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10장 일취월장(8)
휘이잉-! 화아아아악-!!
발밑에서 시작된 옅은 돌풍이 채굴장으로 퍼져나갔다.
세차긴 하나 치열한 전투 속에선 티조차 나지 않는 작은 바람.
하지만 효과는 분명히 존재했다.
전신에서 출발한 바람이 용족 군단이 밀집한 전장 끝까지 다다른 순간.
[압도]
[효과 1 : 군주의 위용에 압도당한 적의 전투력과 전투 의지가 35% 감소합니다.]
[효과 2 : 군주의 위용에 탄복한 아군의 전투력과 전투 의지가 10% 상승합니다.]
메시지가 떠오르면서 몬스터와 캐릭터들이 반응했다.
“쿠륵…?!”
“다들 힘내세요! 우린 지상 최강의 군주님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 단검에 마스터의 의지를 더하겠습니다.”
압도를 사용한 순간 용족 몬스터들은 움찔거리며 능력치와 사기가 감소한 반면, 캐릭터들은 고무되는 말과 함께 능력치와 사기가 증가했다.
영향을 받는 건 캐릭터와 몬스터뿐만이 아니었다.
“용족들이여, 다신 랑데르크 공국에 발 디디지 못하게 해주마!”
카셀도 전투의 의지를 다졌다.
이 모든 것은 강화된 압도 덕분이었다.
[특성 4 : 압도 – 군주의 권위를 발산, 주변 적들에게 위압을 걸어 전투력을 감소시킵니다. 위압의 전투력 감소 비율은 적의 수준과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군의 사기와 능력치를 일부 상승시킵니다.]
이전엔 적들의 스탯과 사기를 30%만 감소시켰지만, 지금은 수치가 35%로 늘었을 뿐만 아니라 아군의 능력치와 사기까지 증가시켰다.
유의미하게 달라진 전장의 분위기.
애초에 다크어둠이 용족 몬스터들을 상대로 학살을 벌이고 있긴 했지만, 그 속도가 더욱 가속화됐다.
쾅- 쾅-! 콰과과과광-!!
[캐릭터 : 다크어둠이 암폭을 사용합니다.]
[캐릭터 : 다크어둠이 그림자 긋기를 사용합니다.]
“크라악!!”
“쿠헉…!”
[압도]의 디버프 작용과 제장이와 카셀이라는 지원군의 합류 등으로 용족 군단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다.
그 모습에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일까.
“크윽, 갑자기 어떻게 이런 위압감을…!!”
용족 군단장이 이를 갈며 거대한 창을 내리쳤다.
쩌어엉-!!
오러가 넘실거리며 부딪칠 때마다 땅을 갈라지게 만드는 막대한 충격파가 발생했다.
과연 SSS급 보스 몬스터답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녀석의 창은 내게 닿지 못했으니 공격을 시도할 때마다 땡길거야가 검과 방패로 막아낸 탓이었다.
놈이 어쩌다 빈틈을 파고들어도 [신성 폭발]로 날리거나 [끌어오기]로 창만 잡아끌어서 경로를 바꾸었다.
나도 녀석의 공격에 맞지 않게 계속 거리를 벌리면서 [캐릭터 소환] 유지를 위해 마나 포션을 마셨다.
땡길거야와 함께 군단장을 공격해도 되긴 하지만, 이제 고작 250레벨을 넘긴 내가 SSS급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는 데에는 위험 부담이 있었다.
레벨 차이가 워낙 많이 나는 데다, 녀석이 동귀어진 수준으로 나만 죽이려고 하다 보니 녀석과 싸우지 않고 피하는 게 최선이었다.
물론, 피하고 막기만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 한두 번 막무가내로 돌진할 때만 애를 먹었지, 몇 번 반복돼 패턴을 파악하고 나니 땡길거야와 합을 맞춰 방어하는 게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러자.
“이 성가신 놈들이…! 그냥 전부 으깨주마!!”
계속된 실패에 분개한 듯 용족 군단장이 창을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리더니 땅에다 내리꽂았다.
쩌어어엉-!!
굉음과 함께 움푹 파이는 땅바닥.
순간, 정신이 나가 화풀이를 하는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용족 군단장이 창을 내리찍자.
샤아아악-!
하늘과 땅에서 오러로 형성된 창살 수천 개가 나타났다.
마치 용의 이빨처럼 생긴 형상이었는데, 문제는 그 범위가 너무 넓다는 것이었다.
채굴장을 절반을 뒤덮고 남을 정도로.
“성난 용의 이빨의 맛을 보여주마…!”
용족 군단장은 그렇게 외치더니 땅으로 내리찍었던 창을 빼내 전방으로 내질렀다.
그 뒤로.
촤차차차차착-!!
오러 창살이 비처럼 쏟아지고, 땅에서도 융기하며 광범위한 공격이 이루어졌다.
쿠구구구구궁-!!
등 뒤의 광산이 무너질 정도로 강력하고, 넓은 범위.
피할 곳은 없었다. 오러 창살이 마치 용의 이빨로 변해 나와 땡길거야를 씹어버릴 기세로 다가왔다.
“위, 위험해요, 군주님!!”
제장이의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커다란 용족 군단장의 스킬.
하지만 내가 피해를 입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으니.
“보좌하겠습니다, 주군!”
위에서 내려오는 창살은 땡길거야가 [수호의 방패]로 방어하고, 아래에서 올라오는 창살은 [만월 가르기]를 날려 잘라낸 것이다.
[만월 가르기]
나도 땡길거야를 따라 [만월 가르기]를 날리며 창살을 베는 데 힘을 보탰다.
SSS급 보스 몬스터의 공격인 만큼 큰 타격을 줄 수는 없었으나, 날카로운 끝부분이 예닐곱 개 정도 잘려 나가 안전 구역을 조금 더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자 용족 군단장은 다시 한번 창을 번쩍 들더니 또 다른 스킬을 사용했다.
“이놈들이…! 좋다, 어디 한번 해보자꾸나! 자랑스러운 용족의 전사들에게 용맹 무쌍한 긍지를…!”
파지지직-!!
군단장의 울음소리와 함께 창끝에서 일어난 빛이 수백 갈래로 갈라지더니, 채굴장 끝에 열린 포탈에서 더 많은 용족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크하하핫!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 지켜보마!”
용족 군단장은 광기 어린 웃음을 터트리며 [수호의 방패]를 거대한 창으로 계속해서 내리쳤다.
아무래도 땡길거야의 방어를 뚫기 힘들어 보이니 장기전으로 전략을 선회한 듯싶었는데, 내 입장에서 확실히 위협적인 선택이었다.
[압도]의 효과를 업은 다크어둠이 무서운 속도로 적들을 도륙하고 있기는 했지만, 용족 군단장과 목숨이 연결되어 있는 병사들이 끝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러다간 언젠가 내 마나 포션이 모두 소진될 게 분명했다.
‘공세로 전환한다, 땡길거야. 내 몸은 내가 지킬 테니 방어보다는 녀석의 목숨을 소모하는 데 집중해.’
-명 받들겠습니다, 주군.
상황이 변하면 그에 따른 대처도 달라져야 하는 법.
나도 재빠르게 전략을 수정해 움직였다.
멀리 떨어져서 방어만 하던 전략을 버리고, 땡길거야와 합세해 용족 군단장의 목숨을 줄여보기로 한 것이다.
성과는 있었다.
“오호, 직접 대적하겠다는 것인가?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
까앙-!
“크윽!”
내가 [용암 전개]로 용족 군단장의 창을 받아내는 틈에 땡길거야가 [신성 폭발]과 [제국 기사단의 검술]로 용족 군단장의 목을 베어 용족 병사들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하지만.
“큭큭큭, 소용없다. 내 군세가, 곧 나의 목숨이다!”
녀석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내게 공세를 퍼부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몸 곳곳엔 생채기가 쌓여갔다.
많이 성장했다곤 하나 SSS급 보스 몬스터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내기엔 레벨의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특히 용족 군단장의 몸집이 너무 컸는데 이건 거대화 특성이 기본으로 탑재된 거나 다름없었다.
까앙-!!
나는 거대한 창에 깨져나가는 [용암 전개]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쳇, 쉽게 끝날 줄 알았는데. 최후의 수단을 써야겠어.’
아무리 SSS급 보스 몬스터라 하더라도 만렙 캐릭터가 두 명이나 있어서 쉽게 클리어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난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용족 군단장의 전투력 자체는 홍진성이나 마강진에 비해 월등하다고 볼 순 없었으나, 용족 병사들을 대신 희생시켜 몸을 회복하는 능력이 너무나도 사기였다.
그렇다고 해서 위기를 타개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리스크가 따르긴 하지만 확실하게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콰아아앙-!!
나는 용족 군단장에게 [분화]를 먹이고 거리를 벌린 후, 슬쩍 상태창을 쳐다봤다.
[남은 마나 - 48%]
세 캐릭터를 동시에 소환한 탓에 틈이 나는 대로 마나 포션을 마시고 있지만, 남은 마나량은 절반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내가 생각하고 있는 최후의 수단까지 쓴다면?
마나 소모량이 압도적으로 증가해 [캐릭터 소환]을 유지할 수 없게 될 테지만,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
가지고 온 마나 포션도 거의 다 마셔서 한 개밖에 남지 않았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나는 곧장 실행에 옮겼다.
[캐릭터 : 제장이의 소환을 해제합니다.]
[캐릭터 : 매직킹을 소환합니다.]
제장이의 소환을 해제하고 매직킹을 불러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드. 여긴 탁 트인 곳이니 실력 좀 발휘해도 될까요?”
“당연하지. 마음껏 날뛰어도 돼.”
“감사합니다, 로드.”
매직킹은 광산 붕괴 위험으로 소환을 해제당했던 게 마지막이라 그런지, 내게 확인을 받더니 공중으로 날아올라 용족 군단을 내려다보며 시원하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야이, 도마뱀 쉐리들아! 오늘 다 뒈졌다고 복창해라!!”
그 뒤로.
[캐릭터 : 매직킹이 화염 기둥을 사용합니다.]
[캐릭터 : 매직킹이 체인 라이트닝을 사용합니다.]
[캐릭터 : 매직킹이 블리자드 스톰을 사용합니다.]
쿵쿵-! 화아아악-! 파지지직-!!
마법의 향연이 이어졌다.
불과 뇌전, 얼음 폭풍 등 다양한 마법이 용족 군단을 덮친 것이다.
그러자.
[남은 마나 – 24%]
매직킹의 막대한 마법 사용으로 마나가 쭉쭉 빠져나갔다.
대신 효과는 확실했다.
“키에에에엑…!!”
[캐릭터 : 매직킹이 정예 용족 군단의 기사단장(SS)을 처치했습니다.]
[캐릭터 : 매직킹이 와이번을 탄 용족 군단의 궁수(S)를 처치했습니다.]
[군주의 특성, 독존이 발동합니다.]
[경험치 20배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지력+1, 체력+2를 획득합니다.]
용족 군단의 몬스터들은 비명을 지르며 먼지로 산화했고.
“다수의 적을 상대로 마법만 한 게 없는데 적절한 용병술이십니다, 주군.”
“저 미친 마법사가 또 날뛰기 시작했군.”
땡길거야와 다크어둠은 각자 다른 방법으로 매직킹을 평가했으며.
“어, 엄청난 힘이다! 이길 수 있겠어!!”
“우와, 대단해요, 용병님!”
카셀은 주먹을 꽉 쥐고, 하센은 폴짝 뛰면서 환호했다.
확실하게 넘어온 승기.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큭큭, 이거 위험하게 됐구만!”
자신의 생명줄이라고 할 수 있는 부하들이 몰살되고 있는 상황임에도 군단장은 비릿한 웃음을 지우지 않고 있었다.
‘뭐지?’
그리고 반복되는 공격을 막아내던 나는 순간 깨달았다.
‘매직킹, 캐스팅 중지!’
녀석의 비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