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13장 기지개(6)
‘만렙 캐릭터가 아니긴 한데 뭐, 괜찮아. 이제는 누가 나와도 상관없으니까.’
만렙 캐릭터가 아닌 부캐의 등장.
하지만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지금은 급박한 상황이 아니라 반드시 나와야 하는 캐릭터가 없기도 하거니와 제장이를 제외한 다른 부캐들도 짬짬이 시간을 내 제법 키워뒀기 때문이다.
연금술사의 레벨은 682.
만렙이 아닐 뿐이지 헌터로 치자면 SS급을 넘어 SSS급인 수치고, 제장이보다도 높으니 효용성은 충분했다.
그리고 저레벨일 때와 달리 나도 레벨이 꽤 오르기도 했고, 땡길거야와 다크어둠, 매직킹도 있는 이상 만렙 캐릭터에 꼭 집착할 필요는 없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연금술사가 지금의 나에게는 더 필요한 존재라고 볼 수도 있다.
연금술사를 심심풀이로 키웠던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나는 분홍 머리칼의 소녀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환영 인사를 건넸다.
“만나게 반갑다, 연진아.”
“저도 반가워요, 사장님!”
연진.
연금술사가 아이템 등을 제작할 때 땅에 그리는 마법진, 연성진에서 가운데 글자 ‘성’만 빼고 지은 닉네임으로 대충 지었지만 나름 천진난만한 소녀와 잘 어울렸다.
나는 연진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왜 날 사장님이라고 부르니?”
“저한테 대빵은 사장님이니까요! 불편하시면 다른 호칭으로 불러드릴까용? 뭐가 좋으세요? 회장님? 단장님? 아니면 두목님?”
“…그냥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게 제일 낫겠구나.”
“히히, 그렇죠?”
잡화점의 딸이어서 그런 걸까.
연진이는 해맑고 싹싹했다.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는 소녀로, 하이어 내에서도 밝고 친절한 성격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성격은 다른 캐릭터와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는 듯했다.
“만나서 반갑구나, 어린 연금술사여. 네가 만들어준 포션은 기사들과 함께 잘 쓰고 있다. 실력이 훌륭하더군.”
“헤헤, 아니에요! 수호 기사님께서 좋은 재료를 가져다주셔서 좋은 포션이 나온 거죵!”
[두 캐릭터를 동시에 소환했습니다.]
[캐릭터 간의 상성에 따라 동시 소환 효과가 발생합니다.]
[수호 기사 – 연금술사]
[동시 소환 효과 – 상생 : 수호 기사와 연금술사는 상생하는 관계입니다. 동시 소환으로 수호 기사의 버프 효과가 5% 상승합니다. 연금술사는 자긍심을 얻어 모든 스탯이 5% 상승합니다.]
연진이의 밝은 성격 때문인지는 몰라도 수호 기사와 연금술사의 관계는 상생이었다.
소환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만렙 캐릭터인 땡길거야를 더욱 강하게 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싹싹한 성격은 레이드에도 도움이 되었다.
“어라? 바닥에 아이템들이 널브러져 있네요? 제가 주울게용, 사장님!”
쌍둥이 샐러맨더와 잡몹들을 처치해 드랍된 아이템들.
연진이는 보스 방엔 널브러진 아이템들을 보고 달려가더니 웬 바구니를 소환해 하나둘 담기 시작했다.
따로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일을 찾아서 했다.
주변 분위기가 밝아질 정도로 열정 넘치는 연진이의 모습은 땡길거야도 절로 움직이게 만들 정도였다.
“솔선수범해야 하는 기사로서 가만히 있기 힘들군요. 잠시 돕고 오겠습니다, 주군.”
“그래. 수고해줘, 땡길거야.”
나는 비전투 모드로 전환해 아이템을 습득하는 두 캐릭터를 흐뭇하게 바라본 뒤, 보스방 끝의 벽에 붙어 있는 수정 구슬로 다가갔다.
이번 던전의 출구 포탈은 수정 구슬을 깨야만 생성되기 때문이다.
까강-! 쨍그랑-!!
[출구 포탈이 생성되었습니다.]
그런데 화산검으로 수정 구슬을 깨고, 출구 포탈을 생성시키던 그때.
“우와! 이건 영웅 등급 아이템이에요, 사장님!!”
띠링-!
[연금술사의 히든 연계 퀘스트 발생 조건을 달성했습니다.]
[연금술사의 히든 연계 퀘스트 발생 조건]
[영웅 등급 이상 아이템 발견하기(1/1)]
[조건을 달성하여 연금술사의 히든 연계 퀘스트가 부여됩니다.]
연진이의 감탄이 들려오더니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각 캐릭터별로 한 번씩 발생하던 히든 연계 퀘스트였다.
숨겨진 조건을 찾는 건 캐릭터들마다 다르긴 했지만 연진이는 제장이 때처럼 빠르게, 그리고 스스로 찾아냈다.
“영웅 등급 아이템?”
“사장님, 사장님 이거 보세요! 이거 완전 좋은 거 같아용!”
연진이는 어느 틈에 내 바로 앞까지 달려와 있었다.
나는 연진이가 건네는 아이템을 받아들었다.
그 영웅 등급 아이템은 다름 아닌.
[샐러맨더의 가죽 장갑]
[등급 : 영웅]
[효과 : 공격력 + 10, 방어력 + 20]
[패시브 스킬 : Lv 1. 화염 강화 – 화염 계열 공격력이 +3% 상승합니다.]
[패시브 스킬 : Lv 1. 화염 내성 – 화염 계열 저항력 +1을 획득합니다.]
검붉은 색깔의 장갑이었다.
이름과 등급으로 보건대 보스인 쌍둥이 샐러맨더가 드랍한 아이템인 것 같았다.
무려 영웅 등급에 준수한 능력치까지.
공격과 방어가 적절히 분배되어 있고, 화염 속성 던전의 드랍템답게 화염 공격력과 저항력을 상승시켜 주는 옵션이 붙어 있었다.
이 정도면 거래소에서도 고가에 매입할 게 분명했지만, 아예 내가 직접 쓰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쓸 만한 것과는 다르게 이 아이템은 금방 사라져야 할 운명이었으니.
[연금술사의 히든 연계 퀘스트]
[습득한 아이템 분해 후, 합성하기(0/1)]
연금술사의 히든 연계 퀘스트가 방금 습득한 아이템을 분해하고 합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분해와 합성.
[스킬 : Lv 1. 분해 – 아이템을 분해하여 아이템 합성의 소재를 얻습니다. 마나 20 소모.]
[스킬 : Lv 1. 합성 – 분해된 두 개의 소재 아이템을 하나로 합쳐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어냅니다. 새로운 아이템의 등급은 소재가 되는 아이템의 등급에 따라 달라집니다. 마나 50 소모.]
이게 바로 많은 이들이 연금술사를 부캐로 키우는 이유다.
연금술사가 500레벨대에 배우는 이 스킬은 아이템을 분해하고 합성해서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 수 있는데, 종종 대박이 날 때가 있다.
물론, 무조건 더 좋은 아이템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운이 좋으면 소재가 된 아이템보다 한 등급 높은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지만, 보통은 아무 변화 없이 동급 아이템이 나온다.
예를 들어 고급과 희귀 아이템을 합성하면 고급에서 전승 등급까지의 아이템을 얻을 수 있지만 전승 등급이 나올 확률은 굉장히 희박하다.
게다가 장비 아이템을 분해해서 소재 아이템으로 바꾸면 그 장비 아이템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기에 고등급 아이템은 분해하기가 꺼려지고, 합성한 결과물의 옵션이나 스펙도 내가 정할 수 없다.
이런 점 때문에 하이어가 과금 유도가 심하다고 욕을 먹는 것이다.
보통 다른 게임은 아이템 두 개를 바로 합성할 수 있는데, 하이어는 굳이 분해라는 시스템을 만들어서 좀 더 과금을 유도하는 것이다.
그래도 이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극악의 확률이긴 해도, 간혹 가다가 고등급 아이템이 나올 때의 쾌감과 두 아이템을 합친 것 이상의 옵션을 얻을 수도 있다는 이점이 있어 많은 유저들이 연금술사를 키운다.
대장장이도 고레벨이 되면 분해와 합성을 습득하긴 하지만 800레벨대로 상당한 고렙이 되어야 하는 반면, 연금술사는 500레벨이면 배울 수 있기 때문에 보통은 연금술사의 육성을 더 선호한다.
효율성 자체도 연금술사가 더 높고.
어쨌든 샐러맨더가 드랍한 이 장갑은 분해의 운명을 맞이해야 할 듯했다.
“고맙다, 연진아. 좋은 아이템이긴 한데… 아무래도 이건 분해해야겠구나.”
“진짜요? 힝…. 아깝네용, 되게 비싼 아이템을 구한 줄 알았는데!”
“뭐, 괜찮아. 더 비싼 아이템으로 만들면 되니까. 땡길거야, 혹시 주변에 영웅 등급 아이템 하나 더 있어?”
“없습니다, 주군. 그것 외에 최고 등급은 고급 등급의 단검입니다.”
“…이 장갑에 운을 다 쓴 느낌이네.”
합성은 두 개의 소재 아이템을 필요로 하기에 영웅 등급 아이템 하나가 더 필요할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더 드랍된 게 없었다.
나는 연진이에게 장갑을 건네주며 말했다.
“그럼 우선 장갑부터 분해해야겠다. 연진아, ‘분해’.”
“넹, 사장님!”
연진이는 장갑을 받더니 그 자리에 다소곳이 앉았다. 그리고 바구니에 장갑을 올린 후, 다른 한 손에 쥐고 있던 짧은 마법 지팡이를 높이 들었다.
분해는 간단했다.
“시작하겠습니당!”
연진이가 바닥에 작은 연성진을 그리고 그 위에 장갑을 올려놓은 뒤, 완드를 가져다대자.
[캐릭터 : 연진이 분해를 사용합니다.]
[샐러맨더의 가죽 장갑을 분해하시겠습니까?]
[네 / 아니오]
메시지가 떠올랐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네’를 클릭했다.
그러자.
번쩍-!
섬광이 번쩍이더니 장갑이 주먹만 한 금속 덩어리로 바뀌었다.
[합성 소재(샐러맨더의 가죽 장갑)]
[등급 : 영웅]
[샐러맨더의 가죽 장갑을 분해해 얻은 소재로, 합성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영웅 등급의 장갑이 분해되며, 합성 소재로 변한 것이다.
“이어서 합성해보자.”
“알겠습니당, 사장님!”
나는 연이어 합성을 시도해보려 했다.
하지만.
[합성]
[합성 소재 두 개를 합쳐 하나의 아이템으로 재탄생시킵니다.]
[현재 보유 중인 합성 소재(1/2)]
[합성 소재가 부족한 상태입니다.]
“힝…. 소재가 부족해요, 사장님.”
합성을 위한 소재 아이템이 부족한 탓에, 합성은 불가했고 히든 연계 퀘스트도 완료되지 않았다.
“음, 아무래도 아이템을 하나 더 분해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주변을 돌아보며 아이템을 살펴봤지만 마땅한 게 없었다.
그렇다고 영웅 등급보다 아래의 아이템을 분해해서 합성하면, 손해를 볼 수도 있다 보니 꺼려졌다.
그때였다.
‘잠깐, 그걸… 분해해볼까?’
불현듯 남는 아이템이 하나 떠올랐다.
쓰자니 효용이 떨어지고, 팔자니 등급이 높고 절차가 까다로워 계륵 그 자체였던 아이템.
“연진아, 이번엔 이 아이템을 분해해줘.”
나는 인벤토리를 열어 영웅 등급보다 훨씬 높은 등급의 아이템을 꺼내 연진이에게 건넸다.
아이템을 받아든 연진이는 눈을 크게 뜨며 당황했다.
“헉! 사, 사, 사장님! 이건 신화 등급이잖아용!”
“어. 근데 필요 없는 거야. 오랜만에 내 운이 어디까지인지 시험해 보자.”
“과감한 결단이십니다, 주군.”
연진이에게 건넨 건 바로 마강진을 처치하고 얻은 분쇄의 건틀릿이었다.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선 꾸준히 수련을 해야 함은 물론이고, 주력인 화산검과 화산방패까지 포기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팔자니 등급이 아까웠던 아이템.
그렇다면 차라리 소재로 사용해 새로운 아이템을 만드는 편이 나았다.
신화 등급이어도 못 쓰면 의미가 없으니까.
게다가 신화 등급의 합성은 다른 등급의 아이템과 합성하더라도 영웅 혹은 신화, 둘 중 하나가 된다.
만약 합성을 시도해서 영웅 등급 아이템이 뜨더라도 화산검방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게 나온다면 그것도 나름 괜찮았다.
어쨌든 하이어에서도 신화 등급 아이템을 분해한 적은 많지 않았는데, 그걸 현실에서 한다고 하니 상당히 떨리기는 했다.
땡길거야도 인정할 정도로 과감한 선택.
“지, 진짜 해요, 사장님?”
“그래, 바로 해.”
연진이는 여전히 손을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이었지만 나는 그런 연진이를 위해서라도 별거 아니라는 듯한 태도로 긴장을 풀어주었다.
“…네! 그럼 해볼게요!”
연진이는 자신감을 얻었는지 주먹을 불끈 쥐더니 완드를 건틀릿에 가까이 가져갔다.
[캐릭터 : 연진이 분해를 사용합니다.]
[분쇄의 건틀릿을 분해합니다.]
[네 / 아니오]
나는 이번에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네’를 눌렀다.
그 순간.
번쩍-!
[합성 재료(분쇄의 건틀릿)]
[등급 : 신화]
[분쇄의 건틀릿을 분해해 얻은 소재로, 합성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섬광이 번쩍이면서 분쇄의 건틀릿이 금속 덩어리로 거듭났다.
실제로 신화급의 합성 소재를 보게 되니, 마른침이 절로 삼켜졌다.
하지만 이미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돌이킬 수도 없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연진이에게 지시했다.
“바로 합성하자.”
“넹, 사장님!!”
[합성]
[합성 소재 두 개를 합쳐 하나의 아이템으로 재탄생시킵니다.]
[현재 보유 중인 합성 소재(2/2)]
[합성이 가능합니다.]
원래 달릴 땐 쭉쭉 달려야 하는 법.
나는 연진이에게 지시를 내렸고, 연진이는 두 개의 합성 재료를 나란히 놓고 완드를 휘둘렀다.
그러자.
[캐릭터 : 연진이 합성을 사용합니다.]
[합성 재료(신화)와 합성 재료(영웅)을 합성합니다.]
화아아아아아악-!!
두 개의 금속 덩어리가 빛을 내뿜으면서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영웅과 신화.
과연 어떤 등급이 뜰 것인가?
파앗-!!
[합성이 완료됐습니다.]
빛이 사그라들면서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나는 팔짱을 낀 자세로 합성이 끝나가는 광경을 지켜봤다.
그런데.
“합성 끝났습니당, 사장님!!”
합성한 아이템을 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아이템 분해 후, 합성하기(1/1)]
[캐릭터 : 연진의 기억 일부가 재현됩니다.]
파앗-!!
연진이의 완드에서 쏟아져 나온 빛이 내 몸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