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키운 캐릭터로 레벨업-104화 (104/169)

제104화

11장 별들의 세상(5)

휘이이이익-!

포탈을 통과하자 풍경이 바뀌었다.

대련장에서 커다란 격납고로.

조금 전에 포탈 너머로 봤던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고, 곳곳에는 포탈을 생성해놓은 기계와 전투기, 헬기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상우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본부가 꽤 넓네요. 이동 수단도 많고요.”

“전 세계를 누벼야 하니까요. 특히 방금도 경험하셨지만, 저기 보이는 포탈 개방 장치가 바로 저희 디바인 실드가 자랑하는 기술이에요. 먼 거리도 단숨에 이동할 수 있죠.”

“어디든 갈 수 있는 건가요?”

“근처에 중계기가 설치되어 있고, 좌표도 알고 있다면요. 그래서 개방적인 나라는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중국, 북한, 러시아 등 폐쇄적인 국가는 공간 이동이 제한되는 편이에요. 각 포탈을 열려면 최상급 마정석이 필요하고 쿨타임도 24시간으로 긴 편이지만, 디바인 실드에 입단하시면 질리도록 이용하게 되실 거예요.”

“그래서 이런 걸 보고도 다들 무덤덤한 거군요.”

헌터청 대련장에 갑작스레 셀리나가 등장하고 미국과 연결된 포탈이 생성됐음에도 SS급 헌터들과 최대천은 그리 놀란 눈치가 아니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익숙한 일이어서 그런 듯했다.

그렇게 한상우가 디바인 실드에 대해 조금씩 파악하는 와중, 걸음을 옮기면서 셀리나의 설명은 계속됐다.

“그럼 이동할게요. 이쪽은 각종 아이템을 이용할 수 있는 장비 창고이고, 저쪽은 마정석을 이용해 장비들을 개발하는 연구소예요. 여기는 미국과 세계 주요 도시 상황을 볼 수 있는 상황실이고요.”

격납고에서 캐비닛과 컨테이너들이 늘어선 창고를 지나고, 컴퓨터와 요원이 즐비한 상황실을 지날 때도 관광지 가이드를 하듯 일일이 소개해준 것이다.

그렇게 10분 정도 더 걸었을까.

“여기가 바로 신성력을 전수하는 수련실이에요.”

한상우는 높다란 문을 마주했다.

흡사 거대한 보스 방 같은 느낌.

하지만 그 안에 보스 몬스터는 존재하지 않았다.

조용히 따라오고 있던 경호원들이 셀리나의 말에 좌우로 흩어져 문을 열자.

끼이이익-

희미한 빛과 널따란 공간이 시야를 사로잡았다.

방보다는 홀이라고 부르는 게 적합할 것 같은 넓이.

“들어오시면 돼요.”

한상우는 셀리나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쿵-!

문이 닫혔다. 경호원들은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단둘이 남게 된 방 안.

한상우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직접 안으로 들어와 보니 홀이라기보다는 신전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합한 모습이었다.

아파트 3층 높이는 될 것 같은, 거대한 석상 20여 개가 좌우로 쫙 도열해 있었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어딘지 신성한 것 같기도 하면서 스산하네.’

묘한 공기가 홀 안을 감돌았으나, 계속해서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석상이 나열된 복도 끝에 셀리나가 왕좌처럼 보이는 의자에 앉더니 사뭇 진지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묻겠습니다. 신성력을 전수받고, 디바인 실드에 입단하시겠습니까?”

“…….”

한상우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디바인 실드와 그 수장, 셀리나 칸데바.

강철만을 비롯한 한국의 SS급 디바인 실드 단원들은 믿을 수 있지만, 아직 그녀를 온전히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전에 몬스터가 된 홍진성과의 대결에서 강철만이 보여준 신성력의 힘은 대단했다.

지금 한상우가 가진 [캐릭터 소환]의 힘과 더불어 신성력까지 손에 넣는다면, 당장의 힘은 물론이고 더욱 빠른 성장도 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니다 싶으면, 내 쪽에서 버리면 그만이다.’

자신에겐 신성력에 매달려야 할 이유는 없으나,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한상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

“알겠습니다. 잘 선택하셨어요.”

셀리나는 싱긋 웃으며 방의 가운데를 가리키더니.

“중앙에 가부좌로 앉아 계시겠어요?”

덜컥 한상우에게 앉을 것을 지시했다.

무엇을 하려는 건지는 금방 드러났다.

“그럼 신성력 전수를 시작하겠습니다. 대략 10분 정도 걸릴 거예요.”

“저는 뭘 하면 되죠?”

“주변이 어두워지고 몸 안에 무언가 들어오는 느낌이 있을 텐데, 그냥 앉아 계시면 돼요. 물론, 움직이고 싶어도 몸이 마음대로 안 움직일 테지만요.”

“가만히 있으면 된다는 얘기군요. 알겠습니다.”

“후훗, 해를 끼치는 건 아니니 안심하셔도 돼요.”

셀리나는 한상우에게 안심하라는 듯 웃어 보이더니 본격적으로 신성력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그럼 시작할게요.”

의자에 앉아 양팔을 팔걸이에 얹더니,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눈을 감은 것이다.

그러자.

후우우웅- 파앗-!

낮고 투박한 바람이 홀을 휘감더니 돌연 희미하게 빛나던 전등이 모두 꺼졌다.

칠흑 같은 암흑으로 변해버린 공간.

‘이거… 감각이 점점 무뎌지는군. 지금 나는 깨어 있는 건가? 아니면 꿈속?’

가부좌를 틀고 있던 한상우는 조금씩 자아가 희미해지는 걸 느꼈다.

처음에는 자각하지 못했다. 그저 시야만 어두워졌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오감이 희미해지자 알 수 없는 오묘한 느낌이 들었다.

한상우는 감각을 느끼려 손발을 꼼지락거리거나 말이라도 해보려 했지만,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셀리나가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라 얘기해주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한상우는 오감이 멀어진 상황에서도 최대한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그 사이, 셀리나는 스킬을 사용해 한상우의 움직임을 멈춘 상태로 한상우의 정신으로 들어갔다.

유령처럼 일렁이는 셀리나의 영체가 어둠 속을 유영하다가 한상우의 가슴팍에서 일렁이는, 작은 보라색 빛무리로 진입했다.

이제 이성에서 감정, 감정에서 본능, 그리고 본능에서 영혼의 영역으로 들어가 신성을 각인시키면 신성력을 채울 수 있는 그릇이 완성될 것이었다.

셀리나는 지금껏 해왔던 대로 차근차근 한상우의 내면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퉁-!

이번 여정은 시작부터 뭔가에 부딪히고 말았다.

이성을 통과하는 건 수월했는데 감정에서 본능으로 넘어가는 도중, 웬 흰색 막에 부딪혀 더 이상 내려가지 못한 것이다.

‘이건… 버프 스킬인가? 이렇게 깊은 내면에 자리 잡다니…. 이런 건 흔치 않은데 대단하네.’

셀리나는 깜짝 놀랐다.

감정 영역에 자리잡는 스킬은 좀처럼 보기 힘들고, 그 가치를 알아보는 이 또한 적은데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한상우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흰색 막의 정체는 일반적인 스킬이 아니라 군주의 특성인 [평정]이었지만, 셀리나는 그것까지 파악하지는 못했다.

‘견고하지만 위협이 되는 건 아니야. 최대한 색깔과 특성을 맞춰서 통과하면 돼.’

흰색 막을 살펴보니 특별히 공격적인 성향은 없는 듯했다.

셀리나는 정신력을 집중, 파동을 맞추어 색깔을 최대한 흰색 막에 가깝게 만든 다음 아래로 활강했다.

‘흐읍…! 휴우, 겨우 통과했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작업이지만, 장벽이 어찌나 단단하고 촘촘한지 몇 번이고 시도한 끝에 겨우 통과할 수 있었다.

그 뒤로 셀리나는 계속해서 하강했다.

본능에서 영혼으로, 그리고 영혼에서 근원으로.

그 과정에서도 몇 번이고 단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셀리나는 이를 악물며 근성을 발휘했다.

미로처럼 엉킨 길을 수없이 헤매고, 온몸이 짓이기듯 높은 압력이 가해지는 공간을 통과하는 등.

역대급 난이도 속에서 영체를 이동시켜 신성의 그릇을 새길 수 있는 지점까지 도달한 것이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밝은 빛을 발하는 구체 하나.

한상우의 근원이었다.

‘후후, 오는 길이 쉽지 않았지만…. 그럼 어디 한번 해볼까?’

셀리나는 근원에 신성을 각인하기 위해 영체의 손을 뾰족하게 만든 다음, 천천히 다가갔다.

그런데 근원의 코앞까지 다가간 그 순간.

-무엄하구나, 감히 대장의 근원을 훼손하려 하다니!

웬 분노에 찬 목소리가 어둠 속으로 울려 퍼졌다.

환청인가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다시 한번 근원으로 다가가려 하자.

-그릇된 믿음은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법. 이 이상의 침입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장님께 접근하려면 우리를 뛰어넘어야 할 거예요.

방금 들려온 것 외에도 다른 목소리들이 셀리나의 귓전을 때린 것이다.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부터 아리따운 여성의 목소리까지.

들려오는 음성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다.

그와 동시에.

붉은색, 푸른색, 금색 등 여러 색깔을 가진 영체들이 날아와 셀리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 이게 무슨…? 무방비해야 할 근원에 이를 지키는 다른 영체들이 있다고?’

셀리나는 당황스러웠다.

수없이 많은 헌터의 근원에 신성을 각인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근원을 지키는 영체들이라니.

셀리나는 고민에 빠졌다.

돌아가자니 한상우의 근원에 꼭 신성을 각인시키고 싶었고, 나아가자니 영체들의 경계심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정면으로 부딪치는 방법이 있었지만, 영체들의 기운이 너무 강해 이길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결국, 셀리나는.

‘여러분,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비켜 주시겠어요? 저는 한상우 헌터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신성을 각인하려는 거예요.’

회유를 선택했다.

무력을 행사하기엔 승산이 낮으니, 말로 설득해서 길을 터보기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근원을 지키는 수호 영체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외부의 도움은 필요 없다. 대장께선 가지고 계신 잠재력만 발휘하여도 세상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으시니까.

-달콤한 말은 상대를 현혹하지만, 그 끝이 씁쓸한 경우가 많죠. 거절하겠습니다.

나름 공손하게 그리고 영체들의 비위를 맞추며 눈치를 봤지만, 도저히 설득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들 뜻이 강고하군요. 어쩔 수 없네요. 알겠습니다, 돌아가도록 하죠.’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수호 영체들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근원에 다가가기란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셀리나의 영체는 천천히 떠올라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러고는.

쉬이이이익-!

순식간에 방향을 틀어 근원으로 돌격했다.

설득도 통하지 않고, 정면돌파는 승산이 없으니 기습을 통해 난관을 타개할 전략을 세운 것이다.

꽤 무모한 방법이지만, 이런 시도를 감수해야 할 정도로 한상우는 디바인 실드에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

갑작스러운 돌격에 수호 영체들은 머리 위로 날아가는 셀리나의 영체를 막지 못했다.

그 사이, 셀리나는 손아귀로 날카로운 단검을 소환해 신성을 각인할 준비를 했다.

많은 시간은 필요 없었다.

단 1초.

수호 영체들이 쫓아오더라도 근원에 이 단검만 꽂아 넣으면 나머지는 내재된 스킬이 알아서 할 것이었다.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온, 빛나는 근원.

셀리나는 단검을 역수로 쥐었다.

그런데 근원을 향해 단검을 내리찍으려던 그때.

푹-!

‘아…?’

웬 날카로운 물체가 등을 뚫고 가슴 앞으로 나와 있었다.

셀리나는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화살.

빛나는 화살이 몸을 관통해 있었다.

근원을 지키던 붉은빛의 영체가 활을 쏴 셀리나를 맞힌 것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셀리나의 영체가 파편화되어 흩날리기 시작했다.

실패로 돌아간 기습 작전.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셀리나는 마지막까지 남은 힘을 쥐어 짜내 단검을 내리꽂았다.

그런데 단검의 칼날이 근원에 닿으려는 순간.

-교활한 침입자에게…!

푸른빛의 영체가 날아와 단검을 쳐내고.

-처절한 응징을!!

황금빛의 영체가 쇄도해 셀레나의 영체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일변하는 시야.

[영체화 해제]

[신성 각인 실패]

“허억…! 커헉!!”

눈을 뜬 직후, 셀리나는 의자에서 내려와 피를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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