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11장 별들의 세상(3)
‘어, 어느 틈에…!’
단검을 들고 자세를 잡고 있던 서지환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찰나.
대화에 정신이 팔려 아주 잠깐 집중력이 흐트러졌는데, 그 틈을 한상우가 비집고 들어왔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
한상우는 이어서 서지환의 목을 노리고 [반월 베기]를 사용했다.
그러나.
후우우우웅-!
화산검의 오러는 애꿎은 허공만 가르고 말았으니.
“빠르네요. 나를 잡기엔 역부족이지만.”
베었다고 생각한 순간, 서지환의 신형이 사라지더니 대련 시작 전에 한상우가 서 있던 지점에서 나타났다.
어느새 바뀌어버린 위치.
한상우는 고개를 돌려 거리를 벌린 서지환을 바라봤다.
그리고.
“역부족이라고 하기엔 피해가 큰 거 아닙니까?”
전광판 쪽으로 고개를 까딱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서지환 – 89,000 / 100,000>
“……!”
서지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검은 분명 피했고 몸에 별다른 타격감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보호막의 수치가 깎여 있었다.
적은 것도 아니고 무려 1만이 넘는 수치.
놀란 건 서지환만이 아니었다.
“대, 대체 언제…!”
“검은 분명 피했는데…?”
“허! 세상일 아무도 모른다고 했지만, 저렇게 빠르게 유효타가 들어갈 줄은 몰랐네.”
대련장 외곽에 서서 지켜보던 지소영, 추성태, 강철만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고.
“처, 청장님? 혹시 어떤 유효타가 들어갔는지 보셨습니까?”
“음, 나도 보지 못했네. 데미지가 큰 걸 보니 오류는 아닌 것 같은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신대훈과 최대천도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당한 사람부터 지켜보는 이들까지 한상우가 어떻게 보호막의 수치를 깎았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는데,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한상우는 화산검이 아니라.
[캐릭터 : 다크어둠을 소환합니다.]
[캐릭터 : 다크어둠이 은신을 사용합니다.]
[캐릭터 : 다크어둠의 소환을 해제합니다.]
순간 소환으로 서지환의 등 뒤를 공격해 보호막을 깎은 것이었으니까.
‘대련이라고 해서 [캐릭터 소환]을 자제할 이유는 없지.’
최대천을 비롯해 많은 SS급 헌터가 지켜보는 상황.
자칫 잘못했다간 [캐릭터 소환]의 능력을 간파당할 수도 있었지만, 한상우는 과감하게 순간 소환을 사용했다.
애초에 들킨다고 해도 이제는 힘을 키워 크게 상관없기도 했거니와, 서지환과 마찬가지로 한상우도 봐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아이템과 패시브 스킬의 효과 덕분에 레벨 대비 강한 힘을 가지고 있긴 해도, 아직 한상우는 단독으로 SS급을 찍어누를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순간 소환이 손에 상당히 익어서 은신을 사용한 다크어둠의 공격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배후 강타]나 다른 공격 스킬은 시각적인 효과가 남으니, [은신]으로 몸을 숨기고 단검으로 보호막만 베어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순간 소환의 이점과 대련의 허점을 파고든 공략법이었는데. 덕분에 주변의 구경꾼들은 물론이고 당사자인 서지환도 어떻게 보호막이 깎였는지 감도 잡지 못했다.
“대체 무슨 속임수를 쓴 거죠?”
“속임수라…. 그런 걸 묻지 않으면 싸울 수 없는 겁니까? 저는 끝날 때까지 말해줄 생각이 없는데요.”
자신만의 전략을 순순히 알려줄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한상우는 코웃음을 친 뒤, 다시 땅을 박차 서지환을 향해 [침투]를 사용했다.
이전과 같은 패턴의 공격이었다.
서지환은 단검을 역수로 쥐며 자세를 낮췄다.
‘이번엔 완벽하게 피하고, 반격까지 해주마!’
한 번 당했던 걸 두 번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서지환은 검이 날아드는 타이밍에 맞춰 멀리 이동하는 스킬 [멀어지기]와 단검을 빠르게 내지르는 [쾌속타]를 사용하며 회피와 반격을 동시에 감했다.
효과는 뛰어났다.
후우웅-! 파바밧-!
한상우의 하단을 파고들어 뒤쪽 공간으로 도망치는 동시에 단검을 찔러 공격을 성공시킨 것이다.
그런데 잠시 후, 전광판에 뜬 결과는 정반대였다.
<서지환 –78,000 / 100,000>
<한상우 – 100,000 / 100,000>
서지환의 보호막은 재차 깎였지만, 한상우의 보호막은 1도 깎이지 않은 것이다.
‘분명 피하고 반격까지 했는데 어째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서지환은 이번엔 먼저 공격을 감행했다.
“난파검!”
여러 차례 단검을 휘둘러 폭풍 같은 검기를 날리는 스킬, [난파검]을 사용한 것이다.
제대로 맞으면 한 번에 보호막 수치의 절반은 우습게 날아갈 강력한 스킬.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는 짓이었다.
무수히 많은 검기가 폭풍처럼 쇄도했지만.
콰과과과광-!!
한상우는 [용암 전개]로 검기를 모두 막아낸 후, 폭발에 자욱해진 연기를 뚫고 들어가 서지환을 향해 [만월 가르기]와 다크어둠의 순간 소환을 동시에 사용했다.
“치잇…!”
서지환은 [만월 가르기]는 성공적으로 회피했지만, [은신]한 다크어둠의 공격은 피하지 못했다.
<서지환 – 46,000 / 100,000>
[난파검] 사용 후, 오히려 보호막이 깎인 건 서지환이었다.
어느덧 절반 넘게 깎인 수치.
“…인정하죠. S급 중에서도 상급은 되는 실력인 것 같군요. 본격적인 대련은 지금부터입니다!”
이대로는 승산이 없었기에 서지환은 결국 활을 들 수밖에 없었다.
“이제 좀 정신이 드나 보네.”
한상우는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려 보였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으니.
확실히 활을 든 서지환은 다른 인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회전접!!”
멀리서 시위를 당기자 분명 하나였던 화살이 10여 개로 증식해 쏜살같이 쇄도했다.
한상우는 서둘러 방패를 들어서 막아냈는데, 발이 뒤로 밀릴 정도로 화살 하나하나의 위력이 수준급이었다.
쿵쿵-! 쿵쿵쿵-!!
방패와 맞부딪쳐 굉음을 일으키는 화살들.
심지어 몇몇 화살은 분명 피했음에도 방향을 틀어 발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한상우 – 87,000 / 100,000>
처음으로 깎인 한상우의 보호막.
‘좋아, 이대로만 하면 이긴다.’
서지환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확실히 활을 드니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비록 보호막 수치에서 밀리고 있긴 하지만, 스치기만 해도 깎여나가는 보호막의 특성상 이렇게 원거리에서 공격하고, 상대방이 다가올 때 거리를 벌리기만 하면 승리야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서지환 – 22,000 / 100,000>
“하앗…!”
화살을 쏘다가 한상우가 다가올 때마다 적절하게 거리를 벌리고, 쇄도하는 검기도 피했음에도 보호막이 조금씩 깎여나간 것이다.
“대체 왜…!”
서지환은 작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공격법을 파악하지 못하는 건 둘째치고, SS급 헌터에 청운 길드의 길드장인 자신이 헌터가 된 지 1년도 안 된 상대에게 밀리고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던 것이다.
반면, 한상우는 예상대로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이어에서 키운 캐릭터들을 소환할 수 있는 스킬, [캐릭터 소환].
소환하는 캐릭터 중 만렙 캐릭터들은 SS급 헌터들을 뛰어넘는 SSS급의 실력자들이었다.
그들의 힘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다면 SS급 헌터를 압도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 아니 세계 최고의 길드를 만들어서 그 누구도 잡지 못한 SSS급 던전과 보스 몬스터도 돌파가 가능할 것이다.
다만 그 힘을 맘껏 발산하지 않은 것은, 한상우 본인의 힘이 아직 부족했기 때문.
당장 지금만 해도 한상우의 능력이 과거의 F급이었다면, 이미 화살에 관통당해 몇 번이고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성장을 위해 달려온 지금, 실제로 SS급 헌터를 압도하고 있었다.
물론 이 사실을 알 수 없는 서지환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쿵-! 쿵-! 콰아아아앙-!!
화살과 검기가 부딪쳐 폭발하는 격투 속.
<서지환 – 0 / 100,000>
<한상우 – 47,000 / 100,000>
<한상우 승리>
보호막이 모두 소진되며 대련이 끝났는데도 전투를 중단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한술 더 떴다.
“불새접!!”
대련 종료에 따라 경기장의 보호막도 사라졌는데, 자신의 가장 강력한 스킬을 쓴 것이다.
서지환이 날린 화살이 10여 개로 증식하더니, 화염이 이글거리는 불사조로 바뀌어서 한상우를 향해 날아갔다.
“저, 저 미친놈이!!”
“대련장에서 필살기급 스킬을 쓰다니…!”
참관하던 SS급 헌터들은 경악하며 사태를 중재하기 위해 앞으로 튀어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한상우도 만만찮았다.
“하아아앗!!”
[캐릭터 : 땡길거야를 소환합니다.]
[캐릭터 : 땡길거야가 신성 폭발을 사용합니다.]
[캐릭터 : 땡길거야의 소환을 해제합니다.]
적당히 방패로 막아도 되지만, 순간 소환으로 땡길거야의 [신성 폭발]을 사용해 대응한 것이다.
거기다가.
[분화]
화산검의 스킬까지 사용해 화력을 더했다.
“저 정신 나간 놈들이…!”
“방어 스킬을 사용해! 대련장이 날아갈 수도 있어!!”
지소영과 추성태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한상우와 서지환이 사용한 스킬의 위력을 봤을 때, 맞부딪칠 경우 최소한 건물 하나는 날아갈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최대천도 어느새 신대훈 앞에 서서 방어 스킬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쉬이이이익-! 화아아아악-!!
“……?”
분명 대련장 한가운데서 두 스킬이 만났으나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불사조와 초록빛 섬광이 맞부딪치는 순간, 중앙에 웬 검은 구슬이 나타나더니 스킬을 모두 흡수해버린 것이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하아, 하아…….”
“허억, 허억.”
한상우와 서지환은 숨을 거칠게 내쉬며 서로를 노려봤는데, 진실은 금방 드러났다.
고요해진 대련장 입구 쪽.
“음, 면접이 있다고 해서 구경하러 왔는데 환영 인사가 꽤 격하네요?”
웬 금발의 여인이 검은 양복을 입은 장정 10여 명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또각- 또각-
30대 초반쯤 되었을까.
아름다운 외모에 여유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이 구두 소리를 내며 대련장에 들어왔다.
그러자.
두 스킬을 흡수한 검은 구슬이 두둥실 움직여 여인의 손아귀로 돌아갔다.
동시에.
지금까지 조용하게 있던 강철만이 고개를 숙이며 여인을 반겼다.
“오셨습니까, 셀리나 님.”
강철만뿐만이 아니었다.
지소영과 추성태, 그리고 서지환까지도 여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여인의 정체가 누구인지 물을 필요는 없었다.
한상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여인을 빤히 바라본 순간, 강철만이 미소를 띤 얼굴로 소개해 주었으니까.
“한상우 헌터님, 이쪽은 셀리나 칸데바. 디바인 실드의 수장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