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13장 기지개(13)
“……?”
일순간, 회의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일침을 가한 인물이 전혀 예상치 못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한상우.
비상 회의의 참고인으로 부른 사람이 마치 이해 당사자인 것처럼 모두에게, 그것도 대통령과 여러 중진들이 모인 자리에서 일갈을 날렸다.
차갑다 못해 싸늘해진 회의장 분위기.
물론, 잔뼈가 굵은 일부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 반발하려고 했다.
하지만.
“바, 방금 뭐라고….”
“그렇게 집값이 떨어지는 게 걱정되면 직접 SSS급 던전에 들어가라는 얘기입니다. 좋잖아요? 집값도 지키고, 레이드로 그렇게 좋아하는 돈도 벌고. 일석이조네요.”
계속되는 한상우의 비아냥거림에 입을 쩍 벌린 채 할 말을 잃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압도]
한상우는 일갈을 날리는 동시에 군주의 특성, [압도]를 회의장에 방출했으니까.
SS급 몬스터들도 전의를 상실할 정도로 강력한 효과를 가진 특성을 일반인이 버텨낼 리가 없었다.
“하아, 하아….”
“우욱….”
물론, 최대로 방출하진 않았다.
너무 심한 압박감에 혼절하는 사람이 생길까 극소량만 방출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그마저도 버티기 힘든지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이었다.
‘어쩔 수 없어. 권한을 가진 자들이 저 모양 저 꼴이라면… 지금부터 기강을 잡아 둬야 앞으로도 편해.’
한상우는 처음부터 이렇게 압박을 가할 생각은 아니었다.
이런 자리인 줄도 몰랐고, 전면에 나서서 의견을 표출할 입장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처음 대한민국의 고위직들과 마주하게 되었고, 자신들의 이기심을 위해 헌터를 소모품처럼 대하는 모습을 본 이상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만약 여기서 못 들은 척 넘어가거나 굽신거리는 모습이라도 보인다면 저들은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관계와 인상은 첫 만남에서 굳어진다.
학창 시절에 만난 친구는 나이가 들어 사회적 지위가 달라지더라도 친구로 인식하고, 사장과 직원의 관계로 만나면 일을 그만두더라도 그 상하관계가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한상우는 그걸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더더욱 넘어갈 수가 없었다.
자신의 힘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이들과 엮일 일은 많아질 텐데, 여기서 어영부영 넘어가는 모습을 보인다면 앞으로도 득달같이 달려들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한상우는 대통령과 고위직 인사들을 노려보며 말문을 열었다.
“여기 계신 최대천 헌터청장님을 비롯해 많은 헌터들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동료들을 구출하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헌터들도 많고요. 그런데 지원과 응원은 못 할망정 자기들 밥그릇이나 챙기려고 헌터들을 이용하려는 모습을 보인다면…. 다음엔 경고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쿨럭…!”
한상우의 경고에 고위직 인사들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헛기침만 해댔다.
단숨에 넘어온 분위기.
한상우는 천천히 [압도]를 풀며 경직된 공기를 느슨하게 바꾸었다.
그 뒤로.
“거, 말씀이 너무 심한….”
[압도]가 풀리자 숨통이 트였는지 몇몇 수행원들이 나지막한 소리로 불만을 토해내려고 했지만.
찌릿-
한상우의 뒤편에 선 땡길거야와 매직킹이 노려보자 슬그머니 말끝을 흐리며 다시 의자에 착석했다.
[압도]는 사라졌지만 주도권은 여전히 한상우에게 있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정보는 모두 제공한 것 같으니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한상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료들과 함께 회의장을 나섰다.
그러자.
“…잠시 쉬도록 하죠. SSS급 던전 레이드 연합 구성과 SS급 헌터들과의 연락 현황은 지속적으로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흠흠,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희도 헌터분들께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지원을 하겠습니다.”
최대천도 대통령에게 수습을 맡긴 뒤, 빠르게 회의장을 나섰다. 그리고 동료들과 복도를 걷고 있는 한상우의 옆으로 붙으며 말했다.
“인상적인 연설이었습니다. 전부 한 방 먹은 표정이더군요.”
“청장님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든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SSS급 던전 레이드를 준비하시려면 지원받아야 할 게 많으실 텐데요.”
“아닙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 해주셔서 통쾌하더군요. 그리고 사과는 제가 한상우 헌터님께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중첩 던전에서 나온 영상을 모두 삭제하지 못해 한상우 헌터님의 얼굴이 세간에 퍼지게 됐으니까요.”
한상우의 말에 최대천이 오히려 미안한 기색을 비치며 사과했다.
마강진을 잡으며 했던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으므로.
하지만 한상우는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괜찮습니다. 그건 돌발 상황이었으니까요. 일반인들이 찍은 거라 삭제하는 게 빠를 수도 없고요. 애초에 영원히 막을 수 있을 거란 생각도 안 했습니다. 그리고… SSS급 던전을 클리어하면 더 이상 정보 통제도 힘드실 테니, 그 부분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이번 일은 말 그대로 돌발적이었던 만큼 대응하거나 대비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초에 정체를 숨기기로 한 건 충분한 힘을 축적할 때까지만 하기로 마음먹었었다.
레벨이 350을 돌파하고, 캐릭터도 다섯 명이나 소환할 수 있게 된 이상 더는 억지로 숨길 필요가 없었다.
헌터로서 높은 자리로 올라갈수록, 이번처럼 얼굴을 숨기기는 점점 힘들어질 텐데 만약 SSS급 던전까지 클리어하게 된다면?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의심을 사게 될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부터 조금씩 정체를 드러내 세상에 나갈 기지개를 켜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한상우는 나름의 계획을 가지고 행보를 이어나가고 있었는데 어째서일까?
한상우의 말에 최대천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렇군요.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니 다행입니다. 다만 SSS급 던전 레이드는… 잘 모르겠습니다. 추진이 될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한상우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최대천이 SSS급 던전 레이드가 추진이 안 될 수도 있다는 투로 얘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오늘 모인 건, SSS급 던전 레이드를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흐음, 그게….”
한상우의 물음에 최대천이 주위를 돌아보며 말끝을 흐렸다.
아무래도 복도 군데군데 서 있는 경호원들의 귀가 걱정되는 듯한 모양이었다. 이에 한상우가 옆에 매직킹에게 명령을 내렸다.
‘매직킹, 방음 결계.’
-알겠습니다, 로드.
[캐릭터 : 매직킹이 결계를 사용합니다.]
파캉-!
매직킹이 [결계]를 사용하자,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은은한 색깔의 차이가 드러났다.
이제 이 안에서의 행동과 대화는, 외부에서는 온전히 인식할 수 없다.
최대천도 어떤 스킬인지 대략적으로 느꼈는지 감탄을 내뱉었다.
“이건… 결계로군요. 새로운 동료분이신 것 같은데… 다양한 스킬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청장님께서는 본 적 없으시겠군요. 조만간 저희 길드에도 가입할 예정입니다. 그럼 슬슬 말씀해주시겠습니까? SSS급 던전 레이드가 추진되지 않을 수도 있는 건가요?”
한상우는 단도직입적으로 이유를 물었다.
최대천은 매직킹을 슬쩍 쳐다보고 호기심을 가졌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본론으로 돌아와 대답했다.
“확률은 반반입니다. 세계에서 아직 클리어한 유례가 없는 등급이니만큼, 참가할 SS급 헌터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데 디바인 실드 소속 SS급 헌터 다섯 명 모두 연락이 되지 않으니까요. 만약 그들 없이 레이드를 진행한다면… 결과는 볼 것도 없습니다. SSS급 던전은 SSS급 헌터도 실패한 일이니까요. 어차피 실패할 레이드라면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더라도 헌터들의 희생을 최소화하는 게 나을 거란 생각입니다.”
“그럼 강남은 초토화될 텐데요.”
“인프라가 많이 파괴되겠지만 차라리 바깥에서 싸우면 후퇴라는 선택지가 생깁니다. 아이템을 얻진 못해도 전투의 리스크를 대폭 줄일 수 있는 것이죠.”
최대천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SSS급 던전 레이드를 성공할 가능성은 극히 낮으니 차라리 던전 브레이크를 기다리자는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SSS급 던전은 브레이크가 발생해도 몬스터가 일정 반경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 그것을 믿고 헌터를 잃는 대신 강남을 버린다.
최대천은 이러한 계획을 미리 생각해둔 듯했다.
“그리고 이게 제가 한상우 헌터님을 여기까지 부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나중에 취소된다 해도 SSS급 던전 레이드에 도전할 헌터를 모집하긴 할 텐데, 저는 한상우 헌터님께서 지원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한상우 헌터님은 지금 대한민국 헌터계의 가장 소중한 자원이시니까요. 1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이만큼 성장한 헌터계의 신성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최대천의 말은 진심이었다.
한상우의 실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실력을 믿고 있으니 아끼고 싶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걸 어떻게 말한다….’
한상우로서는 난감할 따름이었다.
던전 브레이크가 터진 뒤에 보스 몬스터를 처치하여 업적을 클리어해도 되긴 하지만 그럴 경우, 도시가 너무 많은 피해를 입어버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신은 SSS급 보스 몬스터를 두 번이나 처치한 경험이 있기에 SSS급 던전 레이드에 자신이 있었다.
물론, 퀘스트를 통해 들어간 특별한 사례였기에 실제 SSS급 던전은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SSS급 보스 몬스터를 이미 처치해봤으니 크게 겁을 먹을 필요는 없었다.
한상우는 최대천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SSS급 던전 레이드에 꼭 참여하고 싶습니다.”
“으음… 진심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한상우 헌터님의 결정을 막을 권한은 없습니다. 하지만… 절차상 지원 불가한 부분은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무슨 말씀이시죠?”
“모든 게 정해진 건 아니지만 SSS급 던전 레이드는 SS급 던전 클리어에 참여한 헌터들로만 구성하기로 내부적으로 결정된 사안입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 한상우 헌터님께선 지금 S급 던전까지만 클리어하신 상태로 알고 있습니다. SSS급 던전 레이드에 지원할 자격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지요.”
최대천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상위 랭크의 던전을 가려면 직전 랭크 던전의 클리어 경험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 공식적으로 한상우는 최대 S랭크 던전의 클리어 경험을 보유했다.
다른 때라면 모를까, 전국적으로 연합이 결성되는 지금은 특별 취급을 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장 클리어하면 되니까요. SS급 던전은.”
“지금 당장 말씀이십니까?”
“예, 지금 클리어하면 해결되는 문제 아닌가요? SS급 던전 중에 보스 몬스터만 처치하면 되는 곳이 있다고 들었는데 거길 가면 될 것 같습니다.”
“허….”
한상우는 폰을 꺼내 던전 정보를 보며 말했다.
최대천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리더니 이내 진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한상우 헌터님. 헌터님이 강하신 건 저도 알지만 SS급 던전이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No. 616 던전은 보스 몬스터 혼자라고는 하지만, 그만큼 다른 SS급 보스 몬스터와는 궤를 달리합니다. 그래서 SS급을 포함해 최소 15명 이상의 인원으로 입장하는 걸 권장하고 있고요.”
“알고 있습니다만… 괜찮습니다. 여기 있는 저희 셋만으로도 충분해요.”
“좀처럼 믿기 힘든 말씀이군요.”
“그럼 제가 SS급 던전을 클리어하는 걸 직접 보여드리죠. 그러면 믿으시겠습니까?”
한상우는 최대천을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렇게까지 하면, 최대천은 더이상 반대하지 못할 거다.’
도전을 가장한 도발이었다.
최대천도 그 기류를 읽은 듯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죠. 하지만 자신있게 말씀하신 만큼, 레이드 자체에는 절대 도움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최대천은 한상우의 도발을 받아들였다.
한상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당연하죠. 만약 실패하면 깨끗하게 포기하고 청장님의 말을 따르겠습니다.”
“좋습니다. 다만 SSS급 던전에 대한 대응 때문에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반나절 정도가 고작일 것 같군요.”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SS급 던전의 보스 몬스터가 얼마나 강하든 저희한텐….”
한상우는 땡길거야와 매직킹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1분이면 충분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