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13장 기지개(1)
‘후우, 오늘도 출근이구나.’
오전 8시, 서울역 사냥터 아이템 거래소의 로비.
한 중년 남성이 매장 앞에서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이름은 양병석.
나이는 67세로 매입을 전문으로 하는 아이템 매장에서 근무하는 직원이다.
주 업무는 헌터들이 던전에서 가져오는 아이템을 매입하고 경매에 올리는 것.
중후한 외모에서 유추되는 나이만 보면 대형 아이템 거래소의 임원쯤 될 것 같지만, 그는 평범한 매니저였다.
물론, 이력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양병석은 7년 전까지는 공무원이었다.
그러나 정년을 채워 퇴직하게 되었고, 막상 밖에 나오니 채용해주는 회사도 없어 2년 정도 직장을 찾다가 아이템 거래소의 매니저가 되었다.
처음에는 소일거리 정도로 생각했으나 의외로 벌이도 괜찮았고 동료 직원들과도 좋은 관계가 형성돼 나름대로 보람을 느끼며 일을 하고 있었다.
다소 어렵고 낯선 부분들도 있었지만, 처음부터 다시 배운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하니 두려울 건 없었다.
그런데 세상에 쉬운 일 하나 없다고 했던가.
그런 그도 한숨 나오게 하는 일이 있었으니.
바로 진상 상대였다.
사실 이건 어딜 가나 있는 문제였다. 사무직이더라도 거래처나 직장 동료 중에 진상은 존재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곳, 아이템 거래소의 진상은 헌터라는 점이었다.
주 고객의 등급이 D급에서 F급으로 높은 편은 아니지만, 일반인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강하기에 물리적으로는 상대도 안 되는 것이다.
매너가 없고 불합리하더라도 헌터를 절대로 자극하지 말 것.
이건 매니저들이 교육을 받을 때, 첫 번째로 배우는 내용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생각으로 대들었다간 진상 헌터에게 해코지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 도의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잘못된 일이지만 헌터는 경제적으로 풍족한 경우가 많아 범죄를 저지르고도 대형 로펌의 변호사를 고용해 처벌을 솜방망이로 깎는 경우가 많다.
자칫 시비가 붙어 몸이라도 상하면 피해자가 무조건 손해이니 숙이고 들어가는 게 최선이라는 것이다.
사실 양병석에게 이런 일은 아이템 거래소의 매니저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와닿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막상 근무를 해보니 절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최근 주기적으로 매장에 와서 진상을 부리는 헌터가 생겨버린 것이다.
‘오늘도 그놈이 또 올 텐데, 그것만 생각하면 왜 이렇게 심장이 뛰는지…. 하아, 그래도 출근은 해야겠지. 부디 오늘도 무사히 지나가길.’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양병석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 뒤에 매장으로 들어갔다.
이번에 대학에 입학한 막내딸의 등록금을 생각하면 돈을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근무 환경이 나쁜 건 아니었다.
“어서 오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양 매니저님!”
“하하, 좋은 아침입니다. 다들 오늘도 일찍 왔군요.”
매장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출근한 젊은 직원들이 밝은 미소로 맞이해 주었다.
자신의 나이가 많아 불편하게 생각할 수도 있건만, 매사에 적극적이고 친절해 양병석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래, 어린 친구들도 열심히 하는데 내가 우울하게 있으면 안 되지.’
“믹스 커피 마실 건데 드실 분 있나요?”
“넵! 저 마시겠습니다, 매니저님.”
“저도요!”
양병석은 젊은 동료들에게 커피를 타 주며 활기차게 하루를 시작했다.
그러자 긍정의 기운이 작용한 것일까?
“안녕하세요, 지금 영업하나요?”
“예, 방금 막 시작…. 엇! 어서 오십시오, 헌터님. 오랜만에 찾아 주셨군요.”
오늘의 첫 손님으로 한때 단골이었던 헌터가 찾아왔다.
언제나 필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고, 마지막 방문 때는 적지 않은 팁도 줬기에 기억에 남는 인물이었다.
양병석은 방금까지 있던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리고 단골이었던 헌터를 맞이했다.
그러자.
“저 기억하시나요?”
서울역 아이템 거래소의 단골이었던 손님, 한상우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양병석도 환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당연하지요. 헌터님처럼 친절하신 분들은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하루에도 수십 명씩 고객 응대를 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한상우는 No. 12 던전을 클리어하고 처음 방문해 아이템을 팔았을 때처럼 테이블 앞에 앉았고, 양병석도 늘 그랬던 것처럼 웰컴 티를 내오며 물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방문하신 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팔고 싶은 아이템들이 있어서요. 고등급에 양도 많은데 혹시 처리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오랜만에 찾아주신 만큼, 맡겨만 주신다면 최고가에 수수료도 최저로 해서 매입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아이템 올리겠습니다.”
한상우는 메고 온 가방을 들어 지퍼를 열고 테이블에 쏟아부었다.
그러자.
후두두두둑-!
안에서 수많은 아이템이 우르르 쏟아져나왔고.
“헉!!”
양병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단검, 활, 마정석 등.
한상우가 내놓은 아이템이 양은 많지 않았으나 한눈에 봐도 고등급이라는 걸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때깔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닌 듯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영업 시간이 맞는지 몰라서 차에 두고 온 아이템들도 있거든요.”
“예, 예! 괜찮습니다. 다녀오십시오!”
한상우는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며 용량이 큰 더플백들을 매장에 들여놓았다.
그리고 더플백의 개수가 10개가 되자 하나둘씩 테이블 위에 풀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펼쳐진 진풍경.
“와…. 미쳤다. 저게 다 얼마야?”
“양 매니저님, 오늘 대박나신 거 같은데요? 저 손님 매물 장난 아니네요.”
매장 안에 있던 다른 매니저들도 입을 쩍 벌리며 구경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이템 매입을 전문으로 하는 이들이라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상우가 내놓는 아이템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아이템을 감정하는 양병석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고급 등급부터 희귀 등급까지.
한상우가 쏟아붓는 아이템은 하나같이 등급이 높았는데, 심지어 몇몇 아이템은 전승 등급이었다.
게다가 마정석 역시 대부분 중급 이상으로, 가격을 다 합치면 못해도 300억 원은 족히 넘을 것 같았다.
양병석은 아이템을 감정하다 말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 이게 다 어떻게 된….”
“그동안 사냥하면서 조금씩 모은 아이템들입니다. 그간 워낙 바빠 방문을 못 했는데, 하는 김에 한 번에 처리하려고 모았습니다.”
테이블 위에 쌓은 아이템의 정체는 한상우가 레이드를 돌며 모은 아이템들이었다.
그간 일들이 정신없이 몰아닥치다 보니, 급전과 마나포션이 필요할 때만 가까운 거래소에서 최소한으로 거래를 해왔다.
혼자서 한 번에 너무 많이 팔면 의심을 살 수 있기에 적정량만 팔았는데, 남는 아이템이 쌓이다 보니 처리하기 곤란할 정도로 많아진 것이다.
하여 한상우는 서울역 사냥터에 있는 아이템 거래소로 왔다.
이곳에 있는 중년의 매니저는 입이 무겁다는 걸 이미 경험했기에 다른 이들에 비해선 그나마 신뢰할 만했기 때문이다.
한상우는 품에서 헌터증도 꺼내 양병석에게 건네주었다.
“여기 제 헌터증입니다. 라이센스가 바뀌어서 매입 출처는 이걸로 처리해야 하실 거예요.”
“……!”
헌터증을 받아든 양병석은 눈을 더 휘둥그레 떴다.
S급 헌터, 한상우.
헌터증을 건넨 인물의 등급이 F급에서 S급으로 상승해 있었다.
사실 이전, 한상우가 처음 왔을 때 F급 헌터라는 건 양병석도 알고 있었다.
아이템을 매입할 때는 판매자의 인적사항을 기재해야 하니까.
다만 가져오는 아이템들이 F급 혼자 얻기에 고등급이란 생각은 했으나, 다른 파티가 있어서 그렇겠거니 하고 말았다. 굳이 묻는 것도 좋아할 것 같지 않았기에 입밖에 내지도 않았고.
그런데 그런 한상우가 단기간에 S급이란 엄청난 성장을 이뤄 돌아온 것이다.
양병석은 당황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이, 이거 제가 감히 처리해도 되는 아이템인지 모르겠습니다, 헌터님.”
“그냥 평소처럼 해주시면 됩니다. 부담가지지 않으셔도 돼요.”
“아, 아닙니다! 헌터님께서 맡겨주시는 일인데 완벽하게 해야지요! 최대한 조용하게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신을 믿고 찾아온 고객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양병석은 빠르게 움직였다.
“다들 혹시 잠깐 도와줄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이템을 창고로 빠르게 옮겨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양 매니저님! 도와드릴게요!”
주변에서 구경하던 매니저들에게 아이템을 창고로 옮겨줄 것을 부탁했다.
그 사이, 양병석은 휴대용 스캔기를 이용해 한상우가 내놓은 아이템들의 정보를 빠르게 스캔하고 매니저들에게 넘겼다.
잠시 후면 고객들이 몰려올 시간이라 이목이 더 집중될 수 있으니, 그 전에 매물을 창고로 옮겨서 처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사실 여기서 더 조용하게 처리하려면 아이템도 자신이 옮기는 게 좋겠지만, 그러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그리고 판매자 정보는 어차피 자신이 발설하지만 않는다면 다른 매니저들은 자신의 고객을 확인할 수 없는 구조라 불안해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양병석은 한상우의 아이템 목록을 작성하고, 다른 매니저들은 아이템을 들고 창고로 간 그때.
후우우웅-
“어이, 빨리빨리 안내 안 해? 새끼들이 아침부터 빠져가지고 말이야!”
자동문이 열리더니 40대 남성 고객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190cm에 달하는 키에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
‘크, 큰일 났다!’
고객을 발견한 순간, 양병석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A급 헌터 장용진.
근래 이곳에서 진상을 부리는 헌터인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아침부터 시작인 듯했다.
설상가상 동료들은 자신을 도와주느라 창고로 간 상황.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헌터님?”
“예, 괜찮습니다.”
양병석은 한상우에게 허락을 받고, 장용진에게 다가갔다.
“어, 어서 오십시오, 장용진 헌터님. 잠시 대기석에서 차 한잔하며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먼저 온 손님이 계셔서, 응대가 끝나는 대로 바로 도와드리겠습니다.”
“뭐? 야! 너, 나 몰라? 벌써 까먹었어? 내가 여기 사장이랑 얼마나 친한데! 팔아준 걸 생각하면 VIP 대접은 못 할망정, 기다리라고? 어!?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여?”
매장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고성이 울려 퍼졌다.
양병석은 대체 아침부터 왜 이러나 싶었지만, 장용진에게 가까이 다가간 순간, 이유를 깨달았다.
‘윽, 술 냄새…!’
아침부터 무슨 술을 얼마나 퍼마신 건지 몰라도, 근처에 있기만 해도 취기가 올라오는 것 같을 정도로 알코올 냄새가 진동했다.
한마디로 술에 거나하게 취해 행패를 부리는 것이었다.
심지어 이 불똥은 한상우한테까지 튀었다.
장용진은 비틀거리며 한상우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가더니 아이템을 하나씩 집어보며 평가하기 시작했다.
“뭐 이딴 쓰레기 같은 아이템 몇 개 판다고 거래소까지 방문해? 하여튼, 코딱지만 한 거래소니까 이런 허접들밖에 안 오는 거지, 킥킥!”
한상우가 올려놓은 아이템 중 비싼 것들은 동료 매니저들이 이미 운반했기에 남은 아이템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것밖에 없었다.
물론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양이 많아 전체적인 가격으로 따지자면 만만히 볼 게 아니었지만, 술에 취한 장용진은 그런 걸 계산할 정신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 진정하십시오, 장용진 헌터님. 저기 대기석이 있으니 앉아서 잠시 휴식을….”
“뭐? 대기석? 내가 여기 VIP인데 감히 찬밥 취급을 해? 안 되겠다, 너 같은 새끼는 교육 좀 받아야 돼. 사장 불러, 사장!”
인성도 개판이었다.
장용진을 대기석으로 안내하기 위해 양병석이 가까이 다가오자 손을 들어 때리려는 듯 위협까지 한 것이다.
아니, 위협이 아니었다.
처음엔 시늉만 했지만, 장용진은 곧 이성을 잃고 진짜로 양병석의 머리를 향해 손바닥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걸 본 순간.
“……!”
양병석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비록 손바닥이지만 A급 헌터에게 맞으면 어떻게 될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양병석은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장용진의 손바닥이 양병석을 얼굴에 닿으려던 그때.
퍽-!
“커헉!!”
콰아아앙-!!
뭔가가 쇄도해 장용진을 벽면의 진열장에 처박아 버렸다.
“헉! 헌터님…?”
코앞에서 들려온 굉음.
양병석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화들짝 놀랐다.
장용진의 공격적인 행동에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떠 보니 누군가 장용진을 밀어내고 자신의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장용진을 밀쳐낸 사람은 다름 아닌.
“그래, 해줄게. 네가 좋아하는 교육.”
의자에 앉아 있던 한상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