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화
11장 별들의 세상(1)
“음, 이게 맞나 모르겠네요.”
퉁퉁-! 따각따각-!
복구 공사로 어수선한 헌터청 로비.
청운 길드의 길드장, 서지환이 바쁘게 움직이는 공무원 헌터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그 옆에 서서 로비를 구경하던 대천 길드의 길드장, 추성태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왜? 뭐가 또 불편하신가?”
“헌터 한 명의 등급 재심사에 너무 호들갑 떠는 것 같아서요. 갑자기 SS급 헌터들을 소집하질 않나, 공무원 헌터들도 우르르 나와서 로비를 청소하질 않나…. 아무리 유망주라지만 영 마음에 안 드네요.”
지금으로부터 약 세 시간 전, 길드 복구 공사를 감독하던 서지환에게 연락이 하나 왔다.
헌터 한 명이 극비리에 등급 재심사를 보는데,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달라는 것이었다.
전화를 받은 직후, 서지환은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스케줄을 몇 주 전부터 분 단위로 짜놓는 게 SS급 헌터인데, 지금 당장 오는 것도 모자라 등급 재심사의 심사위원으로 와달라니.
대기업 총수에게 허드렛일을 시키는 것과 다름없는 말이지만, 서지환은 이 어처구니없는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연락한 이가 헌터청장 최대천이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대통령을 뛰어넘는, 진정한 권력의 정점에 서 있다는 소리를 듣는 인물.
심지어 지금은 비상사태도 발령된 상황이라, 국내에 등록된 헌터들에게 최대천의 명령은 법적인 효력도 가지고 있는 상황이다.
말이 연락이지 사실상 명령이나 다름없었는데, 만약 거절한다면?
그 후폭풍이 어떻게 돌아올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최대천은 기본적으로 헌터들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해주는 만큼, 그가 부를 때는 정말로 필요하다는 의미였으니까.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자잘한 스케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무게감을 가진 명령이었다.
결국 서지환은 급하게 스케줄을 조정해 헌터청으로 달려왔는데, 이건 다른 SS급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강철만, 지소영, 추성태 등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최대천의 호출을 받은 것이다.
다만 그들은 자신처럼 불만에 가득 차 있지는 않았다.
강철만과 지소영은 등급 재측정이 기대된다며 재측정 준비를 도우러 갔고, 추성태도 불쾌하게 느끼지 않는 모양새였다.
“확실히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지. 하지만 충분히 납득할 수 있어. 마강진을 처치한 헌터의 등급을 재측정하는 거니, 기밀을 유지하고 정확하게 전력을 측정해야 하잖아. 그러면 우리를 빠트리면 안 되지. 저기 있는 공무원 헌터들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 오는 것이니 들뜰 만하고 말이야.”
“그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너무 과하다는 거죠.”
“과한 게 아니라… 질투하는 거 같은데? 내 말이 틀렸나, 서지환 길드장? 큭큭큭!”
‘질투? SS급 헌터에 청운의 길드장이며 디바인 실드 소속인 내가?’
추성태의 일침에 여러 상념이 떠올랐지만 서지환은 곧바로 반박하지 못했다.
우선 입 밖으로 꺼내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데다 뒤늦게 미간을 찌푸리며 반박하려던 찰나, 한 남자가 헌터청에 들어오자 주변이 시끌벅적해진 탓이었다.
“헛! 오, 오셨다! 루미나스를 쓸어버렸던 그분이야!”
“맞아! 등급 재측정하러 올 수도 있다고 하더니 진짜였잖아?”
블랙진에 검은 자켓을 입은 평범한 차림의 헌터.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차림의 청년이었지만 로비에 있던 공무원 헌터들은 사내의 등장에 휘둥그레 눈을 뜨며 자기들끼리 속삭였다.
그중에는.
“다, 다시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혹시 악수 한번 해줄 수 있으실까요? 그때 헌터님 덕분에 살 수 있었습니다.”
청년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하는 이도 있었다.
다만 고랭크의 헌터 중에는 타인을 귀찮다고 생각하고 무시하는 안하무인도 많았기에, 조금 걱정도 되었다.
공무원 헌터들은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사태를 주시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 예….”
뜬금없는 부탁이긴 했지만, 청년은 아무 표정 변화 없이 공무원 헌터와 악수를 한 것이다.
전투 때의 압도적인 모습과는 상반되는 차분한 모습.
“나, 나도 이따가 부탁드려 볼까?!”
“사인도 가능할지 물어봐야겠다!”
나머지 공무원 헌터들도 뒤늦게 청년의 정상적인(?) 성격을 알아보고 지난 전투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진짜로 다가가는 일은 없었는데, 사전에 등급 재심사를 하러 온다면 알은체를 자중하라는 최대천의 명령이 있기도 했거니와.
“한상우 헌터님,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럼 등급 재측정을 위해 특별관으로 모시겠습니다.”
로비에서 대기하고 있던 신대훈 과장이 검은 자켓의 청년, 한상우를 데리고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한상우가 이동하는 도중 고개를 돌려 로비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은 사람이 많이 없군요. 기자들이 재심사를 눈치채고 잠복해 있을 줄 알았는데.”
“갑작스럽게 요청해 주셔서 정보가 샐 틈도 없었고, 정보 통제에도 힘을 쓰고 있어서요. 등급 재심사도 외부 심사위원분들을 초빙해서 진행할 예정입니다.”
“외부 심사위원이요?”
“예, SS급 헌터님들이십니다. 저기 계시는데… 인사는 재심사가 끝나고 나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아무래도 보는 눈이 많으니까요.”
신대훈의 설명에 한상우가 고개를 돌려 추성태와 서지환을 바라봤다.
마주치는 눈빛.
그러나 그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는데, 두 사람과 눈이 마주친 순간 한상우가 신대훈과 함께 코너를 돌아 특별관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시야에서 사라진 신형.
추성태가 발걸음을 떼며 말문을 열었다.
“실물로는 처음 보는데 풍기는 분위기가 범상찮군. 우리도 가도록 하지.”
“뭐, 그러죠. 이렇게 된 이상 빨리 끝내는 게 낫겠네요.”
헌터청에 불려 온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마침 재심사 대상자도 왔으니 빨리 일을 처리하고 가는 게 나았다.
서지환은 추성태와 함께 한상우의 뒤를 따라 특별관에 마련된 검사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오, 한상우 헌터! 연락이 안 되길래 걱정했는데 괜찮아 보이는군요!”
“S급 던전 브레이크 이후로 처음이죠? 그땐 경황이 없어서 말 못 했는데 고마웠어요.”
검사실에 있던 강철만과 지소영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한상우를 반겼다.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오셨군요, 한상우 헌터. 이번엔 보안에 제법 신경을 썼는데, 미행이나 기자들이 따라오진 않았습니까?”
최대천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한상우를 반겼다.
“예, 청장님. 미행은 없었습니다.”
“다행이군요. 그럼 등급 재심사 진행하겠습니다. 오늘 심사는 투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외부 심사위원분들이 증인으로 참석하셨습니다. 저와 SS급 헌터 네 분이 검증하여 판단할 것입니다. 해외에 계신 SS급 헌터분들은 제외하고 전원이 와 주셨습니다.”
“그렇군요.”
최대천의 안내에 한상우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최대천, 강철만, 지소영, 추성태, 서지환, 신대훈.
검사실의 인원은 총 여섯 명으로, 신대훈을 제외하고는 모두 SS급일 뿐만 아니라 헌터청장과 대길드의 길드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이들이었다.
대한민국을 손에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권력자들이 고작 한 명의 등급 재심사 때문에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다니.
새삼 마강진을 비롯한 루미나스를 처치한 게 얼마나 큰 업적인지 느껴졌지만, 한편으로는 왠지 모를 불편함도 따라왔다.
심사위원들이 SS급 헌터인 건 좋지만, 이들에게 스킬이 공개될 것을 생각하니 전력이 노출된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이 부분도 최대천이 고려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킬 부분은 공개하는 게 꺼려지실 테니, 상세 목록은 저만 확인할 것입니다. 외부 심사위원분들껜 스탯만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그럼 등급의 종합적인 책정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다른 스킬 목록은 비공개이지만, 공격 스킬의 시험은 공개적으로 할 터이니. 그것만으로도 최대 화력을 볼 수 있으니 등급을 측정하기에는 충분할 걸세.”
중간에 서지환이 이의를 제기했지만, 최대천은 헌터청장의 직위로 단번에 정리해 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검사를 시작했다.
“그럼 검사 시작하겠습니다. 한상우 헌터, 스탯 측정기 위로 올라가 주시겠습니까?”
“예, 그러죠.”
한상우는 예전에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스탯 측정기 위로 올라가 손을 잡았다.
그 사이, 신대훈이 종이를 여러 장 뽑아 서지환을 비롯한 SS급 헌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여기 한상우 헌터의 예전 검사 결과표입니다. 참고해 주시면 됩니다.”
“음? 마강진을 처치했는데 이렇게 레벨이 낮다고?”
“마강진을 잡기 전에 측정한 거라 레벨이 오르긴 했을 텐데…. 그래도 이걸로는 도저히 감도 안 잡히는데?”
[이름 – 한상우]
[레벨 - 75]
<스탯>
[힘 : 118] [민첩 :107] [지력 : 97] [체력 : 125] [마력 : 165]
헌터청에 기록된 한상우의 스탯을 보며 추성태와 지소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오래전에 측정한 것이라고는 하나, 이 정도 스탯으로는 마강진은커녕 일반 루미나스 헌터조차 잡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사이 오른 레벨을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황당한 심정인 건 서지환도 마찬가지였다.
‘어처구니없네. 고작 이런 놈을 디바인 실드 단원으로 추천했다고? 그래,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자.’
D급? C급? 얼마인지 가늠조차 안 되는 낮은 레벨.
서지환은 코웃음을 치며 건네받은 종이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오래된 자료라고 해도 1년도 지나지 않았기에, 레벨을 아무리 많이 올려봤자 100도 채 올리지 못했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탯 측정이 완료되었습니다.
지이이익-
“역시… 엄청난 성장세군요.”
검사가 끝나자 최대천이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말문을 열었다.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최대천이 먼저 확인한 후에 서지환도 한상우의 스탯 검사 결과표를 받았는데.
[이름 – 한상우]
[레벨 – 297]
<스탯>
[힘 : 362] [민첩 : 357] [지력 : 307] [체력 : 385] [마력 : 430]
“……!”
이전 검사 결과표와 숫자가 너무 달랐다. 레벨과 스탯 모두 200이 넘게 오른 것이다.
“이게… 가능한 일이야?”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이렇게 성장했다고? 강철만, 옛날의 너보다 성장 속도가 빠른 것 같은데?”
“이야! 역시 강철만이 괜히 추천한 게 아니었군 그래!”
반응을 보이는 건 강철만과 지소영, 추성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스탯 검사 후, 스킬 검증실로 이동해 샌드백을 치자.
[분화]
콰아아아아앙-!!
<점수 – 794 / 1,000>
점수가 무려 794점이나 나온 것이다.
최대천과 신대훈, 그리고 SS급 헌터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랭킹판으로 향했다.
<스킬 검증 측정 점수>
<1위 : 강철만 – 832점>
<2위 : 안지은 - 817점>
<3위 : 황현성 – 796점>
<4위 : 한상우 – 794점>
<5위 : 서지환 - 788점>
무려 4위에 해당하는 점수로 서지환보다 높았다. 이에 추성태가 박장대소하며 말했다.
“으하하핫! 서지환을 제쳤잖아! 저 녀석, 완전 대박인걸!”
“흥, 저는 그때 전력으로 하면 건물이 무너질까 봐 살살했던 겁니다. 3년 전에 한 거기도 하고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넌 3년 전에도 SS급 헌터였다고, 푸하하핫! 애들 놀이 같아서 나도 안 하긴 했지만 진짜 재밌네, 이거.”
계속되는 놀림에 서지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반박하면 할수록 계속 자신의 위치만 내려가고 있었다.
그사이, 옆에선 지소영과 강철만이 한상우의 등급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신기하네요. 레벨과 스탯, 스킬 위력의 차이가 너무 커요.”
“아이템이 좋은 건가? 그런데 템빨도 결국 등급에 반영이 되잖아? 이 정도면 SS급으로 봐도 무방한 거 아냐?”
“잠시만. 레벨 등급표 좀 확인해볼게.”
지소영이 휴대폰으로 레벨 등급표를 띄웠다.
SS급 : 401 - 600
S급 : 301 - 400
A급 : 231 - 300
레벨은 A급이 맞았다. 하지만 스킬의 위력은 SS급 수준이고, 처치했던 적은 비공식 SS급 한 명에 S급과 A급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어떻게 봐도 A급은 가볍게 뛰어넘는 이력이었다.
최종 등급을 어떻게 책정해야 할 것인가.
과거, 고민에 빠졌던 검사관들처럼 강철만과 지소영도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때였다.
서지환이 두 사람을 돌아보며 물었다.
“레벨이든 스킬의 위력이든, 결국 헌터에게 가장 중요한 건 전투 능력 아닌가요?”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런데 그걸 알 수가 없으니 이렇게 종합적으로 측정해서 판단하는 거잖아.”
“다른 방법이 있다면요?”
“다른 방법? 그게 뭔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강철만과 지소영.
하지만 서지환은 두 사람에게 대답하는 대신.
“한상우 헌터? 저랑 대련 한번 어떠신가요?”
한상우를 쳐다보며 도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