공허충의 브레스에 맞은 순간, 마강진은 [간이 포탈]을 생성해 아래로 내려온 듯싶었다.
일시적으로 차원이 나누어져 마법진 바깥으로는 포탈이 생성되지 않으니 급하게 도박 수로 시도한 것이다.
다만 목숨만 건졌을 뿐, 마강진의 상태는 온전치 않았다.
몸은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졌고, 복부에 뚫린 구멍에서는 피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크…윽! 꿀꺽!”
마강진은 고통을 참으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강화 포션을 꺼내 입안에 쏟아부었다.
루미나스가 중요한 순간에 어김없이 마시던, 예의 그 포션이었다.
“안 돼! 어떻게든 막아!”
“닥쳐!!”
이은하는 불길한 낌새를 느끼고 소리쳤지만, 순간 마강진의 손짓과 함께 공간이 뒤흔들렸다.
강화 포션을 들이키자마자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고, 스킬의 위력도 좀 전보다 강해졌다.
“허억, 허억…! 네놈들은 모두, 여기서 끝이다…!”
물론 그걸 가만히 지켜볼 한상우가 아니었다.
마강진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일어나 손을 든 순간.
[캐릭터 소환 : 땡길거야]
[캐릭터 소환 : 다크어둠]
[캐릭터 : 땡길거야가 끌어오기를 사용합니다.]
[캐릭터 : 다크어둠이 쾌속 이동을 사용합니다.]
[캐릭터 소환을 해제합니다.]
순간 소환으로 두 캐릭터를 동시에 활용했다.
마나가 바닥이라 소환을 오래 유지할 수 없으니 순간 소환을 사용한 것이다.
효과는 탁월했다.
“크헉…!”
땡길거야의 오러 사슬이 마강진을 끌어오자 다크어둠이 녀석의 등과 오금, 그리고 아킬레스건을 그었다.
어느덧 한상우 앞에 무릎을 꿇게 된 마강진.
그가 한상우를 올려다보며 말문을 열었다.
“네놈은… 어떻게 이렇게 강해진 거지?”
뒷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상우는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보 헌터였다.
아니, 초보 헌터가 무엇인가.
길게 갈 것도 없이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던전 보초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은 루미나스 헌터들만이 아니라 자신마저 압도하고 있었다.
대헌터시대 초기부터 무를 숭상하며 정진해온 마강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
죽음이 목전에 다가왔지만 궁금한 것은 오직 그뿐이었다.
한상우가 화산검을 들며 말했다.
“노력.”
대답해줄 의무는 없었지만, 굳이 숨길 만한 이유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력? 네놈은 끝까지 나를 기만하는구나…!!”
마강진은 한상우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뭔가 특별한 비결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진부한 대답이 돌아오자 자신을 조롱하는 거라 여긴 것이다.
비록 부상이 심각하고 오금이 끊겨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없었지만, 마강진은 무릎을 꿇은 채 건틀릿을 내질렀다.
동시에 한상우도 허리를 비틀며 화산검을 휘둘렀다.
둘 다 마나가 바닥이 나서 스킬이 실리지는 않았다.
허공에서 교차하는 두 무기.
시작은 마강진이 빨랐다. 그러나 속도는 한상우가 한 수 위였다.
마치 두 사람이 마주한 현실처럼.
건틀릿이 한상우에게 닿기 전, 화산검이 먼저 마강진을 베었다.
서걱-! 촤아아악-!!
허공에 흩날리는 핏줄기.
마강진의 신형이 힘없이 허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