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13장 기지개(12)
한상우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서로 바쁘다는 걸 알기에 자질구레한 인사는 필요 없었다.
-예, 헌터청장님. 무슨 일이시죠?
-한상우 헌터님, 혹시 지금 바로 헌터청으로 와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대응책을 마련해야 하는데 여러 일이 한꺼번에 터졌습니다. 한상우 헌터님께서 겪은 중첩 던전의 경험담과 의견이 필요한데… 잠깐만 시간을 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음… 조사인가요?
-아닙니다, 그냥 간단한 회의라고 보시면 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보안상 통화로는 말씀드리기가 곤란합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가도록 하죠.
-빠른 결정 감사드립니다.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집에서 편히 쉬고 계시면 수행원들이 도착할 겁니다.
-아뇨, 제가 가겠습니다. 그게 더 빠를 것 같네요.
한상우는 최대천과의 통화를 마무리하고 장비를 챙겼다.
다음 소환 캐릭터도 정해졌다.
[캐릭터 소환 : 매직킹]
“어두운 미래에 밝은 지혜의 등불을.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로드.”
두 번째 소환 유지 캐릭터는 매직킹이었다.
SSS급 던전이 출몰하고, 돌발적인 상황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지금, 여러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선 만렙 캐릭터를 꺼내놓는 게 좋을 듯했다.
그리고 만렙 캐릭터들 사이에는 상생 관계가 없기에 그나마 땡길거야와 중립 관계인 매직킹이 제격이었다.
마침 매직킹의 힘이 필요하기도 했고.
“매직킹, 헌터청 위치 알지? 다 같이 그 앞으로 가자.”
“예. 바로 시전하겠습니다, 로드.”
한상우는 매직킹에게 텔레포트를 지시했다.
텔레포트는 한 번이라도 가본 지역이라면, 방해가 없는 한 바로 갈 수 있으니까.
물론, 예전의 헌터청이라면 결계가 있었겠지만 지금은 건물이 수리 중이라 크게 걸릴 게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캐릭터 : 매직킹이 매스 텔레포트를 사용합니다.]
화아아아악-!!
매직킹이 지팡이를 휘두르자 섬광이 번쩍이면서 배경이 단번에 바뀌었다.
고급 아파트에서 헌터청 로비 근처로.
“감시하는 장비나 보는 눈이 없는 곳으로 텔레포트 했습니다, 로드.”
“잘했다, 매직킹. 그럼 출발해볼까?”
“뒤따르면서 보좌하겠습니다, 주군.”
한상우는 두 캐릭터를 대동한 채 헌터청 로비로 들어갔다.
그러자.
“어라? 저분, 혹시 그때 헌터청 사건 때 그분 아니신가…?”
“어, 맞아. 근데 방금 전까지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언제 오셨지?”
헌터청 입구에 서 있던 공무원 헌터들이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구를 지나간 사람들이 없었는데 한상우를 비롯한 외국인 헌터 두 명이 로비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루미나스와의 전투 당시, 실루엣을 본 정도였지만 행색이 워낙 특이하고 특유의 카리스마가 기억에 남아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공무원 헌터들은 세 사람이 언제 어떻게 안으로 들어왔는지 알지 못했는데 따라가서 캐물을 수도 없었으니.
“어라? 한상우 헌터님,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 막 모시러 가려던 참이었는데요. 헛! 동료분들도 함께 오셨군요!”
헌터청 로비를 나오던 신대훈이 한상우와 그 동료들을 반긴 탓이었다.
한상우도 신대훈의 환대에 응하며 대답했다.
“최대천 청장님의 연락을 받고 바로 왔습니다. 제가 직접 오는 게 더 빨라서요. 이 친구들은 이번 사태에 도움이 될까 해서 데려온 것이고요.”
“아아, 그러셨군요. 감사합니다, 한상우 헌터님. 직접 와주신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는데 동료분들까지 함께 와주셨으니 더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최대천 청장님이 계신 곳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신대훈은 미소와 함께 꾸벅 인사를 하더니 몸을 돌려 로비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잠시만요. 동행하시는 분들의 신원 확인을 부탁드립니다.”
“중첩 던전에서 활약하신 S급 한상우 헌터님과 그 길드원분들이십니다.”
“아,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지나가셔도 좋습니다.”
평소의 헌터청보다 두꺼운 보안이 이어졌다.
“정지하십시오. 신원 확인하겠습니다.”
“S급 한상우 헌터님이십니다. 중첩 던전 관련하여 증언하러 오셨습니다.”
“예, 확인 완료됐습니다. 가셔도 됩니다.”
정장을 빼입은 경호원 수십 명이 기다란 복도에 쫙 선 채로 몇 걸음 떼지도 않았는데 수시로 검문을 해댔다.
한상우가 경호원들을 지나치며 말문을 열었다.
“대단한 분들이 계신가 보군요.”
“예, 이제 곧 알게 되실 테지만 미리 말씀드리자면… VIP께서 와계십니다.”
“VIP라면… 대통령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맞습니다. 지금 회의실엔 청장님 말고도 대통령, 국무총리, 각 부처 장관, 여야 당대표 등이 있습니다. 정부 요직에 계신 분들이 비상 회의를 열었거든요.”
“…높으신 분들이 모였군요. 제가 끼어도 될 자리인지 모르겠네요.”
“그냥 편하게 경험담을 말씀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한상우 헌터님께서 곤란하실 만한 걸 묻진 않을 테니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대훈은 한상우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더니 마침내 도착한 회의실 앞에 섰다.
그리고.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던 문을 열더니 가운데가 뻥 뚫린, 넓고 기다란 테이블이 비치된 회의실로 한상우를 안내했다.
그러자.
“그럼 일본에서도 파견 보낼 헌터가 없다는 말씀… 오오, 왔군요.”
“엇, 영상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군요.”
대번에 시선이 집중됐다.
문을 열 때만 해도 시장통처럼 시끌벅적하게 떠들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지며 한상우를 쳐다본 것이다.
한상우도 회의실 안의 사람들을 돌아봤다.
헌터청장 최대천부터 시작해 국무총리, 여야 당대표 등 국가의 주요 요직들을 차지한 사람들이 수행원들과 함께 회의실에 빼곡하게 차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엔.
“오, 저분이군요. 중첩 던전에서 부상자들을 구조한 헌터가.”
대한민국의 대통령도 앉아 있었다.
60대 초반의 나이에 옆머리가 희끗한 모습.
중년 남성인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상우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습니다. 대통령 유성태입니다. 중첩 던전에서 헌터들을 구조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큰일 하셨습니다.”
“헌터 한상우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닙니다. 세상에 마땅한 일은 없지요. 많이 피곤하실 텐데 회의에 참석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자리는… 아, 최대천 청장 옆에 앉으시면 되겠군요.”
“예, 감사합니다.”
한상우는 대통령과 악수한 뒤, 최대천의 옆자리에 앉았다. 최대천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한상우를 환대했다.
“한걸음에 달려와 주셨군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한상우 헌터님.”
“아닙니다. 그런데 뭔가 상황이 심각해 보이는군요. 다들 표정이 안 좋네요.”
한상우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환대해주는 것과 별개로 회의실 내부에 있는 수행원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최대천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상황이 많이 안 좋습니다.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꽤 많이 발생했거든요.”
변수라니.
그새 또 무슨 일이 생겼나, 궁금증이 일었지만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한상우가 자리에 앉자마자, 회의를 주재하던 국무총리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으니까.
“그럼 직접 현장을 뛰신 한상우 헌터님께서도 오셨으니 잠깐 다시 한번 상황을 상기하고 회의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국무총리는 노트를 펼치더니 적어놓은 글들을 빠르게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현재 강남 논현동에 SSS급 던전이 출현했습니다. B급 던전에서 중첩으로 인해 SSS급까지 성장했으며 앞으로 약 사흘 뒤면 진입할 수 있게 됩니다. 이건 굉장히 특이한 경우인데… 더 특이한 건 정밀 검사 결과, 던전 브레이크가 일주일 뒤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레이드를 위한 시간 여유가 나흘밖에 시간이 없는 것이지요. 추측하기론 B급 던전의 던전 브레이크 주기가 리셋되지 않고 그대로 적용된 것 같습니다.”
“으음….”
국무총리의 말에 몇몇이 턱을 괸 채 침음을 흘렸다.
확실히 우려할 만했다.
던전 브레이크의 주기는 보통 30일로, 그 안에만 클리어하면 터지지 않는데 이번 SSS급 던전은 그보다 훨씬 짧은 7일이었다.
실패할 경우를 상정해, 단순 대피 기간으로만 놓고 봐도 7일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한상우는 얘기를 들으며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이한 일이기는 하나 던전 브레이크 주기가 짧은 던전도 가끔 있기에 이게 표정에서 절망이 드러날 정도로 큰일이라고는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국무총리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더 큰 문제는 디바인 실드 소속 SS급 헌터 다섯 명이 연락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SSS급 헌터와 휘하 헌터들이 SSS급 던전에 진입했다가 실패한 사례를 생각해보면 지금은 SS급 헌터 한 명, 한 명이 소중한 상황인데 말이죠.”
디바인 실드 소속 SS급 헌터들과의 연락 두절.
이게 바로 진짜 문제였다.
강철만과 지소영, 서지환 등 몇몇 SS급 헌터들이 디바인 실드 소속이라는 건 극비사항이지만 정부의 주요 요직들은 알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상우가 최대천을 바라보며 물었다.
“…진짜입니까?”
“예, 사실입니다. 강철만을 비롯한 디바인 실드 소속 SS급 헌터 다섯 명은 해외에 파견을 나가 있는 상태입니다. 이틀 전에 출국했으며 디바인 실드에 문의해봤지만 위치는 기밀이라며 알려주지 않더군요. 남미 쪽 정글로 예상하고 있는데… 연락이 닿지 않습니다.”
헌터 전력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SS급 헌터가 다섯 명이나 연락 두절 상태라니.
확실히 심각하다고 표현할 만했다.
게다가.
“미국과 일본, 중국 등 동맹국과 주변국에 헌터 지원을 요청하긴 긍정적인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헌터 파견을 검토해보긴 하겠지만 SSS급 던전은 너무 위험해서 지원할 헌터가 없을 거라고 하는군요.”
동맹국과 주변국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눈치였다.
최악으로 치닫는 듯한 상황.
국무총리의 상황 설명이 끝나자 대통령이 한상우를 보며 물었다.
“한상우 헌터님,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상황이 심각합니다. 혹시 중첩 던전 내부에서 SSS급 몬스터나 보스 몬스터를 본 적 있으십니까?”
“아뇨, 없습니다.”
“그럼 SSS급 던전에 대한 작은 단서라도 보신 게 없으십니까? SSS급인 만큼, 지금은 아주 작은 단서라도 절실한 상황입니다. 혹시 S급 헌터들로 클리어하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아쉽지만 없습니다. 그리고 SSS급 던전은… 이미 다들 아시겠지만 S급 헌터로는 클리어가 불가능합니다. 긍정적인 답을 들려드리지 못해 죄송하군요.”
대통령의 물음이었지만 한상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질문의 의도가 명확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지금 적합한 인재가 부족한 상황에서 무리하게 SSS급 던전 레이드를 진행할 근거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한상우 입장에선 안 되는 걸 된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그에 따른 반향은 발생했다.
회의실 내부엔 절망감이 퍼졌고, 몇몇은 한상우의 대답이 끝나자 아예 대놓고 분노를 터트렸다.
“아니, 이렇게 중요한 때에 SS급 헌터 다섯 명의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아무리 갑자기 터진 일이라지만, 비상 연락망은 유지를 했어야죠! 사람을 붙이던지요!”
“맞습니다! 이대로 SSS급 던전 공략이 실패하면 강남은 그야말로 초토화될 겁니다! 인프라가 모두 파괴돼 국가 동력을 상실할 건 불 보듯 뻔합니다!”
“헌터청은 뭘 한 겁니까? 이래서 몬스터로부터 국민의 안전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예견된 일도 아니었건만 헌터청의 업무 방식을 지적하며 곳곳에서 일갈이 날아들었다.
회의실은 또다시 시장통처럼 고성이 오고 갔다.
최대천과 헌터청 간부들에게 쏟아지는 무수한 지적.
그 속에서 한상우는.
‘꼴사납네….’
깊은 빡침을 느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지만,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아닌 상대에 대한 비난만을 내뱉는 이들이 몇몇이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 집 어떡할 겁니까? 까딱 잘못하다간 이대로 수십억을 날리게 생겼어요!”
“다들 강남에 집 한 채씩은 있지 않으십니까! 이거 해결 못 하면 저희 다 죽는다, 이 말입니다! 대체 헌터들은 뭘 하는 겁니까! 목숨 걸고 지키게 하세요!!”
정치인이라면 국민의 안위를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하거늘, 사태에 대한 해결법을 고민하기보다는 자기네들 집값 하락을 걱정하기 바빴다.
심지어 헌터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때였다.
“그렇게 집값이 소중하면 직접 뛰시죠, 레이드.”
한상우의 입에서 싸늘한 말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