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10장 일취월장(12)
슈화아아악-!
“로드, 괜찮으십니까?”
원래대로 돌아온 세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매직킹의 무릎에 내가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초록 눈동자.
회색 머리칼과 은빛 안경테에 시선이 끌려 그동안 잘 몰랐지만, 매직킹의 눈동자는 에메랄드가 박힌 것처럼 짙은 초록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지식과 지혜를 겸비한 대마법사라 그런 걸까.
“제가 걸어온 궤적을 여행하고 오셨군요, 로드. 감상평을 들려줄 수 있으십니까?”
기억 체험 직후에 쓰러지는 나를 보고 당황했던 다른 캐릭터들과는 다르게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매직킹도 알고 있는 듯했다.
내가 자신의 인생을 겪고 왔다는 것을.
나는 매직킹의 품에서 벗어나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치열했어. 우여곡절이란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매직킹의 기억 속, 하이어의 호사가 중엔 이런 얘기를 하는 이도 있었다.
맨날 책만 보며 연구하는 매직킹이 부럽다고.
젊고 돈도 많으니 분명 세상 걱정 없이 편하게 살 것이라고.
당연한 시각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TV에 나오는 억만장자들을 보며, 그들은 아무 근심걱정 없이 편히 살 거라 지레짐작하는 것처럼.
하지만 매직킹의 인생에 빙의해 직접 경험해보니,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비록 육신은 매일 의자에 앉아 책만 봤지만, 정신은 수많은 실패와 고뇌로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돌아가는 생각의 굴레.
매직킹은 보통 사람이라면 10분도 유지하지 못할 집중력을 깨어 있는 내내 유지했으니,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몇십 배는 되었다.
게다가 그러한 두뇌 활동 속에서 여러 욕구를 억누르며 진리를 추구했으니, 마법사가 아니라 성직자라 봐도 무방한 삶이었다.
신은 공평하다는 말이 있듯, 불세출의 천재로 평생 돈 걱정은 하지 않고 살았지만 다른 고민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며 살았던 것이다.
물론, 마지막엔 결국 참지 못하고 터지긴 했지만.
매직킹도 그 점이 걸리는 듯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부끄럽습니다, 로드. 마지막에 안 좋은 방향으로 좌절감을 표출하는 모습을 보여드린 것 같아서요.”
“아냐, 충분히 이해해. 평생의 기대가 무너졌는데 그 정도면 양반이지 뭐.”
매직킹의 심정을 완전히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기대감이 무너지는 일은 이곳에서도 얼마든지 많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대학 입시다.
대학만 가면 된다고 19년을 배우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지 않던가.
입시 지옥을 빠져나오고 나서도 취업, 결혼 등 수많은 목표가 생기고 그 목표만 이루면 모든 게 끝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목표 자체를 이루기도 힘들지만, 기대했던 것과 다르거나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해서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매직킹의 좌절감은 정도의 차이일 뿐이었기에 이해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러자.
“그럼 로드한테도 편하게 말해도 될까요?”
충분히 이해한다는 내 말에 재밌는 게 떠올랐다는 듯, 매직킹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던져왔다.
“그래도 돼. 대신 그 순간부터 날 볼 수 없을 테지만.”
“하핫, 농담입니다. 주종의 맹세가 있어서 안식처의 화신체들은 로드를 배신하거나 비난할 수 없거든요.”
“아쉽네. 미궁에서 하던 찰진 욕을 직관할 기회였는데 말이야.”
나도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농담을 맞받아쳤다.
다른 사람들이 듣는다면 농담이 아니라 협박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알고 있다.
저게 매직킹이 아주 친한 사람에게만 하는 농담이라는 것을.
확실히 농담을 주고받을 만한 사이가 되긴 했다.
[캐릭터 : 매직킹에 대한 이해도가 증가하였습니다.]
[캐릭터 : 매직킹의 충성도가 100 상승합니다.]
[캐릭터 : 매직킹]
[현재 충성도 – 610 / 999]
[충성도가 600을 돌파하여 캐릭터 : 매직킹의 마나 소모량이 6% 감소합니다.]
매직킹의 삶을 체험한 뒤로 충성도가 100이나 올라 600을 돌파했으니까.
덕분에 추가 효과로 매직킹의 마나 소모량이 6% 감소하게 되었다.
그리고.
[보상 : Lv 1. 천재 마법사의 깨달음을 획득합니다.]
다른 캐릭터들과 마찬가지로 매직킹의 비기도 일부 획득했다.
나는 스킬창을 열어 스킬 목록을 확인했다.
[Lv 1. 천재 마법사의 깨달음]
[제1장 마법사의 지혜]
[조건 미충족, 잠김]
[조건 미충족, 잠김]
[조건 미충족, 잠김]
[조건 미충족, 잠김]
[패시브 스킬 : Lv 1. 마법사의 지혜 – 마나 회로의 효율을 높여 최대 마나량이 20% 증가합니다.]
‘최대 마나량 20% 증가? 효율 한번 끝내주네.’
복잡하지 않은 단순한 패시브 스킬 하나.
그러나 그 효용은 한마디로 대박이었다.
레벨업을 하고 대현자의 팔찌를 착용해도 세 캐릭터를 동시에 운용하기에는 마나가 부족했다. 그런데 다행히 [마법사의 지혜] 덕분에 캐릭터 동시 소환의 부담이 훨씬 줄어들게 됐다.
마나의 소모 효율을 줄이는 것도 좋지만, 단숨에 소모 효율을 줄일 수 없는 지금 같은 상황에선 최대 마나량이 늘어나는 것만 해도 큰 도움이 된다.
마나 포션을 마실 때 회복량이 오버될 것을 걱정할 필요도 적어지고, 마나 포션이 없을 때도 비축해 둘 수 있는 마나의 양이 늘어나는 거니까.
지금의 나에게 딱 필요한 효과.
비록 하이어에선 매드킹이라는 오명(?)을 가진 매직킹이지만, 그의 깨달음은 분명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정 아쉬우시다면 금제에 막히지 않는 선에서 들려 드릴까요?”
“아냐, 됐어. 생각해보니 아까 본 걸로 충분한 것 같아.”
가끔 선을 넘는 건 잘 제지해야겠지만.
나는 이어지는 매직킹의 농담을 받아친 뒤에, 출입구 포탈로 향했다.
매직킹의 히든 퀘스트를 수행하느라 아직 용족 군단의 던전을 나가지 못했는데, 이제는 정말 끝맺을 때였다.
포탈 속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자.
화아아아악-!
시야가 변색되며 배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마침내 돌아온 원룸.
“후우, 드디어 돌아왔네.”
늘 해왔던 레이드였지만, 이번엔 유난히 고되게 느껴졌다.
SSS급 보스 몬스터와 S급 이상 몬스터 수천 마리를 상대해서 그런가 싶었는데, 그렇다고 하기엔 뭔가 미묘하게 느낌이 달랐다.
이유는 곧 밝혀졌다.
우우우웅-!
집으로 돌아온 직후, 통신이 연결되어 휴대폰이 여러 알림을 받으며 진동했는데.
날짜가 무려 사흘이나 지나 있었다.
“뭐지, 내가 날짜를 착각하고 있었나?”
나는 휴대폰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흘이 지났다기엔 던전에선 밤을 본 적도 없었다.
그때, 뒤따라 포탈을 나온 매직킹이 설명해 주었다.
“착각이 아닙니다, 로드. 용족 군단 던전에 들어간 후, 사흘이나 지났으니까요.”
“사흘이나 지났다고?”
“예. 용족 군단 던전은 이곳보다 시간 흐름이 조금 더 빠른 차원에 생성되어 있었거든요.”
던전에서 보낸 시간이 하루도 안 된 것 같은데 사흘이 지나다니.
혹시 이번에도 농담을 하는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시간의 흐름이 다른 던전이 있다는 얘기는 종종 듣기도 했거니와, 휴대폰에 날짜 말고도 시간이 흐른 흔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헌터청 신대훈 과장 - (사흘 전)안녕하세요, 한상우 헌터님. 잘 지내고 계시죠? 혹시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닌지 안전 확인차 연락드렸습니다.>
<헌터청 신대훈 과장 - (이틀 전)한상우 헌터님, 답장이 오지 않아 재차 연락드립니다. 혹시 많이 바쁘실까요?>
<아신 길드장 강철만 – (이틀 전)한상우 헌터, 몸은 괜찮나요? 디바인 실드 입단 추천 시험은 통과하셨습니다. 축하해요. 이번 사태가 무사히 끝나면서, 국내에서 반대하던 사람도 한상우 헌터의 활약을 인정하고 찬성으로 돌아섰습니다. 본사 면접 일자는 추후 알려줄 테니 푹 쉬세요.>
<헌터청 신대훈 과장 - (하루 전) 등급 재심사 관련하여 연락드립니다. 혹시라도 답장 보시면 바로 연락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은하 헌터 - (3시간 전) 안녕하세요, 한상우 헌터님. 신대훈 과장님께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혹시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부재중 전화>
<헌터청 신대훈 과장(3)>
<아신 길드장 강철만(1)>
<이은하 헌터(1)>
“그동안 연락이 많이 왔네.”
사흘 동안 자리를 비운 사이에 연락이 제법 와 있었다.
사실 대헌터 시대에 가족과 친구를 잃은 뒤, 내게 휴대폰은 하이어를 하기 위한 게임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덧 안부를 걱정해주는 사람도 생겼다.
루미나스와 전투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어쨌든 내용을 보니 빨리 답신을 주는 게 좋을 듯했다.
나는 부재중 목록 중 가장 급박해 보이는 인물에게 제일 먼저 전화를 걸었다.
해결해야 할 일이 있기도 하거니와, 문자만 봐도 날 걱정하는 게 절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과연, 신호음이 들리기도 전이건만 상대방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헉! 한상우 헌터님,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안녕하세요, 과장님. 연락이 늦었네요. 전 괜찮습니다. 별일 없어요.”
-휴, 다행입니다. 루미나스한테 해코지라도 당한 게 아닐까 걱정했어요. 진짜 괜찮으신 거죠?
“예, 잠깐… 먼 곳을 다녀왔는데 깜빡 잊고 휴대폰을 놓고 갔네요.”
나는 던전에 다녀왔다고 둘러대려다 말았다. 지금은 던전에 진입할 수 없는 기간이라, 상황 설명을 하려면 열쇠에 대한 이야기까지 해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신대훈은 믿을 만한 사람이지만, 굳이 비밀을 밝힐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해명은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아아, 그러셨군요. 천만다행입니다. 그럼 혹시 등급 재측정은 언제가 괜찮으실지 여쭤봐도 될까요?
“등급 재측정…. 날짜를 제가 정할 수 있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다만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정보를 통제하고 있긴 하지만, 내부적으로 한상우 헌터님의 전력을 제대로 측정해야 여러 상황에 따른 대책을 세울 수 있어서요.
등급 재측정.
마강진을 처치한 후, 나에 대한 정보를 통제하는 것을 대가로 최대천과 거래하면서 받아들였던 조건이다.
보상의 일환으로 얻어낸 성과이긴 했지만, 앞으로의 헌터 생활을 고려했을 때 협조하는 게 나에게도 좋았다.
언제 측정하는 게 좋을 것인가.
“혹시 지금 수도권 지역 게이트 복구는 얼마나 진행됐죠? 레이드 가능한 곳은 있나요?”
-80% 정도 진행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레이드는 내일부터 가능한 곳이 생길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나는 신대훈과 몇 번 대화를 나누다가 결단을 내렸다.
“지금 바로 가능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