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화
11장 별들의 세상(6)
후두두둑-!
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 위로 시뻘건 피가 한 무더기 쏟아졌다.
동시에.
파앗-!
꺼졌던 조명이 켜지면서 홀 내부에 빛이 들어왔다.
원래대로 돌아온 건 조명만이 아니었다.
한상우도 눈을 뜨며 의식을 회복했다.
자아가 희미해질 정도로 멀어지는 감각 속에서, 어두컴컴하던 주변이 밝아지면서 시각적인 자극을 받자 정신이 돌아온 것이다. 몸도 움직일 수 있었다.
다만 의식이 돌아온 뒤로도 곧바로 사태를 파악하긴 힘들었으니.
“음…?”
“크헉! 콜록, 콜록…!”
분명 불이 꺼지기 전까지 멀쩡하게 의자에 앉아 있던 셀리나가 바닥으로 내려와 피를 토하고 있었다.
한상우는 서둘러 마나를 개방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주변에 적은 없어. 그렇다면 왜…?’
셀리나는 [신성 각인]에 실패하고 영체에 타격을 입어 피를 토하는 것이었지만, 그동안 무아(無我)의 상태에 빠져 있던 한상우는 전말을 파악하긴 힘들었다.
게다가 주위에 적으로 판단되는 존재도 없다 보니, 이게 의식의 일부인지 아닌지도 파악하기 힘들었다.
물론, 인간적으로 괜찮은지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다.
끼이이익-!
“세, 셀리나 님!!”
가부좌를 틀고 있던 한상우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 10여 명이 우르르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괜찮으십니까, 셀리나 님!”
“다, 당신, 무슨 짓을 한 겁니까!”
“……?”
셀리나를 보호하는 동시에 검을 뽑아 한상우를 포위했다.
CCTV를 보고 들어오긴 했지만 경호원들도 홀이 어두웠기에 구체적인 상황을 알 수 없었고, 같은 공간에 있던 유일한 외부인인 한상우를 의심한 것이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한상우는 의문을 품으면서도 경호원의 수를 파악하며 대응할 준비를 했다.
오해는 풀어야겠지만, 덤벼든다면 맞설 필요는 있었으니까.
그러나 다행히 정신을 차린 셀리나가 서둘러 상황을 정리했다.
“그, 그만! 한상우 헌터님은 아무 잘못 없어요. 다들 나가세요.”
“네? 하지만 셀리나 님, 지금 각혈을 하신….”
“당장, 나가라고요. 한 번 더 말하게 만들면… 징계를 내리겠습니다.”
“……!”
“아, 알겠습니다!”
셀리나의 경고에 경호원들이 헐레벌떡 혼비백산하며 나갔다.
바람처럼 지나간 소동.
[캐릭터 소환]을 준비하고 있던 한상우는 다시 닫히는 문을 바라보며 볼을 긁적였다.
그러자.
“미안해요, 한상우 헌터님. 본의 아니게 놀라게 한 것 같네요.”
셀리나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가의 피를 닦더니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사과했다.
불과 몇 분 사이에 부쩍 수척해진 듯한 모습.
한상우는 그녀의 모습을 약간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원래 신성력을 전수하는 게 꽤 힘든 일인가 보군요.”
“아뇨, 그건 아니에요. 지금 제가 타격을 입은 건… 신성 각인이 실패해서 그런 거예요.”
“신성 각인이요?”
“네, 들어보신 적 없을 테니 간단하게 설명해 드릴게요. 신성력을 쓰려면 마음 깊숙한 곳에 신성을 새겨야 해요. 그런데 한상우 헌터님의 마음 깊숙한 곳엔 특별하고 강력한 존재들이 있더군요. 최대한 우회해서 신성을 새겨보려 했지만… 오히려 제 영체가 공격당해 피해를 입고 말았어요.”
“아…. 그러셨군요.”
신성 각인, 특별한 존재, 영체 등.
생전 처음 듣는 용어였지만, 한상우는 어떤 상황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비록 셀리나가 어떤 방식으로 신성력을 전수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둠에 휩싸여 몸을 옴짝달싹할 수 없었을 때 어느 정도 느꼈기 때문이다.
어딘지 정확히 특정할 수 없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느껴지던 불쾌함과 그것을 몰아내는 해방감.
셀리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떻게 된 일이었는지 상황을 대강 알 것 같았다.
셀리나가 신성을 새기기 위해 마음속에 들어왔고, 캐릭터들이 그것에 대항해 내쫓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의지와 관계없이 캐릭터들이 나타나서 행동한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처음 각성했을 당시, 한상우의 위기를 느낀 땡길거야가 자동으로 소환됐을 때.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이번에도 한상우 안의 캐릭터들이 무언가 위기를 감지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일단 신성력 전수는 보류하는 게 좋겠군.’
하지만 셀리나는 한상우의 그런 생각과는 반대되는 말을 꺼냈다.
그녀는.
“그래서 말인데… 혹시 그 특별한 존재들과 엮여 있는 스킬을 추출하지 않으시겠어요?”
[신성 각인]을 막는 캐릭터들을 아예 없애길 원하고 있었다.
한상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스킬을 추출하다뇨?”
“저희 디바인 실드에서 연구하고 있는 장치 중에는 헌터의 스킬을 추출하는 게 있어요. 그걸 이용하면 사용자의 스킬을 추출할 수 있죠.”
“…그러니까, 제가 가진 스킬을 추출하겠다는 겁니까?”
“예, 맞아요. 무의식적으로 발동된 듯하니 컨트롤이 어려울 것 같고, 그렇다면 스킬을 추출해서 신성력을 받아들이실 수 있도록….”
“거절하겠습니다.”
“네?”
“거절하겠다고요. 디바인 실드 입단에 대한 이야기도 없던 이야기로 하겠습니다.”
한상우는 셀리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안을 거절했다.
길게 들을 필요도 없었다.
[캐릭터 소환]을 없애고, 신성력을 받으라니.
신성력이 강한 건 맞지만, [캐릭터 소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단적으로 홍진성과 전투만 돌이켜봐도, 녀석을 처치한 건 신성력의 힘으로 하얀 갑주를 입은 강철만이 아니라 [캐릭터 소환]을 사용한 한상우였다.
더군다나 [캐릭터 소환]은 아직도 성장의 여지가 있는 스킬로, 이제 겨우 보유하고 있는 캐릭터의 절반만 소환할 수 있는 상태다.
앞으로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강해질 수 있는데, 스킬을 제거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물론 이 사실을 모르는 셀리나는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 납득이 되지 않았는지 조금 더 말을 이어 나갔다.
“어째서죠? 지금 당신의 힘에 신성력이 더해지면, 세계에서 손꼽히는 헌터가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닐 텐데요.”
“신성력이 아무리 대단한 힘이라 해도, 제가 가진 스킬을 버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스킬을 추출하고, 더 강력한 다른 스킬을 주입한다면요?”
“…그 말은, 저에게서 스킬을 추출했다면 그 스킬도 다른 사람에게 주입할 수 있다는 뜻이군요.”
그 말에 셀리나의 동공이 흔들렸다.
셀리나의 설명을 듣자니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계속 나타났다.
한상우는 그 점을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파고들었다.
그러자.
“아뇨, 그건….”
셀리나는 금세 이전의 평온한 표정으로 되돌리고 무언가를 계속 말하려고 했으나, 한상우는 잠깐의 틈도 놓치지 않았다.
순간 그녀가 보인 흔들리는 동공과 커진 눈동자.
그 반응은 한상우가 셀리나에게 품고 있던 의문에 대한 대답이 되어주기에 충분했다.
“디바인 실드가 어떤 곳인지 잘 알았습니다. 신성력 전수와 입단 모두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한상우는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상우가 디바인 실드에 가입하고자 했던 이유는 세계 평화라는 단체의 투명한 목적과 성격, 그리고 추가적으로 얻을 수 있는 신성력이란 힘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힘은 캐릭터들이 경계하는 힘이며 스킬을 추출한다는 등의 뒤가 구린 행동까지 보였으니, 더 이상 함께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한상우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던 그때.
“100억 달러.”
“……?”
“스킬을 추출하고 신성력을 전수받으면서 디바인 실드에 가입하시는 조건으로 100억 달러를 일시불로 드리죠. 스킬도 원하시는 만큼 전수해 드리겠습니다. 어떠신가요?”
셀리나가 새로운 제안을 건네왔다.
제시한 금액은 무려 100억 달러.
한화로 환산하면 12조 원이 넘는 금액이었다.
대한민국에 있는 웬만한 대기업의 시가 총액에 맞먹는 수준의 돈을 스킬 추출 하나에 지불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원하는 스킬까지 모두 전수해 주겠다고 한다.
셀리나의 설득은 계속됐다.
“혹시나 스킬을 돈으로 사겠다는 식의 오해는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저는 한상우 헌터에게서 그 정도의 잠재력을 느꼈기에, 어떻게든 디바인 실드로 받아들이고 싶을 뿐이에요. 돈이나 스킬, 아이템 등 더 원하시는 게 있다면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셀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조금 전과 다르게 턱을 살짝 들고 조금은 의기양양해진 표정으로 한상우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이쯤 제안하면 분명 넘어올 거라 판단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의 기대와 다르게.
“안 합니다.”
한상우는 다시 한번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평정을 가장하던 셀리나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어째서죠?”
“당신이 무엇을, 얼마나 준다 해도 제 스킬은 그 이상의 가치가 있으니까요.”
“뭐라고요…? 저희가 제공할 수 있는 스킬들을 본다면, 생각이 바뀌실 텐데요?”
“아니요. 안 바뀝니다.”
더 이상 이야기할 것은 없었다. 한상우는 단호하게 거절한 뒤 등을 돌리고 말했다.
“평화 유지를 위한 활동이 필요하다면, 강철만 헌터를 통해 소통 후 협력하도록 하죠.”
셀리나는 무언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돈, 스킬, 아이템 등 디바인 실드가 가진 모든 것을 제시했음에도 눈 깜빡하지 않았고, 한상우의 마음이 완전히 돌아서 이젠 대화마저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추천은 감사하나, 거절하죠. 저는 그만 가 보겠습니다. 영체에 입은 피해는 조속히 회복하시길.”
“…….”
한상우는 마지막까지 뒤에서 느껴지는 셀리나의 차가운 침묵을 무시하며, 홀 내부를 걸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 몇몇이 셀리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어떡할까요, 셀리나 님. 저희가 설득해 볼까요?”
“전시관에 가서 신성력의 위대함을 보여주면 마음이 달라질지 모릅니다.”
“아뇨, 보내주세요. 이미 마음이 돌아서서 저희 말은 들리지도 않을 거예요.”
경호원들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냈지만 셀리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문을 나서 격납고 쪽으로 걸어가는 한상우의 뒷모습을 보며 말을 이었다.
“대신… 계속해서 예의주시하세요.”
“지켜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언젠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강한 존재를 맞닥뜨리게 되면… 분명 신성력을 찾게 될 테니까요.”
은은한 조명이 석상들을 비추는 공간.
셀리나의 얼굴 위로 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