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13장 기지개(16)
* * *
쿵-!
“아오, 하루아침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서울 강남의 한 술집.
키 190cm에 수염이 덥수룩한 40대 남성이 맥주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그러자 그 뒤로.
“크으…!”
딱-! 쿵-! 탁-!
같은 테이블의 사내 셋도 맥주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팀장님. 진짜 너무합니다. 이건 길드에서 저희를 버린 거예요!”
“아니, 저희만 SSS급 던전에 차출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말이 좋아 특수 임무지, 사실상 가서 뒈지라는 거잖아요!”
“젠장, 이게 다 서울역 거래소의 사이코패스 녀석 때문입니다. 그 녀석만 아니었어도 저흰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예요!”
널따란 술집에 울려 퍼지는 신세 한탄.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네 사람의 정체는 바로, 서울역 거래소에서 한상우에게 참교육을 당했던 유칼 길드의 길드원이었다.
한바탕 사건이 벌어진 후.
장용진의 팀원들은 유칼 길드로부터 징계를 받았다.
팀장 장용진이 그간 여러 거래소에서 진상을 부렸다는 것과, 그런 팀장을 비호하기 위해 팀원들이 상습적으로 민간 구역에서 스킬을 사용했던 것이 길드장의 귀에 들어가 처벌을 받게 된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공식적인 징계는 아니었다. 길드장이 그들에게 내린 형벌은 바로 SSS급 던전 레이드 연합의 짐꾼이라는 ‘특수 임무’의 강제 차출.
겉으로는 세계 최초로 SSS급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는 영광을 준다는 것이었지만, SSS급 던전의 클리어 확률이 희박하다는 걸 생각하면 실상은 징계로 활용돼 네 사람을 사지로 내모는 것이었다.
SSS급 던전에 고작 A급과 B급 헌터들을 보내다니.
아무리 짐꾼 역할이라고 해도 생존율이 현저하게 떨어질 게 분명했다.
“팀장님, 진짜 들어가실 겁니까? 이거 들어가면 저희 다 죽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강철만이나 지소영 같은 랭커들도 참여 안 한대요.”
“제길, 어쩌겠냐. 안 들어가면 길드장한테 죽게 생겼는데. 그 뭐냐… 전복위화였나? 아무튼 오히려 좋을 수 있어. 진입하는 것만으로도 돈도 빵빵하게 주는데 클리어라도 하면 바로 대박나는 거니까. 만약 위험해 보이면 탈출석으로 도망치면 그만이고.”
“근데 탈출석을 쓸 수는 있을까요? 그거 구하기도 힘들고, 입구 포탈까지 돌아와야 하지 않습니까. SSS급 던전에서 탈출석으로 빠져나왔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는데요.”
“레이드할 때 후방에만 있으면 돼, 짜샤. 어차피 짐꾼이잖아? 어쨌든… 오늘은 마시고 죽자!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면 돼!”
자칫 잘못하다간 SSS급 던전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지만 장용진은 애써 잊고 맥주잔을 채웠다.
수틀리면 도망치면 그만이고, 클리어한다면 짐꾼이라 해도 최초의 SSS급 던전 클리어를 경력으로 포장해 평생 떵떵거리며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장용진은 팀원들과 가게가 마감할 때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으어, 취한다….”
술자리가 끝나자 야외 주차장에 세워둔 차로 걸어가 운전을 하려 했다.
그때였다.
“저 녀석, 확실해?”
“예, 그렇습니다. 이름 장용진. 유칼 길드의 헌터로, 이번 SSS급 던전 레이드 연합에 짐꾼으로 참가 예정입니다.”
“후우, 개 같은 자식. 사람 되게 기다리게 만드네.”
어두컴컴한 주차장 구석에서 로브를 눌러쓴 두 신형이 걸어 나와 장용진에게 접근했다.
“으음? 너네 뭐…. 윽!!”
푹-! 털썩-!
저항할 틈도 없었다.
목에 단검이 꽂혔다.
장용진은 힘없이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 뒤로.
“흐흐, 얼마 만에 먹는 인간의 피인지 모르겠네.”
로브를 입은 신형 중 하나가 무릎을 꿇더니 이번엔 단검으로 장용진의 심장을 내리찍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취이이이이익-
장용진의 몸에서 수분이 빠져나가듯, 온몸이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진 것이다.
마치 미라와 같은 모습.
“……!”
이에 옆에 서 있던 동료는 놀란 듯 몸을 움찔거렸고.
“왜? 생명 흡수하는 거 처음 봐?”
“예? 아…. 그, 그렇습니다. 방시현 님.”
장용진의 생명을 흡수하던 방시현은 로브를 입은 동료, 비서 윤채연을 올려다보며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킥킥, 왜 놀랐는지 맞춰볼까? 너, 내가 좀비나 뱀파이어처럼 목을 물어뜯을 거라 생각했지?”
“…맞습니다.”
“그건 옛날 방식이지, 요즘 누가 야만스럽게 물어? 좀비도 아니고. 뭐… 정 보고 싶다면 네 목 물어줄까?”
“아, 아닙니다! 이미 적응해서 굳이 안 봐도 괜찮습니다!”
방시현이 날카로운 윗니를 드러내 보이자 윤채연은 당황하며 뒷걸음질 쳤다.
마치 포식자 앞에선 피식자 같은 모습.
“왜 그렇게 기겁해? 내가 무섭나? 아, 그렇다면 약한 놈으로 변해줄게.”
방시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꾸물꾸물- 쿠구구구궁-!
방시현의 온몸이 꿈틀거리고, 우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점점 커지더니 이내 장용진의 모습으로 변했다.
“어때, 이제 안 무섭지?”
얼굴과 체형, 그리고 목소리까지.
방시현은 완벽하게 장용진으로 바뀌었다.
흡수한 상대방의 힘과 외모를 최대 한 달까지 모방할 수 있는 스킬, [의태]를 사용한 것이다.
“그, 그럴 리가요. 모습이 바뀌어도 방시현 님의 위용은 여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기세를 감춘다는 걸 깜빡했네. 모처럼 흡수한 건데 들키면 안 되지.”
윤채연의 아부에 방시현은 씩 웃더니 바닥에 널브러진 장용진의 길드복 외투를 주워 들었다.
실행 자체는 쉬웠지만, 과정은 제법 공을 들인 일이었다.
SSS급 던전 레이드 연합의 인물 중, 단독으로 다니며 이런 허점을 보이는 인물을 찾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지부 정보원들의 수도 많이 줄었고.
다행히 첫 단추는 잘 꿰었다.
이제 이틀 뒤에 있을 레이드에 잠입하면 작전은 거의 다 성공한 거나 다름없었다.
“마음 단단히 먹는 게 좋을 거야. 앞으로 놀랄 일은 얼마든지 많을 테니까.”
밤이 깊은 새벽.
장용진으로 변신한 방시현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대한민국 최초의 SSS급 던전 레이드 연합 구성.
전 세계의 주요 뉴스는 한국의 SSS급 던전에 대한 내용으로 도배가 되었다.
대한민국의 수도에 갑자기 등장한 SSS급 던전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것이다.
경제, 사회, 안보 할 것 없이 모든 이슈가 SSS급 던전 레이드 연합에 빨려 들어갔다.
어쩔 수 없었다. 아직까지 전 세계 그 누구도 클리어하지 못한 SSS급 던전에 도전한다는 의미도 컸지만, 그 과정이 매끄럽지 않아 언론들이 다룰 내용이 많았던 것이다.
대표적인 게 SS급 헌터들의 부재였다.
강철만, 지소영, 추성태, 서지환, 성재경.
SSS급 던전을 클리어하려면 SS급 헌터가 모두 투입되어도 될까 말까인데, 무려 SS급 헌터 다섯 명의 연락이 두절됐다.
SSS급 던전이 발생한 지 사흘이 넘도록 여전히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연합 지원 인원도 저조했다.
던전 브레이크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 데다 SSS급 레이드 자체도 처음이어서, 헌터청에선 파티가 아닌 연합으로 공략대를 구성하기로 했는데 참여한 길드들이 많지 않았다.
애초에 계획하기론 S급 이상으로 200명이 넘는 헌터들을 투입시킬 계획이었지만 지원하는 인원이 거의 없었다.
결국, 공략대의 최종 선발 인원은 104명에 그치고 말았다.
심지어 공략대엔 B급 헌터도 일부 존재했는데 대부분이 길드에서 버림받은 사람이거나 여러 이유로 돈이 급해 나온 헌터들이었다.
산 넘어 산,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국내에 남아 있던 SS급 헌터인 황현성과 안지은이 연합을 지휘하는 대장으로 부임하긴 했지만 객관적인 전력으로 봤을 때, SSS급을 클리어하기엔 부족했다.
<[긴급] 강철만 외 4명 여전히 연락 두절.>
<[종합] 8명의 SS급 헌터 중, 단 두 명만 참여하는 SSS급 레이드. 이대로 괜찮은가?>
<[속보] 최대천 헌터청장, SSS급 던전 레이드는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라 밝혀.>
<[심층] AI 분석 결과, SSS급 던전 레이드 성공 확률 1%도 안 돼.>
주요 언론과 외신들도 SSS급 공략대를 비관적인 전망으로 바라봤다.
그래서일까.
“반갑습니다, 헌터 여러분. 이번 SSS급 던전 레이드는 대한민국의 운명이 달린 일입니다. 지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본격적인 레이드에 앞서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SSS급 던전이 어떤 형식으로 진행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여 선두는 SS급인 저 안지은과 황현성이 지킬 겁니다. 상황에 따른 몇 가지 대형을 공유 드릴 테니, 보고 숙지해주세요.”
SSS급 던전 근처에 지어진 간이 천막 안.
SS급 헌터인 황현성과 안지은이 던전 진입에 앞서 브리핑을 했지만 귀담아듣는 헌터들은 많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다들 SSS급 던전 공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상황이 안 좋아지면 탈출석으로 도망쳐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한상우가 그랬다.
‘최전선은 SS급과 S급이 맡고, A급 이하는 지원만 하는 방식인가. 하긴, 실력이 안 되면 오히려 방해만 되니 이게 최선이겠어.’
다른 사람들은 공무원 헌터들이 나눠주는 브리핑 종이를 쳐다도 보지 않았지만 한상우는 꼼꼼하게 검토하며 숙지했다.
물론 개인적인 정비도 꼼꼼하게 했다.
‘레벨은 이 정도면 됐고, 포션도 빵빵하게 준비했어. 좋아, 이제 들어가기만 하면 되겠네.’
최대천과의 레이드 이후 생겼던 사흘간의 준비 기간.
그동안 한상우는 시간을 허투루 버리지 않고, SS급 던전을 수없이 돌았다.
SS급 던전 진입에 대해서는 최대천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승인해 주었기에, 파밍은 거침이 없었다.
식사 시간과 수면 시간을 극단적으로 줄이고, 거의 사흘 밤낮 동안 끈임없이 레이드를 돌며 남는 시간에는 하이어의 플레이도 잊지 않았다.
그 결과.
[상태창]
[이름 – 한상우]
[레벨 – 420]
레벨이 420까지 올랐다.
350 부근에서 시작하였으니 사흘 동안 70레벨이 증가한 것이었다.
SSS급 던전 클리어를 위해 효율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그 과정에서 보상도 획득했다.
400레벨이 되자 [군주의 힘]을 획득해 특성을 강화할 수 있었고, 한상우는 [지휘]를 강화시켜 동시 소환 가능한 캐릭터 수를 5개로 끌어올렸다.
SSS급 던전 안에서 제장이와 연진을 사용할지는 미지수지만,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우선 보상으로 받은 건 적극적으로 쓸 수 있도록 기반을 닦아 놓은 것이다.
더불어.
땡길거야와 다크어둠, 그리고 매직킹도 아예 미리 소환해 비전투모드로 돌려놨다.
한상우가 고개를 돌리자 각자의 무기를 닦으며 레이드를 준비하는 세 캐릭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SSS급 던전에 진입해 소환하면 능력이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으니 아예 처음부터 소환해버린 것이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한상우의 군주 길드원으로 등록되어 있었기에, 문제 될 것도 없었다.
만반의 준비는 마쳤다.
이제 남은 건.
[아홉 번째 업적 – SSS급 던전을 클리어 하세요(0/1)]
[히든 퀘스트 : 군주의 업적(8/10)]
[모든 업적 달성 시, 히든 보상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SSS급 던전을 클리어해 아홉 번째 업적을 달성하는 일뿐이었다.
그때, 간이 천막 입구로 최대천이 들어왔다.
순식간에 고요해진 분위기.
최대천은 근엄한 눈빛으로 공략대를 둘러보며 말문을 열었다.
“진입할 시간이 됐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대한민국의 운명을 짊어진 헌터들입니다. 꼭 성공하길 바라며 무운을 빌겠습니다.”
마지막 발언 후, 최대천의 눈이 한상우를 향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능력이로군요.
한상우의 [캐릭터 소환]을 알게 된 당시, 최대천은 그야말로 경악을 금치 못했고 동시에 그를 위해 무한한 지원을 약속했다.
마침내 시작되는 SSS급 던전 레이드.
한상우는 아직 통성명조차 나누지 않은 공략대원들을 둘러봤다.
전투에 큰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어쨌든 함께 던전에 들어가야 할 인물들이기에 얼굴 정도는 봐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음? 저 녀석은…?”
간이 천막 구석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낯선 얼굴들 사이로 얼마 전, 서울역 거래소에서 봤던 진상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한상우는 장용진에게 다가가 말했다.
“잠깐, 거기. 우리 구면 아닌가?”
“…누구시죠?”
“……?”
“제가 기억력이 안 좋아서….”
“…….”
사실 별로 알은척을 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예전 거래소에서 봤던 진상짓이 생각나, 레이드의 잡음을 미연에 방지하는 차원에서 경고를 하려고 다가간 것이었다.
그런데.
“죄송합니다. 누구신지 잘 모르겠군요. 저는 던전 들어갈 준비해야 해서 이만….”
장용진은 정말로 한상우를 처음 본 사람처럼 태연하게 말하고는 자리를 피할 뿐이었다.
하도 많이 맞아서 공포에 질린 것일까.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전혀 겁먹지 않은 모습이었다.
뭔가 이전과는 미묘하게 다른 태도.
‘뭔가 이상한데…. 그새 무슨 일이 있었나?’
황급히 자리를 피하는 장용진의 모습에 한상우는 볼을 긁적였다.
그리고 그의 이상한 태도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려는 찰나, 이번 레이드 연합의 선봉대인 SS급 헌터 안지은과 황현성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모두 모여주세요!”
간이 천막을 나서자 SSS급 던전 주변을 가득 채운 인파가 눈에 들어왔다.
삼엄한 경비와 열띤 취재 열기 속.
한상우는 공략대와 함께 SSS급 던전에 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