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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키운 캐릭터로 레벨업-87화 (87/169)

제87화

9장 화려한 축제(12)

털썩-!

전장에 울려 퍼지는 둔탁한 소리.

헌터청을 습격한 루미나스의 수장이 마침내 쓰러졌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장면.

그래서일까.

“…….”

전장엔 적막이 내려앉았다.

이은하와 공무원 헌터들 모두 화산검을 늘어뜨린 채 서 있는 한상우를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봤다.

그만큼 마강진과 루미나스 헌터들을 처치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는데, 의아하게 여기는 건 뒤이어 도착한 인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무기를 버리고 무릎 꿇도록!”

“얍삽한 루미나스 놈들, 감히 연막작전을 펼치고 헌터청을 습격해?”

“개자식들, 다 죽었어…가 아니라 뭐야? 다 어디 갔어?”

최대천과 강철만, 그리고 지소영이 뒤늦게 헌터청에 도착해 쑥대밭이 된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루미나스 헌터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헌터청 주차장에 이은하와 공무원 헌터들이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세 사람은 재빠르게 이동했다.

그리고 저 멀리, 한상우와 바닥에 널브러진 신형을 발견했다.

격렬할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정적인 분위기.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상황인가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세 사람이 다가오자 이은하가 고개를 돌리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청장님, 오셨습니까. 강철만 헌터님과 지소영 헌터님도 오셨네요.”

“이은하 팀장, 어떻게 된 건지 얘기해 주겠나? 루미나스가 침공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우선 지하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방시현이 탈출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지부장 마강진을 비롯한 루미나스 헌터들과 전투를 벌이게 됐는데… 전부 제거했습니다.”

“전부 제거했다고요?”

“대체 누가…?”

이은하의 보고에 강철만과 지소영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자신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

하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의문에 답하기라도 하듯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오직 한 곳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세 사람의 시선이 다시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한상우를 향했다.

먼저 발걸음을 뗀 건 최대천이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최대천이 한상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진 신형을 보며 말했다.

“마강진…이군요. 괜찮으십니까? 혼자 상대하기는 힘드셨을 텐데요.”

지명수배가 내려졌을 뿐만 아니라, 직접 마주친 적도 몇 번 있는 인물이었기에 최대천은 단번에 알아봤다.

비공식 SS급인 것은 물론이고, 공간을 다루는 능력도 까다로워서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는데 처치까지 하다니.

이건 최대천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어떤 SS급 헌터도 해내지 못한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한 것일까.

“…….”

최대천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 궁금증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지만 한상우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마강진의 시신만 바라볼 따름이었다.

아무래도 이걸 해소하기에 앞서 주변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최대천이 공무원 헌터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공무원 헌터들은 전장을 정리하도록! 사상자는 병원으로 이송하고, 루미나스 놈들이 다시 습격할 가능성이 있으니 장비를 점검하라. 그리고 이은하 헌터.”

“예, 청장님.”

“팀을 꾸려서 지하 감옥을 확인해주게. 정황상 수감자들은 모두 사살됐을 가능성이 높지만, 생존자가 있을 경우 병원으로 이송하거나 특별관 지상층에 수감하도록.”

“알겠습니다, 바로 이행하겠습니다. 모두 청장님 말씀 들으셨죠? 팀 재편성 후에 임무 수행하겠습니다!”

최대천의 명령에 이은하 헌터가 공무원 헌터들을 통솔했다.

팀을 재편성하여 임무를 나누어 전장에 널브러진 사상자를 수습하는 한편, 장비를 점검해 지하 감옥으로 진입한 것이다.

최대천의 목적은 분명했다.

사태를 빠르게 수습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듣는 귀를 최대한 줄이기 위함이었다.

이건 강철만과 지소영도 피할 수 없었다.

최대천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있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두 분, 길드원들을 통솔해 던전 브레이크 현장을 정리해 주시겠습니까?”

“던전 브레이크 현장 정리요?”

“뭐, 어렵지 않습니다. 길드원들이 지금 이쪽으로 모이고 있을 텐데 비서에게 얘기해서 지시를….”

“직접 움직여 주셨으면 합니다. 아직 비상 상황이 해제되지 않은 만큼 작전권은 헌터청에게 있다는 거 알고 계시지요?”

한상우와 대화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달라.

최대천은 그렇게 에둘러 말하고 있었다.

강철만과 지소영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평소였다면 말을 듣지 않거나 고집을 부릴 수도 있었지만, 최대천이 이 정도로 진지하게 말하는 이상 따라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자신들이 SS급 헌터고, 돈이 더 많다고 해도 나라에서 부여한 절대적인 권한은 헌터청장인 최대천에게 있으니까.

“그러죠. 나중에 뵙겠습니다, 한상우 헌터.”

“이번에도 갑작스러운 일이었는데, 정말로 고생 많았어요. 따로 연락드릴게요.”

두 사람은 땅을 박차 빠르게 헌터청에서 벗어났다.

어느덧 한상우와 최대천, 둘만 남게 됐다.

먼저 말문을 연 건 한상우였다.

“엄청나군요. SS급 헌터들도 통솔할 수 있는 권력이라니.”

“루미나스의 지부장을 처치한 한상우 헌터님만큼 대단하진 않습니다. 듣는 귀가 사라졌으니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지요. 어떻게 처치하신 건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취조인가요?”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겁니다. 서울 전역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터지고, 헌터청이 습격당했습니다. 지하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죄수도 탈출했고요. 헌터청은 이번 사태를 면밀히 파악하고, 국민에게 설명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공이 있는 자에겐 상을, 과가 있는 자에겐 벌을 내려야 하지요. 특히 루미나스를 격퇴하는 데 직접적인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가장 많은 상이 돌아갈 것입니다. 그걸 위한 확인 과정이라고 봐 주시면 되는데…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듣는 귀는 멀리 보냈지만 보는 눈은 아직 다 치우지 못했거든요.”

최대천의 시선이 근처 빌딩의 옥상을 향하자 카메라 렌즈에 반사된 빛이 일순간 반짝였다.

주변이 쑥대밭이 되고, 대피령이 내려졌음에도 도망가지 않고 꿋꿋이 촬영하는 기자들이었다.

그들의 존재는 한상우도 일찌감치 눈치채고 있었다.

한상우가 마침내 몸을 돌려 최대천을 쳐다보며 말했다.

“만약 그 공을 세운 이가 상을 거부한다면요?”

“지금껏 그런 경우는 없었지만 끝내 거부한다면 다른 이가 차지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엔 도리어 처벌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헌터청에 사실대로 자신의 능력을 얘기하지 않는 건 헌터 특별법상 불법이니까요.”

최대천은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썼다. 한상우의 공로는 최대한 인정하면서 헌터청장이라는 직위와 헌터 특별법을 이용해 불이익을 예고하며 협조를 이끌어내려 한 것이다.

그런데.

“그럼 처벌하시죠.”

한상우에겐 전혀 통하지 않았다.

“예…?”

“저는 이번 사태를 해결하고 헌터청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헌터청이 저를 배려해주지 않는 듯하니, 저희 관계도 여기까지인 것 같군요. 한국에서 헌터 활동이 불가능하면 헌터증 발급이 필요 없는 해외로 나가도 되는 것이고요.”

최대천이 채찍을 들었지만, 한상우는 그걸 완전히 잘라버렸다.

실제로 해외로 나갈 생각은 없었지만, 언제든 갈 수 있다는 듯 엄포를 놓아서 최대천의 수작을 정면으로 들이박은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주도권.

[캐릭터 소환]의 능력을 공개하는 건 각오한 일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끌려다니고 싶진 않았다.

마강진을 처치한 후에 먼저 입을 열지 않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이은하나 공무원 헌터 중에 [캐릭터 소환]을 눈치챈 이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순 없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입으로 비밀을 밝히는 건 스스로의 가치를 깎아 먹는 짓이기 때문이다.

능력이 드러날 땐 드러나도 가치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부자가 자신의 재산을 떠벌리지 않듯 한상우도 소유한 능력을 제 입으로 얘기하는 것은 피했는데, 이러한 태도에 최대천은.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처세술도 보통이 아니로군.’

감탄했다.

대부분, 갑작스럽게 강한 힘을 얻은 헌터는 자신의 힘을 과신하고 으스대기 마련이다. 그리고 최대천은 그런 헌터들을 다루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상우는 그와 정반대였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강하지만 겸손하고, 비밀스러우나 음침하지 않았다. 오히려 위기가 생기면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괜히 욕심을 부리다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꼴이 될 수도 있다.’

한상우는 지금 상황만 보더라도 헌터청에 큰 도움을 주고 있는데, 여기서 계속해서 채찍을 들었다간 모든 게 끝날 수도 있었다.

결국 최대천은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제가 헌터청을 구해주신 영웅에게 큰 결례를 범한 것 같군요. 어떤 걸 원하십니까?”

“이번 일에서 제가 드러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제 친구들도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그에 관한 정보도 요구하지 않았으면 좋겠고요. 제가 원하는 건 그것뿐입니다.”

“알겠습니다. 깊이 파고들지 않도록 하죠. 앞서 말씀드렸듯 헌터청에 보고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지만, 특별한 경우엔 허용되니까요. 다만 아무리 예외를 두더라도 한상우 헌터님의 등급 재측정은 피하기 힘들 것 같은데 이 부분은 괜찮으시겠습니까?”

“그건 상관없습니다.”

한상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걸 덮을 수는 없었다.

마강진과 루미나스를 상대하는 걸 이은하와 공무원 헌터들이 목격한 이상, 의문 해소를 위한 최소한의 실마리는 줘야 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궁금증이 어느 순간 불신으로 바뀔 테니까.

한상우의 선택에 최대천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행이군요. 좋습니다, 한상우 헌터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요. 그리고 상은 지금 바로 드리겠습니다.”

곧바로 움직였다.

* * *

“하 기자, 다 찍었지…?”

“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찍었습니다…. 그런데 이거 꿈 아니죠? 현실 맞죠?”

헌터청 근처의 빌딩 옥상.

박대성 차장의 물음에 하일건 기자가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조금 전, 갑작스럽게 들려온 폭음에 박 차장과 하 기자는 대피 대신 취재를 선택했다.

그리고.

루미나스 헌터들이 헌터청을 습격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쾅-! 쾅-! 콰과과과광-!!

곳곳에서 튀는 폭발과 파편들.

근접 촬영은 불가능했다.

두 사람은 근처 빌딩 옥상으로 올라가 촬영을 시작했다.

사실상 목숨을 내놓고 한 일이었는데 그 덕분에 찍은 영상은 어마어마했다.

루미나스 헌터와 공무원 헌터들이 격돌하는 장면을 전부 찍게 된 것이다.

특히 등급을 가늠하기도 힘들 정도로 강력한 헌터들이 맞부딪치는 장면은 카메라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격렬했다.

결국, 헌터 한명 한명을 찍기보다는 헌터청 전체를 찍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고위 헌터들의 움직임과 스킬이 워낙 강력하고 화려하다 보니 화면을 넓게 잡아도 모두 잡힌 것이다.

그야말로 특종.

앞으로 최소 한 달은 우려먹을 수 있는 기삿거리였다.

박 차장이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그래, 꿈 아니고 완전 대박이야! 젠장, 생중계로 방송했으면 더 나았을 텐데 인터넷은 왜 안 터진 거야?”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영상이라도 찍어서 다행이에요. 인터넷도 이제 되는 것 같은데요? 속보로 바로 업로드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빨리 올려! 이거 보면 다들 뒤집힐 거다. 나는 콘텐츠본부에 연락할게.”

박 차장과 하 기자는 각자 폰을 들고 촬영한 영상을 전송하려 했다.

조금 전까진 이상하게 폰이 먹통이라 통신과 인터넷이 모두 되지 않았는데, 이제 모두 복구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촬영한 영상과 사진을 인터넷에 올리려던 그 순간.

쉬이이익-! 탁-!!

“엥…?”

돌풍이 불더니 뭔가가 두 사람의 폰을 낚아챘다.

박 차장과 하 기자는 금세 사태를 파악했다.

“헉! 저 사람은…!”

“최, 최대천 청장…!”

조금 전까지 헌터청에 있던 최대천이 단숨에 빌딩 위로 도약해 두 사람의 폰을 빼앗은 것이다.

최대천은 압수한 폰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세상일 참 알 수 없군. 루미나스가 통신을 차단한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적의 공격이 도움이 되는,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반발이 뒤따라오긴 했다.

“뭐, 뭡니까! 남의 핸드폰을 왜 뺏는 겁니까! 헌터청장이라고 남의 사유 재산을 멋대로 가져가도 되는 겁니까!”

“이거 언론 통제입니다! 정식으로 제소하겠습니다!”

박 차장과 하 기자가 격한 어조로 항의했다.

그러자.

최대천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네. 헌터청장에겐 기밀로 분류되는 사안의 보안을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거든. 촬영 장비 압수에 따른 보상은 헌터청에 청구하게.”

“기밀? 그런 게 어딨습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촬영했지만 그런 건 없었습니다!”

최대천의 설명에 박 차장이 조목조목 반박했다.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뭘 모르는군. 자네들이 촬영한 영상 속의 헌터는 이제부터….”

최대천이 기자들을 쳐다보며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국가 기밀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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