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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키운 캐릭터로 레벨업-91화 (91/169)

제91화

10장 일취월장(4)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채굴장.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나는 흑갑의 기사를 노려봤다.

머리 위에 인식표는 없었다.

그러나 녀석은 자신을 적이라고 소개하듯 선제 공격을 날렸다.

어떻게 해야 할까.

쉽게 해결할 방법은 있었다.

척살 명령.

다크어둠에게 명령만 내리면 흑갑 기사는 즉시 절명할 것이다.

멀리서 날린 오러가 강력하긴 했으나, 다크어둠의 실력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니까.

그저 제거하라는 명령이면 사태는 종료될 터였다.

그러나.

무턱대고 죽일 수만은 없었다.

우선 이 던전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기도 해야 하거니와.

“아, 아빠…! 안 돼요!”

다크어둠에게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하센이 흑갑의 기사를 향해 달려갔기 때문이다.

아빠라니.

전개가 갑작스러워 다소 황당하긴 했지만, 그래도 일이 터지기 전에 알게 돼서 다행이었다. 싸울 필요도 없었고.

“하센…?”

하센이 앞으로 나오자 흑갑 기사도 천천히 대검을 늘어뜨리며 경계를 풀더니 이내 투구까지 벗었다.

그러자 하센과 똑같은 갈색 머리칼과 얼굴이 드러났다.

“아빠…!”

“아들아!”

하센이 비탈길을 뛰어 내려가자 흑갑 기사도 앞으로 달려 나오더니 무릎을 꿇고 아들을 꽉 껴안았다.

“하센! 여긴 어떻게 온 게냐! 위험한데 성에 있지 않고…!”

“흑흑, 돌아오지 못하실 거라는 소문을 듣고 왔어요. 중간에 죽을 뻔했는데 저기 계신 용병님들께서 구해 주셨고요.”

“용병….”

흑갑 기사는 하센의 말을 나직이 되뇌더니 고개를 들어 우리를 바라봤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더니 고개 숙여 인사하며 말문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전장에 홀로 남다 보니 정신이 나가 은인을 공격했군요. 제 이름은 카셀 랑데르크. 랑데르크 공국을 이끄는 공작입니다.”

랑데크르 공작.

흑갑 기사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이 나라의 통치자였다.

그 말에.

“우와! 너 귀족이었어?”

“으, 응. 칭찬받을 건진 모르겠지만 고마워.”

제장이는 폴짝 뛰며 감탄했고.

-둘 다 죽일까요, 마스터?

다크어둠은 앙금이 풀리지 않았는지 부자를 노려보며 단검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손을 들어 다크어둠을 제지한 후, 카셀을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른 병력은 어디 있죠? 혼자서 싸우셨다기에는 규모가 꽤 큰 것 같은데요.”

“모두 전사했습니다. 며칠 전부터 이곳은 저 혼자 지키고 있었고요.”

“혼자요…?”

카셀의 말에 나는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봤다.

수천 구는 족히 넘을 법한 시체들.

그 규모만으로도 얼마나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는지가 느껴졌다.

“확실히 주변에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마스터.”

다크어둠도 주위를 살펴보며 더 이상 생존자가 없음을 확인해주었다.

나는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열기가 남아 김이 피어오르는 몬스터의 시체들을 보며 말했다.

“대단하시군요. 이 정도 싸움을 겪고도 지금까지 버티시다니….”

“죽을 각오로 싸워 기적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기적도 여기까지인 것 같군요.”

쿠구구구궁- 파지지직-!!

카셀의 발언 뒤로, 갑자기 저 멀리 채굴장 끝에서 수많은 포탈이 생성됐다.

얼핏 봐도 수십 개는 넘어 보이는 개수.

그 안에서 나온 몬스터의 수는 더욱 많았다.

“크롸아아…!!”

[정예 용족 군단의 병사(S)]

[정예 용족 군단의 기사(S)]

[정예 용족 군단의 궁수(S)]

2천? 3천?

조금 전, 갱도에서 봤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아, 아빠, 저기 포탈이…! 같이 도망가요!”

하센이 카셀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도주를 재촉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단다.”

카셀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투구를 쓰고는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희 아들을 데리고 탈출해 주시겠습니까? 저 녀석들은 제가 막고 있겠습니다.”

죽음을 결심한 듯, 단호한 목소리.

나는 카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후퇴하지 않으시고요?”

“수많은 기사가 왜 여기를 무덤으로 삼았는지 아십니까? 이곳, 발데하르 광산이 뚫리면 저희 공국은 끝이기 때문입니다. 지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카셀의 말이 맞았다.

하이어의 정세와 지도를 떠올려 보면, 랑데르크 공국의 중심은 발데하르 광산이라 봐도 무방했다.

이곳이 뚫리면 공국은 경제적으로 무너지는 건 당연하고, 마땅히 방어선을 구축할 요새도 없었다.

사실 이 채굴장도 방어하기 좋은 구조는 아니다. 아마 이 앞에 있는 성에서 싸우다가 여기까지 밀렸을 것이다.

이제 남은 병력은 공작 하나뿐.

사실상 랑데르크 공국은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

“용병님! 저희 아버지 좀 살려주세요! 제가 가진 모든 걸 다 드릴게요! 용병님이라면 가능하시잖아요! 제발, 부탁드려요…!”

카셀의 아들, 하센도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할 정도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도망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나.

마냥 물러설 수만은 없었다.

하센이 부탁하고, 카셀이 다시 대검을 쥔 순간.

[두 번째 선택의 길이 열렸습니다.]

[1. 카셀 랑데르크를 도와 용족 군단을 처치한다.]

[보상 미리보기 : 추후 선택에 따라 달라집니다.]

[2. 왔던 길을 되돌아가 포탈을 통해 던전을 나간다.]

[보상 미리보기 : 획득할 수 있는 보상이 없습니다.]

두 번째 선택지가 나타났다.

양상은 아까와 같았다.

카셀을 도와 용족 몬스터들을 처치하면 추후 보상을 얻을 수 있고, 그게 아니라면 왔던 길을 되돌아가 탈출해야 했다.

후자의 경우, 보상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말만 선택지지 내 기준에서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화산검과 화산방패를 든 채 앞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

“그래, 도와줄게. 대신 보수는 봐주지 않고 청구할 테니 그렇게 알고 있어.”

“헉! 정말이신가요?”

“우와, 역시 우리 군주님 멋지십니다! 위기에 빠진 약자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시는군요!”

참전을 결정하자 하센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고, 제장이는 낯부끄러운 칭찬을 했다.

사실 측은지심이 아니라 순전히 보상 때문에 결정한 일이었지만, 어느 정도는 인정받을 만했다.

보상을 떠나 이 정도로 수적 열세인 전투에 가담한다는 건 목숨을 내놓겠다는 소리와 다름없으니까.

이건 카셀도 인지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승산이 낮다는 거… 알고 계실 텐데요. 그냥 제 아들을 데리고 도망치시는 게 더 나은….”

“괜찮습니다. 승산을 결정 짓는 건 몇 명이 싸우느냐가 아니라, 누가 싸우느냐이니까요.”

“크르르!”

“프타하…!!”

점점 많아지는 용족 몬스터의 수.

심지어 선두에 있는 녀석들은 우리를 발견하고 포효하며 돌격 자세를 취했다.

이전에 당한 게 있는 듯 병력을 응집시켜 힘을 모으는 모양새였는데,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저놈들 다 죽여, 다크어둠.’

-예, 마스터.

수적으로 열세라고 마냥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나는 용족 군단을 바라보며 명령을 내렸고, 다크어둠은 쌍단검을 휙휙 돌리며 하센과 카셀을 지나 적진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우려 섞인 반응이 돌아왔다.

“자, 잠깐…!”

카셀이 손을 뻗어 다크어둠을 만류하려 한 것이다.

나는 카셀 옆에 선 뒤, 말리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한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괜찮아요. 그냥 지켜보시면 됩니다.”

“저분 혼자서 저 숫자를 상대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생명을 빼앗는 건….”

나는 어느새 용족 군단 사이로 파고든 다크어둠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저 친구 전문 분야니까요.”

* * *

후루룩-!

“열쇠 조각이 다 모였네.”

루미나스 한국 지부의 본진인 성북동 대저택 지하.

기다란 테이블 앞에 앉은 청년이 홀로 라면을 먹다가 툭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열쇠가 다 모였다고요? 정말인가요?”

“응. 기운이 느껴져.”

청년 뒤에 서서 폰을 만지작거리던 여인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재차 물었다.

“병력을 소집해서 빼앗을 준비를 할까요?”

“소집할 병력은 있고? 아니, 소집한다고 해도 통솔할 지휘관이 없잖아. 지부장부터 부지부장, 주요 간부들까지 다 뒈졌는데 어떻게 뺏겠다는 거야? 거의 궤멸 직전인데 너 혼자 할래?”

“그, 그건….”

청년의 말에 여인, 비서 윤채연은 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의 말마따나 지금 루미나스 한국 지부는 궤멸 직전이라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전력 대부분이 소실됐기 때문이다.

지부장 마강진을 비롯해 부지부장, 제1 진행팀장과 지원팀장이 목숨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단원 천여 명도 전사했다.

헌터청 점령 작전에서 마강진이 소환 스킬을 사용해 집결시킨 전국의 루미나스 헌터들이 전투 과정에서 모두 죽은 것이다.

오합지졸도 아니고, 한명 한명이 최소 B급 이상의 무력을 가진 실력자들이었는데 단 한 번의 전투로 전멸하다니.

윤채연을 비롯한 다른 루미나스 헌터들은 소식을 듣고 최소한 간부급 몇 명은 생존했을 거라 생각했지만, 사건이 발생한 지 며칠이 지나도록 생존자 소식은 없었다.

마강진의 명령에 따라 방시현을 성북동 대저택으로 옮겨 화를 피하긴 했지만, 홀로 남게 된 이 상황은 그녀에게 고통만 안겨줄 뿐이었다.

윤채연은 밀려오는 두통에 이마를 짚으며 말문을 열었다.

“특별감찰관이신 방시현 님께서 이끌어 주시면 충분히 승산이….”

식탁 앞에 앉은 청년, 방시현.

루미나스 본부에서 파견한 특별감찰관인 그는 대외적으로는 S급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건 거짓이다.

힘을 잃고 봉인당하긴 했지만, 지금만 해도 방시현은 SS급 수준의 힘을 가지고 있다.

시간이 좀 걸릴 테지만 만약 기운을 회복해 봉인을 풀고, 잠재력도 극한까지 끌어올린다면?

SSS급, 아니 그 이상의 경지에 도달할 뿐만 아니라 마강진이 추진하던 대업도 완성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응, 난 안 해. 귀찮아.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힘을 충전해야 하기도 하고.”

후루룩-!

방시현은 비서 윤채연의 의견을 단칼에 거절하고 라면을 먹을 뿐이었다.

“캬! 맛있다, 맛있어. 밖에 있을 땐 거들떠도 안 봤던 것들인데 독방에 묶여 있을 때 이게 얼마나 먹고 싶던지.”

방시현은 젓가락을 놓고, 어느덧 빵빵해진 배를 만지며 테이블을 쳐다봤다.

식탁 위엔 라면뿐만이 아니라 피자부터 시작해 치킨, 족발, 보쌈 등 배달로 시킬 수 있는 수많은 음식이 깔려 있었다.

10인분을 넘어 20인분은 족히 될 법한 양.

그러나 그걸 몽땅 먹어 치웠음에도 방시현은 부족하다는 듯 입맛을 다시더니 고개를 돌려 윤채연의 목덜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맛있어도 인간의 피는 따라올 수 없단 말이지.”

“아, 안 됩니다, 방시현 님. 제발 자비를….”

나직이 얘기했을 뿐이건만 윤채연의 얼굴은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방시현은 그녀의 반응에 흥이 식었다는 듯 피식 웃더니 다시 식탁 위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됐어. 아무리 급해도 오염된 피를 먹을 생각은 없으니까. 지금 열쇠를 모두 모은 녀석의 피라면 모를까….”

“하, 한상우! 아마 녀석이 열쇠를 모두 모았을 겁니다. 첫 번째 열쇠를 어디서 찾았는지는 몰라도 나머지 열쇠는 녀석이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녀석의 행방을 추적해 볼까요?”

목숨이 위태롭다고 판단한 것일까.

윤채연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목표를 제시했다. 그러나 조금 전과 다르게 방시현은 시큰둥할 따름이었다.

“아니, 녀석의 피는 못 먹어. 그놈은 이제 이 세상에서 볼 수 없을 테니까.”

“아…. 열쇠에서 파생되는 던전을 클리어하지 못할 거라는 말씀이시군요. 하지만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인정하긴 싫지만, 녀석은 지부장님과 대적했을 정도의 실력자입니다. 다른 조력자가 함께 들어갔을 수도 있고요.”

단순히 방시현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윤채연은 진심으로 한상우를 높게 평가했다.

비밀리에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한상우는 B급밖에 되지 않지만, 루미나스의 간부들을 처치하는 일의 주역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온전히 혼자서 한 일은 아니고 강철만과 정체불명의 헌터들에게 도움을 받긴 했지만, 열쇠 던전 역시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충분히 클리어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한상우의 활약을 직접 본 적이 없어서일까?

“불가능해.”

방시현은 단호하게 얘기했다.

“녀석이 어떤 놈이든, 동료들이 얼마나 강하든…. 그 문을 연 자는 지옥을 맛보게 될 수밖에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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