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화
13장 기지개(9)
“아, 그게… 던전 중첩이 발생했다고 하네요.”
“던전 중첩이요?”
“네. 던전 안에 새로운 던전이 중첩되는 현상이라고 하더라고요. B급이 A급으로 변했다나…. 솔직히 뭔지 잘 모르겠는데 심각한 건가 봐요. 공무원 헌터들이 올 정도로요.”
던전 중첩 현상.
시민의 말을 들으니 예전에 용병으로 공무원 헌터 세 명과 D급 던전을 클리어할 때가 떠올랐다.
당시, 원래는 보스 방에 거대 청동 까마귀가 있어야 했는데 보스 몬스터가 C급 가고일로 바뀌어 있었다.
던전 중첩 현상은 그때처럼 등급이 높은 던전이 중첩되는 게 대부분이다.
그래서 포탈이 붉은색으로 바뀌는 던전 중첩 현상이 발생하면 길드나 헌터청에서 구조 인력을 투입한다.
애초에 던전을 클리어할 땐 던전의 등급에 맞게 인원과 등급을 조정하는데 던전의 등급이 한 단계 상승해버리면 레이드 파티는 전멸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그랬던 것처럼 클리어하고 나올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나면 클리어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구조대를 투입한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게이트가 딱 그 경우인 듯했다.
던전 중첩이 발생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클리어되지 않아 구조 인력이 들어간 것이다.
붉게 변한 포탈 근처엔 공무원 헌터들이 주변을 통제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그렇군요. 다들 무사히 돌아왔으면 좋겠네요.”
나는 게이트를 슬쩍 한 번 더 보고는 슬슬 발걸음을 돌릴 준비를 했다.
던전 중첩 현상이 발생했으니 안에 있는 헌터들이 걱정되기는 했으나 B급과 A급 정도의 중첩이라면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별일 없을 거예요. 던전 안으로 이은하 헌터의 팀이 들어갔으니까요.”
“진입한 헌터가 이은하 헌터의 팀이라고요?”
“네. 그래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멀리서라도 구경하는 거죠. 헌터청의 스타를 실물로 볼 기회가 많진 않으니까요.”
시민이 의외의 소식을 전해왔다.
중첩된 던전에 지원을 간 헌터가 이은하라는 것이었다.
혹시 아까 사무실에서 떠날 때, 일이 생겼다고 했던 게 던전 중첩 건을 말했던 것일까.
낮에 이은하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른 순간,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때 생겼다는 일이 던전 중첩인진 알 수 없으나 만약 그렇다면 시간이 꽤 지났기 때문이다.
나는 떠나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시민에게 물었다.
“혹시 던전 중첩이 일어난지 얼마나 됐죠?”
“글쎄요. 낮에 점심 먹고 들어갈 때쯤부터 저랬으니… 10시간쯤 된 것 같은데요?”
10시간이라….
이은하가 떠난 시간이 점심 무렵이었으니 대략 9시간 정도 전이다.
그리고 던전 중첩이 10시간 정도 전에 발생했다면 신고, 구조팀 선정, 출동 등을 생각하면 앞뒤가 딱 맞는 시간이다.
다만 문제는, 들어가 있는 시간이 너무나 길다는 것인데.
아무리 던전 중첩이 일어났다고 해도 최대 A급 던전일 텐데 S급인 이은하 헌터와 B급 이상일 팀원들이 들어갔다기엔 너무 오래 걸렸다.
그 정도 전력이라면 A급이라도 보통 서너 시간으로 클리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긴급 퀘스트 발생]
[던전 중첩 현상을 발견하였습니다.]
[10분 안에 중첩된 던전을 클리어하세요(0/1)]
[남은 시간 – 9분 59초]
갑자기 새로운 퀘스트가 떠올랐다.
‘이거… 뭔가 있다.’
메시지가 생성된 후, 강한 직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긴급 퀘스트가 떴다는 건 해당 현상이 결코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걸 뜻하기 때문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랬다.
얼음 요새에서 이규진이 몬스터로 변했을 때도, 루미나스의 연구실에서 실험체로 쓰인 동물들을 마주했을 때도.
시스템은 내게 급박한 위기가 발생하면 긴급 퀘스트를 부여하며 사태를 해결할 것을 요구했다.
저 멀리 보이는 던전 중첩 현상이 결코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째서일까.
저게 당장 내 신변을 위협하는 요소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시스템이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당장 정답을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퀘스트를 클리어해서 보상을 얻어야 한다.
향후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강해져 왔고, 보상을 모아 힘을 기른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붉은빛을 방출하는 포탈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러자.
“어어, 너무 가까이 다가가시면 위험해요.”
함께 대화를 나누던 시민은 당황한 목소리로 우려를 표했고.
“던전에 진입하실 생각이시군요. 보좌하겠습니다, 주군.”
내 뒤에 서 있던 땡길거야는 의중을 파악하고 따라왔으며.
“잠시만요, 여긴 출입 금지 구역입니다.”
“헌터라도 입장 전에 신원 확인이 필요합니다.”
게이트를 지키던 공무원 헌터 십여 명이 나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평소라면 어느 정도 설명을 해줬겠지만, 10분이라는 제한 시간이 있었기에 일일이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S급 헌터증을 꺼내 보여주며 말했다.
“지금 바로 헌터청에 전달해 주세요. 한상우가 진입하려고 하니, 던전 진입석을 준비해 달라고.”
던전 진입석.
레이드가 진행 중인 던전에 들어가게 해주는 아이템으로, 드랍률이 희박해 헌터청에도 수량이 넉넉하지 않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인 만큼 어떻게든 웃돈을 준다면 살 수야 있겠지만 당장은 거래소에 갈 시간도 없었다.
“헌터청이요…?”
“S급 헌터라….”
나를 모르는 공무원 헌터들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했다.
다짜고짜 처음 보는 S급 헌터가 나타났으니, 당장은 의심을 하는 것도 당연하다.
나는 설명하는 대신.
[압도]
“…확인해 보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가볍게 [압도]를 사용해, 힘을 주어 말했다.
“…흐, 흐흠. 네.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하던 의심스러운 눈초리는 말끔히 사라지고,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길지 않았다.
“예, 확인했습니다. 본청에서 곧바로 던전 진입석을 요구하는 만큼 전달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잘됐군요. 두 개 부탁드립니다.”
강압적이 된 것 같아 조금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시간이 워낙 촉박했던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공무원 헌터는 근처에 예비용으로 보관되어 있던 던전 진입석 두 개를 가져와 내게 건넸다.
나는 공무원 헌터가 내미는 던전 진입석 두 개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가자, 땡길거야.’
-예, 주군.
땡길거야와 하나씩 나눠 가진 후, 붉은빛의 포탈 속으로 진입했다.
화아아아악-!!
[중첩된 던전에 진입했습니다.]
[던전 중첩이 진행 중입니다.]
[출구 포탈을 찾아 탈출하세요(0/1)]
시야가 일변하며 곧장 배경이 바뀌었다.
높다란 빌딩에서 빙판과 고드름, 그리고 갈래 길이 즐비한 얼음 동굴로.
던전 내부는 일반적인 던전과 크게 다른 게 없었다.
다만 메시지가 달랐다.
보스 몬스터를 처치하라는 메시지 대신 출구 포탈을 찾아 탈출하라는 임무가 뜬 것이다.
이런 건 듣도 보도 못한 메시지였는데 깊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10분 안에 중첩된 던전을 클리어하세요(0/1)]
[남은 시간 – 6분 52초]
긴급 퀘스트 완료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곧장 수색에 돌입했다.
[캐릭터 소환 : 다크어둠]
[캐릭터 소환 : 매직킹]
땡길거야뿐만 아니라 다크어둠과 매직킹까지 소환해 얼음 동굴 수색을 지시한 것이다.
“던전에 들어온 헌터들을 찾는다. 발견하면 바로 보고하고.”
“예, 로드.”
“시행하겠습니다, 마스터.”
“명 받들겠습니다, 주군.”
파앗-!
갈래 길은 총 세 개.
세 명의 만렙 캐릭터가 한 길씩 맡았다.
효율은 엄청나게 뛰어났다.
명령을 내린 지 30초도 지나지 않았는데.
-발견했습니다, 마스터. 동굴 밖 출입구입니다.
-동굴 밖 출입구에 헌터 이십여 명이 쓰러져 있습니다, 로드.
-저도 도착했습니다, 주군. 그런데 모두 숨은 붙어 있으나 의식 불명입니다.
세 명 모두 동시에 헌터들을 발견하고 전언을 보내왔다.
보고를 종합해 보니 아무래도 어떤 길이든 동굴 밖 출입구와 이어지는 듯했다.
나는 보고를 듣자마자 땅을 박차 가운데 길로 내달렸고, 전속력으로 달리자 동굴 밖으로 나오면서 곧 세 캐릭터들이 말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새하얀 눈밭 위, 이십여 명에 달하는 헌터들이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그중엔 이은하 헌터도 있었는데.
“하아, 하아….”
다행히 완전히 의식을 잃지는 않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눈밭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먼 곳을 바라보며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옆으로 달려갔다.
“이은하 헌터님, 괜찮습니까? 보스 몬스터는요?”
“하, 한상우 헌터님? 여긴 어떻게… 우, 우욱…!!”
이은하는 날 발견하고 대답하려 했지만 말을 잇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했다.
상태가 굉장히 안 좋아 보였다.
나는 곧바로 그 원인을 파악했다.
[얼음 폭풍의 장군이 둔화의 기운을 흩뿌립니다.]
[둔화의 기운이 침투합니다.]
[극독 내성 발동]
[군주의 특성, 평정이 발동합니다.]
[둔화의 기운에 저항합니다.]
던전 안에 있는 보스 몬스터가 독이 섞인 저주를 흩뿌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은하가 바라보는 지점을 보니 끊어진 다리 건너편.
[얼음 폭풍의 장군(SS)]
“끄아아아아!!”
짙은 안개 사이로 거대한 보스 몬스터가 얼음칼을 들고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아무래도 다리가 끊어져 건너오지 못하니 입으로 독과 저주를 방출해 공격하는 듯했는데 저주의 이름과 한기를 봤을 때, 중독되면 몸이 굳는 걸 넘어 폐도 얼어 호흡까지 힘들어질 것 같았다.
그때, 이은하가 흐리멍덩한 눈으로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던전 중첩이 계속해서 일어나서 SS급 보스 몬스터까지 나왔어요…. 급하게 부상자들을 이송하고, 다리를 끊었는데 저주가…. 쿨럭!!”
“이, 이은하 헌터님…!”
이은하는 겨우 거기까지 말하고, 완전히 정신을 잃은 채 쓰러졌다.
서둘러 목에 손가락을 대고 맥박을 잡아봤는데 다행히 숨은 붙어 있었다.
나는 마나 포션을 하나 마시며 조치를 취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캐릭터 소환 : 연진]
“연진아, 사람들 상태 좀 확인하고, 해독제 만들어서 먹여 줘.”
“알겠습니당, 사장님!”
나는 우선 연진이에게는 해독 포션 제조를 지시했다.
그리고.
“매직킹, 너는 출구 포탈을 찾는다. 앞서 나온 보스 몬스터들을 처치했으니 분명 어딘가에 출구 포탈이 있을 거야. 땡길거야, 너는 연진이가 만드는 해독제를 부상자들에게 먹이고 출구 포탈로 이송시킨다.”
“당장 찾겠습니다, 로드.”
“알겠습니다, 주군. 어린 연금술사여. 해독제를 만들어 나한테 넘기도록. 배분을 돕겠다.”
매직킹과 땡길거야에게도 임무를 내렸다.
마지막으로 다크어둠에겐.
“죽일까요, 마스터?”
“그래, 처단해.”
“예, 마스터.”
암살자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임무를 내렸다.
나는 다리 건너편에 있는 SS급 보스 몬스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과는 곧바로 나왔다.
다리가 끊어져 폭이 200m가 넘는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음에도 다크어둠은 한 번에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캐릭터 : 다크어둠이 쾌속 이동을 사용합니다.]
[캐릭터 : 다크어둠이 그림자 긋기를 사용합니다.]
[캐릭터 : 다크어둠이 배후 강타를 사용합니다.]
여러 스킬을 사용해 단번에 놈을 제압했다.
[쾌속 이동]으로 빠르게 보스 몬스터가 내리치는 검을 피하고, [그림자 긋기]로 후방으로 이동하는 동시에 위로 튀어 올라 목덜미에 쌍단검을 꽂아 넣은 것이다.
“트어어억!!”
[캐릭터 : 다크어둠이 얼음 폭풍의 장군(SS)을 처치했습니다.]
[군주의 특성, 독존이 발동합니다.]
[경험치 20배를 획득했습니다.]
한 호흡 만에 쓰러진 SS급 보스 몬스터.
그러나 상황은 나아질 줄을 몰랐으니.
[긴급 퀘스트]
[10분 안에 중첩된 던전을 클리어하세요(0/1)]
[남은 시간 – 3분 32초]
분명 SS급 보스 몬스터를 처치했음에도 긴급 퀘스트는 클리어되지 않았다.
설상가상.
콰과과과과과과-!!
SS급 보스 몬스터를 처치한 직후, 강력한 얼음 폭풍이 발생해 설원을 집어삼킬 듯이 몰아치더니.
[던전 중첩이 계속됩니다.]
[던전의 등급이 상향됩니다.]
처음 보는 메시지도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