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12장 그릇된 믿음(2)
헌터가 된 이후, 나는 황당한 일들을 제법 많이 경험했다.
몬스터가 말을 했다던가, 던전 안에서 NPC 같은 사람들을 만났다던가, 하이어에서 봤던 몬스터들이 현실 던전에서 똑같이 존재했다던가.
일반적인 헌터라면 쉽게 겪을 수 없는 일들을 여러 차례 경험해온 것이다.
게다가 마음을 안정시켜 주고, 각종 정신 공격을 차단하는 [평정]도 있어서 이젠 웬만큼 특이한 일이 발생해도 쉬이 놀라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이곳, 신성의 힘 던전에서 겪는 일은 여러모로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왜냐고? 그 이유는 내가….
“이방인 형제님, 식량은 많으니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드시길 바랍니다.”
“맞습니다. 밥값도 받지 않으니 염려하지 마시고요.”
몬스터들과 같이 밥을 먹게 됐기 때문이다.
[광신의 성기사(SS)]
주변에 빼곡한 인식표.
나는 지금 수십 명에 달하는 성기사 몬스터들과 함께 숲속 한가운데에 마련된 야외 급식소에서 배식을 위한 줄을 서고 있었다.
레이드를 하러 온 마당에 몬스터와 함께 있고, 그것도 모자라 배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니.
사건의 발단은 다음과 같다.
찢어진 일기장을 발견하고, 퀘스트를 갱신한 직후 등장한 성기사 무리.
녀석들이 나왔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놈들과 싸우려고 했다.
성기사들이 빛바랜 망자들의 왕이나 용족 군단장처럼 언어를 구사하긴 했으나, 머리 위에 인식표를 띄운 몬스터라 전투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처음 만났을 때는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했고.
그래서 기습의 낌새를 보이면 바로 전투를 개시하려 했는데.
-이런, 실례했습니다. 행색을 보아하니 이방인 같은데… 혹시 신을 믿으십니까?
-모르겠군. 그게 무슨 상관이지?
성기사는 알 수 없는 말을 던져댔고, 내가 짧게 대답하자 검을 거두더니.
-호오, 전도가 필요한 우민이었군요.
-그러게 말이오. 아직 눈이 뜨이지 않긴 했으나, 검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장차 성기사가 될 재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희와 함께 가시죠. 식사를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신에 대한 이야기는 천천히 나누어 보시죠.
나와 다크어둠을 자신들의 본거지로 안내했다.
몬스터가 공격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의 본진으로 안내해서 식사를 대접하다니.
기존의 던전과는 너무나도 달라 어안이 벙벙해지는 상황.
비록 그들이 머리 위에 인식표가 뜬 몬스터고, 던전이라는 특성상 놈들을 처치해야 하는 건 맞지만 나는 성기사를 따라가며 잠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교주를 처치하여 망자의 한을 풀어주세요(0/1)]
[주의 : 성기사를 10명 이상 처치할 경우, 해당 던전의 클리어는 실패 처리되며 자동으로 퇴출됩니다.]
퀘스트 메시지 하단에 뜬 주의 문구 때문이다.
이번 던전은 특이한 페널티가 붙었는데, 바로 몬스터인 성기사를 10명 이상 처치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처치해야 하는 몬스터의 수에 제한이 걸려 있다니.
이제까지는 몬스터라면 다 때려잡으면 됐지만, 이번 던전은 이전과 그 궤가 달랐다.
몬스터 처치 제한뿐만이 아니었다.
보스 몬스터의 명칭 역시 정확하게 ‘교주’라고 지칭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조건으로 나는 대번에 눈치챘다.
이번 던전의 포인트는 성기사는 되도록 죽이지 않고, 교주를 찾아내 처치하는 것이었다.
마치 클리어 조건이 붙어 있는 RPG게임 같은 방식이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여러 게임을 섭렵한 내겐 요점을 알아채는 게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 알아채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이걸 바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마스터, 전부 죽일까요? 다들 식사에 정신이 팔려 허점투성이입니다.
있구나….
‘내 명령이 있기 전까진 싸우지 말도록.’
나는 식판을 든 채 내 뒤에 바짝 붙어 서 있는 다크어둠에게 명령을 내렸다.
다른 캐릭터들은 소환을 해제했으니 다크어둠만 잘 관리한다면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듯했다.
나는 다크어둠을 데리고 성기사들을 따라 배식판에 요리를 담은 뒤, 테이블에 앉아서 먹기 시작했다.
메뉴는 빵과 수프, 그리고 소고기 몇 점이 다였는데 맛이 나쁘진 않았다.
사람의 행색이긴 하나 몬스터로 분류된 놈들이 만든 것이라 맛이나 위생에서 괜찮을까 했는데 큰 흠은 없었고, 우리가 평소 먹는 것과 똑같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기에 나는 빵만 깨작깨작 먹으며 곁눈질로 교주를 찾아봤다.
마음 같아선 당장 캐릭터들을 시켜 교주를 찾아내 처치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칫 주변에 깔린 성기사들에게 어그로가 끌려 전투라도 벌어지면, 죽이지 않고 제압하기는 불가능했기에 무리한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수색하고 싶어도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
“자, 이제 식사를 마쳤으니 검술 훈련 시간이로군.”
“이방인이 따라 하기엔 무리가 있을 터이니, 오늘은 그냥 참관만 해도 괜찮네.”
“그러도록 하죠.”
다크어둠과 나는 성기사들의 안내를 받아 야외 배식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훈련장으로 이동했다.
나무들을 베어내 만든 공터.
“자, 구령에 맞춰 위에서 아래로 휘두른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수십 명의 성기사들은 오와 열을 맞춰 대열을 정비하더니, 교관의 구호에 맞춰 검을 휘둘렀다.
나는 다크어둠과 함께 공터 바깥에 서서 그 모습을 구경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검술 훈련인데, 머리 위에는 몬스터를 뜻하는 인식표를 달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주 이상한 곳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러한 감상이 깨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검술 훈련 시간이 끝난 후.
성기사들은 근처에 있는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숲의 높다란 나무에 가려져 발견하지 못했지만, 근처에 작은 마을이 있었던 것이다.
나도 다크어둠과 함께 성기사들을 따라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오늘 새로운 형제들이 오셨다고 하니, 신성의 힘이 존재한다는 간증을 보여 드리도록 하죠.”
웬 외팔의 기사가 단상에 올라오더니, 우리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단상 위에 놓인 커다란 종 앞에 서서 높게 뛰었다.
대체 뭘 하려는 것일까.
의문은 금방 해소되었다.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외팔 기사가 제자리에서 뛰고 착지한 순간.
쩌엉-!!
돌연 종에서 굉음이 울리더니 그대로 두 동강 나버린 것이다.
게다가 갈라진 종 뒤로 서 있는 기사는 더 이상 외팔이 아니었다.
분명 한쪽 팔이 존재하지 않았건만 제자리 점프 후, 빛으로 일렁이는 의수가 생겨났다.
외팔 기사가 연설을 시작했다.
“저는 북부의 전장에서 마족과 수년을 싸우다 한쪽 팔을 잃었습니다. 기사에겐 사형 선고와도 같은 일이었죠. 하지만 요양차 내려온 이곳에서 신을 영접하고, 제 인생은 다시 찬란하게 꽃피기 시작했습니다. 신성의 힘을 깨우친 후, 신성의 팔을 만들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울리는 듯한 뜨거운 목소리가 예배당을 울렸다.
외팔 기사는 계속해서 간증을 이어나갔다.
“친구들은 말했습니다. 모든 게 포기하지 않는 제 의지 덕분이라고! 그러나 아닙니다! 이것은 광신께서 저를 굽어살펴 주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믿으십시오. 믿으면 신성의 힘을 깨우칠 수 있고, 신성의 힘을 깨우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오오오오!!”
예배당의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외팔 기사의 간증이 끝나자.
“오오,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멸망에 이르는 세상을 구원하고 인간의 원죄를 씻어주실 광신이시여!!”
“제게도 신성의 힘을 내려 구원으로 이끌어 주소서!!”
곳곳에서 절박한 외침이 쏟아졌다. 얼마나 절실한지 몇몇은 정신이 완전히 나간 듯 알아듣기 힘든 방언까지 내뱉었다.
조금 전, 밥을 먹고 훈련을 할 때와는 180도 달라진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광신도의 외침이 침습합니다.]
[예비 광신도의 찬양이 침습합니다.]
[군주의 특성, 평정이 발동합니다.]
[광신도의 외침에 저항합니다.]
[예비 광신도의 찬양에 저항합니다.]
여러 디버프들이 침습했지만 나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이것 참, 적응하기 어렵네. 대체 교주는 언제 나오는 거야?’
예배당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교주의 흔적을 쫓았다.
이번 던전의 목표는 교주를 처치하는 것이고, 디버프는 [평정]으로 면역이 되기에 주변에서 난리를 피워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다만 다크어둠은 조금 우려가 되긴 했는데,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마스터, 여기 의자 밑에, 미라 근처에서 발견했던 것과 같은 기운을 가진 종이가 있습니다.
다크어둠도 나와 마찬가지로 퀘스트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나보다 더 좋은 눈썰미로 퀘스트 아이템까지 발견해냈다.
나는 다크어둠이 건네주는 종이를 받으며 전언을 보냈다.
‘잘했어, 다크어둠. 그런데 넌 저 말 안 믿겨? 신기하잖아, 신성의 힘이라니. 마치 정말로 신이 존재하는 것 같은데.’
-전혀요. 제가 믿는 건 오직 마스터밖에 없습니다.
기특한 자식.
사실 다크어둠도 만렙이라 디버프에 저항하는 것일 테지만, 그래도 나만 믿는다고 하니 듣기는 좋았다.
나는 피식 웃은 뒤, 다크어둠이 찾은 종이를 바라봤다.
형식을 보니 미라 옆에 있던, 찢어진 일기의 일부인 듯했다.
<속았다. 간증을 보고 내 전 재산을 다 갖다 바쳤는데, 신성의 힘은 얻을 수 없었다. 항의하자 돌아오는 답은 제물과 믿음이 부족하다는 말뿐이었다. 오, 광신이시여. 정녕 제 전부를 가지고도 부족하단 말씀이십니까. - 07. 25. 클라코>
날짜를 보니 숲에 있던 것보다 과거였다.
미라는 아무래도 이곳에서 간증에 넘어가 전 재산을 바친 듯했다.
그때, 일기의 내용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외팔 기사가 단상 위에서 격정적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일 새벽에 오실 교주님께 무구, 현금, 보석 등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바치십시오. 그럼 신성의 힘을 깨우치게 될 겁니다!!”
간증 말미, 신성의 힘의 위대함을 설파하며 제물을 바칠 것을 종용한 것이다.
그러자 그 뒤로.
[망자의 한을 추가로 발견하였습니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이 완화됩니다.]
[교주를 처치하여 망자의 한을 풀어주세요(0/1)]
[교주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는 물품을 습득하세요(0/1)]
[교주의 힘을 약화시키는 물품은 예배당 숙소 내에 있습니다.]
[주의 : 성기사를 50명 이상 처치할 경우, 해당 던전의 클리어는 실패 처리되며 자동으로 퇴출됩니다.]
퀘스트의 조건이 완화되면서 공략법까지 알려주었다.
마치 구원을 바라는 영혼이 내 주위를 맴돌며 도와주는 듯한 기분.
아무래도 이곳은.
광기에 찬 아픔이 잠든 곳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