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13장 기지개(10)
“몬스터를 처치하니 알 수 없는 힘이 휘몰아치는군요. 저건 아직 실체가 없어 대응하기 어렵습니다, 마스터.”
“그래, 그런 것 같네.”
SS급 보스 몬스터 처치 후, 다크어둠이 내 옆으로 복귀하며 그렇게 말했다.
나도 다크어둠의 말에 동의했다.
이게 이은하가 말한 던전 중첩의 이상 현상일까.
B급 던전에 SS급 보스 몬스터가 있는 게 이상했는데, 아무래도 지금처럼 보스 몬스터를 처치할 때마다 새로운 중첩이 발생한 것 같았다.
‘역시… 탈출하는 게 답인가.’
[중첩된 던전에 진입했습니다.]
[던전 중첩이 진행 중입니다.]
[출구 포탈을 찾아 탈출하세요(0/1)]
혹시나 해서 확인해 봤지만 중첩된 던전의 퀘스트와 긴급 퀘스트는 클리어되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두 퀘스트의 목표가 보스 몬스터를 처치하는 게 아니라 던전에서 탈출하는 것이어서 그런 듯했다.
그렇다면 이제 행동을 달리할 차례였다.
때마침.
-로드, SS급 보스 몬스터가 있던 설원의 숲 입구 쪽에서 출구 포탈을 발견했습니다. 남쪽 방향으로 450m 지점입니다.
매직킹이 출구 포탈도 발견해냈다.
SS급 보스 몬스터가 있던 자리 뒤쪽으로 보이는 숲이었다.
다만 다리가 끊어져 당장 넘어가기는 힘들었는데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나는 세찬 바람에서 점점 소용돌이로 바뀌는 얼음 폭풍을 보며 캐릭터들에게 전언을 보냈다.
‘해독 현황은 어떻지?’
-해독제 제조는 바로 끝냈어용, 사장님! 지금 부상자들에게 복용시키고 있습니다!
-두 명 남았습니다, 주군. 곧 끝날 것 같습니다.
‘좋아. 연진이는 해독제 투여하고, 땡길거야와 다크어둠은 부상자들을 한데 모은다. 매직킹, 너는 매스 텔레포트로 여기 있는 사람들을 전부 출구 포탈 앞으로 이동시켜 줘.’
-알겠습니다, 로드.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파앗-!
명령 직후, 다들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매직킹도 설원 위로 다시 복귀했다.
그사이, 나는 정신을 잃은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은하를 안아 들었다.
“으윽…!”
“잠시만 참으세요. 금방 탈출할 거니까.”
장시간의 전투로 이은하의 전투복은 곳곳이 찢어져 자상과 피멍 등이 가득했다.
해독이 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보스 몬스터가 뿌린 독의 영향도 있어, 살짝 닿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상당할 것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안고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으니.
[캐릭터 : 매직킹이 매스 텔레포트를 사용합니다.]
슈화악-!!
매직킹이 지팡이를 휘두른 순간, 나와 이은하를 포함한 설원 위의 모든 인원이 출구 포탈 앞으로 이동했다.
단번에 바뀐 시야.
절벽과 절벽이 마주 보던 설원에서, 높다란 나무 사이에 포탈이 생성되어 있는 숲으로 풍경이 바뀌었다.
매직킹의 마법 덕분에 단숨에 수많은 인원이 출구까지 온 것이다.
그러나 빠르게 왔다고 해서 여유 부릴 시간이 있는 건 아니었다.
[긴급 퀘스트]
[10분 안에 중첩된 던전을 클리어하세요(0/1)]
[남은 시간 – 52초]
긴급 퀘스트 완료까지는 1분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콰과과과과과과-!!
얼음 폭풍은 점점 거세져 소용돌이까지 만들어내더니 나무를 날려버리며 무서운 기세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금 필요한 건 뭐?
빠른 판단과 부상자를 한꺼번에 옮길 묘안이다.
“매직킹! 보호막 펼쳐서 폭풍을 최대한 막는다! 땡길거야는 끌어오기로 부상자들 묶어서 탈출해! 다크어둠과 연진이는 낙오되는 부상자가 없는지 봐줘!”
나는 다시 한번 재빠르게 캐릭터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거대한 범위를 방어하는 것이니 만큼, 광범위 방어 스킬을 가진 매직킹은 방어.
땡길거야는 높은 유틸성을 가진 [끌어오기]를 사용한 구출.
다크어둠과 연진이는 빠른 기동성을 살린 최종 수색.
이에.
“얼음 폭풍이 좀 강하긴 한데… 막아보겠습니다, 로드.”
매직킹은 지팡이를 들어 널따라 보호막을 만들어냈고.
파지지직-!
“먼저 나가겠습니다, 주군. 부디 무운을.”
땡길거야는 눈밭에 널브러져 있는 부상자들을 [끌어오기]로 묶은 후, 그대로 포탈을 통과했다.
그리고.
나도 얼음 폭풍이 등 뒤까지 쫓아온 순간, 이은하를 안은 채 포탈로 몸을 던졌다.
화아아아악-!!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급변하는 환경.
차갑다 못해 시리던 공기가 일순간 따뜻하게 변하면서.
“와! 헌터들이 나왔다!!”
“티, 팀장님! 헌터들이 중첩 던전을 탈출했습니다!”
“헛! 이은하 헌터님도 밖으로 나오셨습니다!!”
공무원 헌터들의 놀란 목소리도 들려왔다.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으으…. 여긴 어디지?”
“쿨럭! 던전 바깥? 주, 죽지 않은 건가? 살아 있어?”
독에 중독됐던 헌터들은 설원이 아닌 아스팔트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며 하나둘 정신을 차렸고.
[중첩된 던전을 탈출했습니다.]
[출구 포탈을 찾아 탈출하세요(1/1)]
[긴급 퀘스트]
[10분 안에 중첩된 던전을 클리어하세요(1/1)]
[긴급 퀘스트 완료]
[메시지를 터치할 시, 보상이 지급됩니다.]
클리어되지 않던 던전 퀘스트와 긴급 퀘스트도 한꺼번에 완료됐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태가 완전히 종료된 건 아니었다.
꺼진 불도 다시 본다고,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낙오자는 없습니다. 부상자는 모두 던전 밖으로 나갔습니다, 마스터.
-저도 확인했어용, 사장님!
-얼음 폭풍이 점점 거세지고 있습니다. 저흰 이만 퇴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로드.
뒤이어 들려오는 캐릭터들의 전언.
다행히 낙오된 사람은 없는 듯했다.
‘그래, 다들 고생 많았다.’
나는 각자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 준 캐릭터들을 칭찬한 뒤, 땡길거야만 남겨두고 캐릭터 소환을 모두 해제했다.
그런데 그 뒤로.
화아아아아아악-!
“어어, 갑자기 포탈이…!”
“꺄악! 터지는 거 아냐?”
붉은빛의 포탈이 점점 더 많은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떨어져 있는 시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고, 공무원 헌터들도 공포에 몸을 떨며 겨우겨우 자세를 잡았다.
물론.
-폭발하는 양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주군.
‘응, 나도 그렇게 보여.’
나와 땡길거야는 크게 긴장하지 않았다.
포탈이 방출하는 빛이 불길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브레이크 때와 같은 차원을 찢는 듯한 빛이 아닌, 던전 자체에서 내부적인 변화를 일으킨 결과 빛을 방출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은하를 안은 채 점점 달아오르는 듯한 포탈을 바라봤다.
과연,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포탈에서 방출되는 빛은 어느 순간, 정점을 찍더니 다시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다.
다만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사그라드는 빛과 함께, 붉은 포탈 위로 메세지가 떠올랐다.
[던전 중첩이 계속됩니다.]
[던전의 등급이 SS급에서 SSS급으로 성장합니다.]
[SSS급 중첩 완성까지 남은 시간 - 3일]
[중첩이 완성될 때까지 던전 진입은 불가능합니다.]
서울 한복판에 SSS급 던전이 생성될 것 같다.
* * *
“방시현 님. 방금 작전팀에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SSS급 던전 생성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합니다.”
루미나스 한국 지부의 본부인 성북동 대저택.
비서 윤채연이 마당에 선베드를 놓고 햇볕을 쬐고 있는 방시현에게 고개를 숙이며 보고를 올렸다.
그러자.
“이야, 대단한데? 다들 코너에 몰려서 그런가, 진짜 성공했네. 난 너희들이 실패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알 수 없는 감상이 돌아왔다.
누가 들어도 분개할 만큼 무례한 화법이었지만.
윤채연은 그저 고개를 숙이며, 사무적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루미나스에서 강함은 절대적이고, 방시현은 자신은 물론이고 한국 지부의 다른 인원을 모두 합친 것 이상으로 강했으니까.
“다들 그만큼 필사적이니까요. 간부와 동료 대부분을 잃은 이상, 더는 물러날 수도 없습니다.”
“그렇겠지. 만약 이번 작전도 실패했다면… 아마 본부에서는 한국 지부 자체를 날려버렸을 거야, 킥킥킥!”
방시현이 선글라스를 이마로 올리더니 실실 웃음을 흘렸다.
윤채연은 방시현의 말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SSS급 던전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작전은 이번이 처음 성공한 것일 정도로 많은 인력과 희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던전 중첩 현상이 발생한 던전의 파악부터, 중첩 지속을 위한 여러 조건 달성까지.
저번 헌터청에서의 사건 이후, 루미나스 한국 지부의 인원은 대폭 줄어 300명도 채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이번 작전에 투입된 인원은 200명 이상으로, 감시나 장비 조달 등 직간접적인 인원들을 모두 포함하면 가용 가능한 전 인력을 투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만큼 다들 이번 작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는데, 덕분에 윤채연은 작전을 지휘하느라 10년은 더 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때.
“그래도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 마. 이번 일이 성공적으로 끝나기만 하면, 한국지부는 본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될 테니 말이야. 특히 너는… 그래. 지부장이 될지도 모르겠네.”
“지, 지부장 말씀이십니까? 제가요…?”
방시현이 달콤한 희망을 심어주었다. 윤채연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충성심을 테스트하는, 고도의 떠보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전 아직 지부장이란 자리에 걸맞는 힘이 없습니다. 누군가 지부장이 된다면, 방시현 님이 되셔야죠.”
“난 그런 직위 따윈 필요 없어. 힘이야 본부에서 채워줄 거고. 내가 원하는 건 그냥… 맛있는 거나 먹는 거야. 이번 작전에서 레이드 파티를 꾸리는 녀석들의 힘만 먹어 치울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해.”
“혹시 SSS급 던전의 레이드 연합에 들어가실 생각이십니까?”
윤채연의 눈이 다시 한번 휘둥그레졌다.
지금까지 클리어한 전적이 없는 SSS급 던전이 국내의 도심 한복판에 생겼다면, 최소한 클리어의 시도는 해볼 것이다. 국내엔 SSS급에 거의 근접했다고 알려지는 강철만도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SSS급 던전을 위한 정예 레이드 연합이 만들어질 것 또한 당연지사.
그런데 놀랍게도, 방시현은 루미나스인 그가 그 연합에 들어가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당연하지. 어차피 죽을 녀석들인데 내 밥으로 쓰는 게 낫잖아?”
“위, 위험하시지 않겠습니까? 무려 SSS급 던전입니다.”
“던전 탈출석만 확보해 놔. 나머진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일이 준비되는 대로 보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농담인가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윤채연은 꾸벅 인사를 한 후, 나머지 일을 수행하기 위해 대저택을 나섰다.
그러자 그 뒤로.
“흐흐, 기대되네. SSS급 던전에 어떤 놈들이 들어올지. 오랜만에 포식 한 번 해야겠어.”
방시현이 입맛을 다시며 선베드에 누웠다.
본격적인 파티 이전의 휴식은 달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