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10장 일취월장(5)
놀람, 당혹, 감탄, 경악.
행운이든 불행이든 사람은 예상치 못했던 일을 맞닥뜨리면 위와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대부분 공통으로 보이는 신체적 반응이 있는데, 바로 동공이 커지면서 할 말을 잃는 것이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카셀과 하센처럼.
“어, 어떻게 저런 힘을…?”
“와….”
전투가 벌어진 직후, 두 사람은 줄곧 같은 표정이었다.
후우웅-! 깡-! 서걱-! 촤아악-!!
“크웨엑…!”
전장에서 파공음이나 금속음이 일 때마다 눈이 커지며 입도 쩍 벌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크어둠이 한 번 시야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질 때마다 용족 몬스터 수십 마리가 단말마와 함께 바닥에 허물어졌으니까.
S급 몬스터를 상대로 펼치는 학살.
확실히 다크어둠의 사냥 속도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메시지 창만 봐도 그랬다.
[캐릭터 : 다크어둠이 그림자 긋기를 사용합니다.]
[캐릭터 : 다크어둠이 정예 용족 군단의 기사(S)를 처치했습니다.]
[캐릭터 : 다크어둠이 정예 용족 군단의 궁수(S)를 처치했습니다.]
[군주의 특성, 독존이 발동합니다.]
[경험치 20배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체력 +1, 마력 +1을 획득합니다.]
다크어둠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처치 메시지가 주르륵 떠오르고, 레벨도 계속해서 상승했다.
나는 마나 포션을 마시며 슬쩍 레벨을 확인해봤다.
[상태창]
[이름 - 한상우]
[레벨 - 221]
용족 군단의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 194였던 레벨이 어느덧 221이 되어 있었다.
S급을 이렇게 잔뜩 사냥한 것은 처음이었는데, 거기에 강화된 독존의 효과까지 겹치니 말 그대로 폭렙이었다.
바뀌어버린 앞자리 수.
늘어난 건 숫자뿐만이 아니었다.
[레벨 200을 돌파했습니다.]
[200레벨 달성의 효과로 무작위로 스킬 중 하나의 스킬 레벨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은빛 암살자의 잠행술의 스킬 레벨이 1에서 2로 상승합니다.]
[패시브 스킬 : 탈취를 획득합니다.]
[패시브 스킬 : Lv 1. 탈취 – 상대를 타격할 시, 3% 확률로 상대방의 보유 마나 2%를 탈취해 흡수합니다.]
레벨 200을 달성하자 축하의 의미인지 [은빛 암살자의 잠행술]의 스킬 레벨이 오르면서 새로운 스킬도 획득했다.
패시브 스킬, [탈취].
하이어에서 암살자의 부족한 마나를 보완해주는 스킬로, 적을 공격하면 일정 확률로 마나를 빼앗아 올 수 있다.
원래는 마나뿐만 아니라 생명력도 탈취할 수 있는데, 아직은 스킬 레벨이 낮아 마나만 흡수할 수 있었다.
이로써.
[Lv 2. 은빛 암살자의 잠행술]
[은신]
[탈취]
[조건 미충족, 잠김]
[조건 미충족, 잠김]
[조건 미충족, 잠김]
폭발적인 레벨업과 더불어 잠겨 있던 잠행술이 추가로 개방됐다.
일취월장이라고 하던가.
단기간에 이룩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성장 속도였는데, 솔직히 아직도 약간 아쉬웠다.
지금도 대단하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다크어둠이 좀 더 빠르게 몬스터들을 처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유는 있었다.
“크타하…!!”
[정예 용족 군단의 기사단장(SS)이 등장했습니다.]
[정예 용족 군단의 기사단장이 용족 몬스터에게 용족의 긍지를 불어넣습니다.]
[용족의 긍지 효과로 용족 몬스터들의 공격력과 방어력이 +20% 상승합니다.]
포탈에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 중, 기사단장이 잡몹들의 공격력과 방어력을 대폭 상승시켰다.
효과만 놓고 보면 기사단장을 최우선으로 처치하는 게 맞았지만 잡몹보다 강하고, 수 역시 한두 마리가 아니라 수십 마리에 달해 버프 제거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군주님! 암살자님의 힘이 조금씩 떨어지는 것 같아요!”
제장이도 하나둘씩 빠져나오는 용족 병사를 처치하며 조금씩 전장이 밀리고 있음을 알려왔다.
“좀 더 마나를 써야겠네.”
레이드가 언제 끝날지 모르기에 마나를 최대한 아끼고 싶었지만, 슬슬 전략을 바꿔야 할 때인 것 같았다.
콰앙-!
나는 [분화]로 다가오는 용족 병사를 날려버린 뒤, 지원군을 투입했다.
[캐릭터 : 땡길거야를 소환합니다.]
[캐릭터 : 땡길거야가 신성 폭발을 사용합니다.]
[캐릭터 : 땡길거야가 동료 보호를 사용합니다.]
“사특한 존재에게 심판의 칼날을…!”
금발의 기사 땡길거야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맹활약했다.
연기를 흩날리며 강림함과 동시에 [신성 폭발]로 용족 몬스터 수십 마리를 폭사시키고, [동료 보호]로 지친 다크어둠에게 보호막을 씌워준 것이다.
이전과 비교해 한결 여유로워진 전투.
다크어둠도 숨을 헐떡거리다가 그제야 말문을 열었다.
“느려터진 깡통 기사 같으니. 비싼 갑옷을 입어서 그런가? 달팽이가 따로 없군.”
“그래도 난 누구처럼 닭고기한테 쩔쩔매진 않지. 시범을 보일 테니 보고 배우도록, 뒷골목의 부랑자여.”
툴툴거리는 다크어둠의 모습에 땡길거야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하더니 검을 들어 주변을 에워싼 용족 몬스터들을 조준했다.
그리고.
파지지직-!
다시 한번 막강한 스킬을 뽐냈다.
먼저 [끌어오기]로 용족 몬스터 수십 마리를 당겨온 다음.
“흐읍…!”
[반월 베기], [만월 가르기], [급소 찌르기]로 이어지는 연계기를 사용해 [월광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쩌어어어엉-!!
“크하악…!!”
달빛을 머금은 듯한 푸른 섬광이 폭발을 일으키며 용족 몬스터 수십 마리를 집어삼켰다.
결과는 압도적이었다.
[캐릭터 : 땡길거야가 정예 용족 군단의 기사(S)를 처치했습니다.]
[…….]
[캐릭터 : 땡길거야가 정예 용족 군단의 궁수(S)를 처치했습니다.]
수를 세기 힘들 정도로 많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시체는 남지도 않았다. 그저 재로 변해 흩날릴 뿐.
돌아오는 반응은 다양했다.
“쯧, 겉멋만 잔뜩 들었군.”
“우와, 수호 기사님 역시 멋져요!”
다크어둠은 혀를 찬 뒤, 다시 전장으로 스며들었고, 제장이는 망치를 든 채 폴짝폴짝 뛰어 감탄했으며.
“저렇게 무지막지한 검술을 구사하는 자가 대체 어디서 이리 갑작스럽게…!”
“아빠, 저 알아요! 저분은 요정 기사님이에요!”
하센은 지금까지 들었던 이야기로 땡길거야의 정체를 유추해 카셀에게 알려주었다.
다만 그 내용이 믿기 어려운 수준이었기에, 카셀은 나를 바라보며 진위를 확인했다.
“저, 정말입니까, 용병님?”
“뭐, 대충 맞다고 해두죠.”
땡길거야가 요정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뭐 어떠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거, 꽤 쉽게 클리어하겠는데? 너무 보수적으로 할 필요도 없었겠어.’
나는 카셀의 말에 대충 대답한 뒤,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뀐 전장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사실 이번 전투는 굉장히 보수적으로 진행했다.
다크어둠만 용족을 상대하고, 나와 제장이는 간간이 전선을 돌파하는 놈들만 처치하며 랑데르크 부자를 지키기로 전략을 짠 것이다.
처음엔 곧바로 땡길거야를 소환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다크어둠이 잘 버텨줬고, 땡길거야까지 소환한 이제는 S급 용족 몬스터 수천 마리를 상대로 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도 마냥 구경만 하며 놀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쉬이이익-! 깡-!!
“맞추지도 못할 거면서 되게 쏴대네.”
용족 몬스터 중 궁수들이 있어 종종 날아오는 화살을 [용암 전개]로 막아내야 했다.
마치 디펜스 게임을 하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적의 수와 카셀 부자의 안전을 생각하면 이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포탈에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 수천 마리는 만렙 캐릭터들이 상대하고, 나와 제장이는 그 둘한테서 벗어난 부스러기들만 처치하는 후방조 같은 개념이었다.
그리고 으레 디펜스 게임들이 그렇듯.
[정예 용족 군단의 기사단장(SS)]
[정예 용족 군단의 기사단장(SS)]
[정예 용족 군단의 기사단장(SS)]
“카륵타…!!”
잡몹들이 쓸리자 중간 보스 몬스터격인 기사단장 10여 마리가 나섰다.
착-! 후우우우웅-!! 촤락-!!
오합지졸인 잡몹들과 다르게 체계를 갖춰 압박을 가한 것이다.
검을 휘두르고 오러를 날려 흩어져 있던 땡길거야와 다크어둠을 한데 모으더니, 주변을 둘러싸 압박의 수위를 높였다.
어느덧 등을 맞대게 된 두 캐릭터.
“망토 좀 치우지? 불쾌하기 그지없다, 깡통 기사.”
“내가 할 말이다, 뒷골목의 부랑배여. 네놈의 더러운 땀이 내 망토에 묻을 것 같군.”
입에선 불만이 쏟아져 나왔지만 둘의 호흡은 그 누구보다 뛰어났다.
“크락타…!”
후우우우웅-!!
땡길거야가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 용족 기사단장들의 검을 한 번에 막아내자.
“지금이다, 암살자.”
“알고 있어, 깡통 기사.”
몸을 웅크리고 있던 다크어둠이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이며 앞으로 치고 나갔다.
방패를 내리치느라 비어버린 하단.
촤아악-!
“크롸악…!”
다크어둠의 쌍단검이 용족 기사단장들의 발목을 베고 지나갔다.
동그랗게 포위한 적들의 발목을 모두 베진 못했다.
기껏해야 절반 정도.
그러나 그걸로도 승기를 잡기엔 충분했다.
“흐읍…!”
“하앗!!”
중심이 무너진 기사단장들은 땡길거야가 [신성 폭발]로 날려버리고, 남은 기사단장들은 우왕좌왕하는 사이 다크어둠이 [그림자 긋기]로 베어 모두 정리해버린 것이다.
콰아아아앙-! 서걱-!!
채굴장에 울려 퍼지는 굉음 뒤로 정예 기사단장들이 쓰러졌다.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잡몹들은 버프 효과를 잃었고, 땡길거야와 다크어둠은 전장을 종횡무진하며 다시금 학살을 시작했다.
그리고 두 캐릭터의 활약에 따라.
[군주의 특성, 독존이 발동합니다.]
[경험치 20배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모든 스탯 +1을 획득합니다.]
내 레벨은 끊임없이 상승해 마나에 대한 부담도 점점 줄어들었다.
‘좋아, 이대로면 250레벨도 금방이겠는데?’
여덟 번째 선행 조건인 250레벨 달성.
처음 조건을 봤을 때만 하더라도 상위 던전 레이드가 막혀 언제 찍나 싶었는데, S급 몬스터들을 잔뜩 사냥한 덕분에 어느덧 달성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것도 직접 움직이지 않고, 캐릭터들에게 지시만 내렸는데 말이다.
그러나 옛말에 자만은 화를 불러온다고 했던가.
쿵-! 콰아아앙-!!
[캐릭터 : 땡길거야가 수호의 방패를 사용합니다.]
[캐릭터 : 다크어둠의 동료 보호가 해제됩니다.]
“크윽…!”
“칫, 무슨…!”
한창 전투를 이어가던 순간, 갑자기 충격파가 일어나더니 땡길거야와 다크어둠이 내가 서 있는 지점까지 밀려났다.
다크어둠에게 걸려 있던 동료 보호가 해제되고, 땡길거야가 [수호의 방패]를 사용할 정도로 강력했던 공격.
누구의 소행인지는 금방 드러났다.
촤아아아악-!
채굴장 한가운데에 생성된 거대한 포탈에서 다른 용족보다 몸집이 세 배는 더 큰 녀석이 걸어 나왔다.
보스 몬스터처럼 보이는 풍채.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교활한 용족 군단장(SSS)]
인식표에 뜬 놈의 등급이 SS급도 아닌 SSS급으로 뜬 것이다.
게다가.
“네놈, 제법 재미있는 능력을 가졌구나.”
녀석은 나를 바라보며 언어를 구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