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13장 기지개(8)
“사장님! 사장님! 정신이 좀 드셔요?”
가까이서 들려오는 연진이의 목소리.
눈을 뜨자 나를 바닥에 눕힌 채 시중을 들고 있는 땡길거야와 연진이가 보였다.
나는 땅을 짚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지?”
“3분 정도입니다, 주군. 저번보다 조금 더 긴 꿈을 꾸신 듯합니다.”
“그래, 어쩌다 보니…. 그런데 이건 뭐지? 웬 액체가…?”
땡길거야와 대화를 하던 나는 입가에 흐르는 물을 소매로 닦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몸을 일으키자 갑자기 입가에서 웬 액체가 흘러내렸는데, 초록빛이 도는 걸 보니 물 같지는 않았다.
다행히 이상한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좋은 거였다.
“사장님께서 쓰러지셨길래, 기력이 쇠하셨나 하고 제가 강화 물약을 만들었어용! 다행이에요, 의식이 돌아오셔서!”
“네가 만든 물약이었구나. 고맙다, 연진아.”
내가 기억 체험을 하는 동안 허약해서 쓰러진 것인 줄 알고 포션을 만들어 먹인 것이다.
이건 메시지창에도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중급 자양강장 포션을 마셨습니다.]
[온몸에 기운이 돕니다. 상태 이상을 완화시킵니다. 5분 동안 스탯이 5% 상승합니다.]
[남은 시간 – 2분 40초]
중급 자양강장 포션.
중독, 기절 등 상태 이상을 일부 완화시키며 일정 시간 동안 스탯 상승의 효과도 있는 포션이다.
가지고 있지 않았음에도 상황에 맞는 포션을 마실 수 있었는데, 이게 바로 연금술사의 이점이었다.
굳이 거래소에 가지 않아도 즉각적으로 포션을 만들어 섭취할 수 있는 것이다.
‘좋아, 한번 테스트해 볼까?’
나는 내친김에 연금술사의 이점을 활용해 보기로 했다.
[남은 마나 – 52%]
마침 마나도 많이 소모되어 마나 포션을 마실 타이밍이었다.
나는 완전히 몸을 일으킨 후,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연진이에게 말했다.
“연진아, 마나 포션 하나 만들 수 있을까?”
“마나 포션용? 미리 만들어 놓은 게 있는데 드릴까요?”
“아니, 바로 만들어서 줘.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네! 바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당, 사장님!”
연진이는 이유도 묻지 않고, 해맑은 표정으로 제조를 시작했다.
먼저 저 멀리, 아직 미처 다 줍지 못한 드랍템을 향해 달려가더니 마정석 세 개를 주워 왔다.
그리고.
바닥에 연성진을 그린 후, 그 안에 마정석 세 개와 한 움큼 쥔 모래를 넣자.
번쩍-!
[캐릭터 : 연진이 제조를 사용합니다.]
[제조 : 마나 포션]
[필요 재료 : 마나 포션 1개당 마정석 3개]
[마나 포션의 등급은 마정석의 등급에 따라 달라집니다.]
빛이 일면서 마정석과 모래가 합쳐지더니 푸른색의 포션이 만들어졌다.
“완성됐습니다, 사장님!”
연진이는 해맑은 얼굴로 내게 마나 포션을 내밀었고.
그 모습에.
[캐릭터 : 연진이 중급 마나 포션 1개 제조에 성공했습니다.]
“재능이 뛰어나구나, 어린 연금술사여. 이렇게 빠르게 마나 포션을 만들어 내다니.”
“동감이야. 속도가 엄청 빠르네.”
땡길거야와 나는 감탄했다.
연금술사가 포션을 만드는 속도가 빠른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니 찬란한 빛과 함께 눈앞에 갑자기 등장한 것처럼 보여, 상상 이상으로 빠른 느낌이었다.
연진이는 해맑게 웃으며 우리의 칭찬에 화답했다.
“히힛,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바로바로 만들어 드릴게용!”
“그래, 종종 부탁할게.”
나도 연진이의 웃음에 미소를 지었다.
이게 바로 내가 만렙 캐릭터보다 레벨이 낮은 연금술사가 더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이유다.
지금 나의 최대 취약점은 바로 마나.
마나의 총량이 많이 늘어나서 만렙 캐릭터 하나 정도는 상시 유지가 가능해졌지만, 여러 캐릭터를 동시 소환하면 여전히 힘에 부친다.
그런데 연금술사가 생김으로써 직접적으로 마나 포션의 공급이 가능해졌다.
물론 무한정 만들 수는 없고, 레벨에 따라 하루에 제작 가능한 포션의 수가 제한되어 지금은 최대 100개 정도가 최대이지만 그 정도만 해도 마나량을 충당하는 데 큰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연금술사 소환의 이점은 포션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기억 체험 후, 새로 얻은 스킬을 확인했다.
[Lv 1. 연금술사의 비술]
[제1진 극독 내성]
[조건 미충족, 잠김]
[조건 미충족, 잠김]
[조건 미충족, 잠김]
[조건 미충족, 잠김]
[연금술사의 비술].
연진이의 기억을 확인하고 얻은 보상.
나는 [연금술사의 비술]의 첫 번째 스킬을 확인해봤다.
[제1진 극독 내성]
[패시브 스킬 : Lv 1. 극독 내성 – 독 저항력을 획득합니다. 생명을 위독하게 만들거나 전투 불능에 이를 정도로 강한 독이 체내에 들어올 경우, 해로운 효과를 감소합니다.]
[극독 내성].
의식적으로 발동할 필요가 없는 패시브 스킬로 체내에 들어오는 독을 정화해주는 스킬이었다.
‘이거 잘하면 만독불침(萬毒不侵)이 되겠는데?’
지금만 해도 정신 계열 디버프는 군주의 특성, [평정]으로 면역인 상태인데 여기에 물리적인 독의 저항력까지 갖춘다면 디버프 계열 쪽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듯했다.
게다가.
“연진아, 저기 합성 아이템 좀 가져다줄래?”
“아참, 넹! 바로 가져올게요!”
연금술사는 합성 스킬까지 가지고 있어 쓸모없는 아이템을 더 나은 아이템으로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그 첫 번째 작품이 바로 분쇄의 건틀릿과 샐러맨더의 장갑을 합친 아이템이었다.
내가 의식을 잃는 난리 통에 근처에 굴러다니던 합성 아이템.
외관은 분쇄의 건틀릿이 아닌 샐러맨더의 장갑을 따른 듯해, 착용하기에는 좋아 보였다.
과연 어떤 등급에, 무슨 옵션을 가진 아이템으로 바뀌었을 것인가.
나는 장갑을 향해 달려가는 연진이를 기대와 우려가 섞인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런데 연진이가 장갑에 다다른 그 순간.
쩌적-! 쐐애애애액-!!
갑자기 연진이의 머리 위로 돌무더기가 떨어졌다.
물론 피할 수 없는 건 아니었지만, 연진이는 떨어지는 돌을 보고도 장갑을 향해 돌진했다.
자칫 잘못했다간 그대로 깔릴 수 있는 위기.
하지만 다행히도 연진이가 다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으니.
“땡길거야, 끌어오기!”
“예, 주군.”
파지지지직-!!
위기를 직감한 순간, 명령을 내려 땡길거야가 [끌어오기]로 연진이를 당겨오게 했다.
“위험했다, 어린 연금술사여.”
“앗! 죄송해요, 사장님! 천장에서 돌이 떨어지는 건 알았지만, 제가 더 빠를 줄 알고 안 멈췄는데….”
“괜찮아. 왜 그랬는지는 알고 있으니까.”
솔직히 지적하거나 비난할 수도 있었다.
천장에서 돌이 떨어지는 걸 알면서 왜 그렇게 위험하게 들어가냐고.
하지만 나는 연진이를 힐난할 수가 없었다.
이유를 알고 있으니까.
아직 어린 소녀가, 부모님과 마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공포심을 바치고 연금술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러자 연진이도 내 배려를 느낀 것일까?
“저, 정말요? 감사해요, 사장님!”
어떤 물음도 없이 밝은 미소로 내 다짐을 받아주었다. 그리고 손에 쥔 장갑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장갑은 건졌어요, 사장님. 히힛!”
“나이에 비해 엄청난 담력이군, 어린 연금술사여.”
그 위험한 순간에 장갑을 집어 들다니.
땡길거야의 말대로 강심장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공포심이 없는 건 좋은 것일지도? 물론, 위험한 상황을 막아줄 동료들이 필요하겠지만.
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피식 웃으며, 연진이가 건네는 합성 아이템을 받아들었다.
[불타오르는 샐러맨더의 가죽 장갑]
[등급 : 신화]
[효과 : 공격력 + 30, 방어력 + 50]
[패시브 스킬 : Lv 1. 화염타 – 장갑을 착용한 채로 공격에 성공할 경우, 세 번째 타격에 화염이 발생합니다. 화염의 크기는 착용자가 조절할 수 있습니다. 무기 사용 시, 자동 적용. 마나 소모 없음.]
[패시브 스킬 : Lv 3. 화염 강화 – 화염 계열 공격력이 +10% 상승합니다.]
[패시브 스킬 : Lv 3. 화염 내성 – 화염 계열 저항력 +5를 획득합니다.]
“꽤 좋은데? 이 정도면 내가 써도 되겠어.”
“와, 진짜용? 저 잘한 거죠, 사장님!”
“응, 완전.”
“감축드리옵니다. 역시 주군께선 행운도 천하제일인 것 같습니다.”
나는 감탄을 터트리며 장갑을 착용했다.
분쇄의 건틀릿과 같은 신화 등급인 것은 물론이고, 자체적인 특성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던 분쇄의 건틀릿과 달리 주요 장비와 함께 쓸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능력치도 장갑치고 쓸 만했고, 공방일체의 공격 스킬도 나에게 딱 맞았다.
나는 동굴의 벽으로 걸어가 복싱하듯이 주먹을 세 번 가볍게 쳐봤다.
그러자 세 번째 타격에.
[화염타]
콰아아아앙-!!
불꽃과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분화]보다 한참 약하긴 하지만 무기에도 적용되고, 마나 소모도 없으니 손해 볼 스킬은 아니었다.
나는 붉은빛이 감도는 검은 색깔의 장갑을 만지작거리고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좋아, 이번 레이드도 성공적이네. 얻은 게 많아.”
350레벨 달성부터 연금술사 소환 및 스킬 획득, 그리고 신화 아이템 획득까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건만,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많은 성장을 이루어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홉 번째 업적이 개방됩니다.]
[아홉 번째 업적 – SSS급 던전을 클리어 하세요(0/1)]
[히든 퀘스트 : 군주의 업적(8/10)]
[모든 업적 달성 시, 히든 보상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여덟 번째 업적을 달성하자 곧바로 아홉 번째 업적이 개방됐다.
사전 조건 없이, 곧바로 개방된 것이다.
마치 퀘스트 하나를 공짜로 클리어한 듯한 기분.
하지만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었으니 다음 업적은 바로 SSS급 던전 클리어였다.
개인적으로는 특별한 방법으로 진입해 두 번 클리어해 봤지만, 세계적으로는 아직 클리어 기록이 없는 SSS급 던전.
‘이거 들어갈 수나 있으려나 모르겠네….’
클리어는 자신 있었지만, 진입 즉시 이목이 쏠릴 게 분명했다.
우리나라엔 아직 SSS급 던전이 없기도 하고 말이다.
‘사실 SSS급을 클리어할 수 있으면, 숨길 필요도 없지만 지금 당장 들어갈 방법이 없으니…. 뭐, 찾아보면 길은 있겠지. 오늘은 이만 쉬자.’
어차피 방법이야 찾으면 그만이고, 계속된 일로 피로도 좀 쌓인 터라 오늘의 레이드는 여기서 끝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슬슬 나가볼까. 고생 많았다, 연진아. 다음에 또 부르도록 하마.”
“넹! 감사합니다, 사장님! 필요한 일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주세용!”
[캐릭터 : 연진의 소환을 해제합니다.]
나는 연진이의 소환을 해제한 후, 출구 포탈을 통과했다.
“가자, 땡길거야.”
“예, 주군.”
[던전을 탈출합니다.]
화아아아악-!!
순식간에 뒤바뀌는 시야.
뜨겁고 답답했던 용암 던전이 곧바로 빌딩이 솟은 도시의 풍경으로 바뀌었다.
더불어 불어오는 선선한 밤바람.
레이드를 시작할 땐 낮이었는데 몇 번 던전을 돌고 나니 늦은 밤이 되어 있었다.
‘좀 걸어볼까.’
나는 땡길거야와 함께 바람을 쐬며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던전에 들어온 것은 대낮이었으니, 소환 유지 업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아직 반나절 이상이 남았다.
그런데 10분 정도 걸었을까.
저 멀리서 어수선한 분위기가 풍겼다.
대로 한복판에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뭔가를 구경하고 있었고.
도로엔 경찰차와 구급차도 와 있었다.
나는 근처에 있는 시민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