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화
14장 선택의 끝(1)
[SSS급 던전에 진입했습니다.]
[선택의 끝에 도달하여 던전을 클리어하세요(0/1)]
포탈을 통과해 던전에 입장하자 허공에 떠오르는 메시지.
‘모두 경계 태세.’
-예, 주군.
그러나 확인할 겨를도 없이, 나는 던전에 진입하자마자 만렙 캐릭터 세 명과 함께 경계 자세를 취했다.
던전 중엔 진입하자마자 기습이 들어오는 경우도 있기에, 시작부터 긴장을 늦춰선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번 던전은 시작부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로드.
-함정도 없는 것 같습니다, 마스터.
휘이이이잉-
설원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만 뺨을 스칠 뿐 몬스터나 함정 등 신변을 위협하는 요소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후우, 시작부터 몰아치지는 않네요.”
“그러게요. 다행입니다. 가뜩이나 합도 맞춰보지 않은 상태인데, 시작부터 전투가 벌어졌으면 난감했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진입하자마자 경계 자세를 취했던 SS급 헌터 안지은과 황현성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 모두 내 생각과 마찬가지로, 시작부터 전투가 벌어질 걸 염두에 둔 것이다.
확실히 당장 전투가 벌어진다면 제대로 싸우지 못할 것 같기는 했다.
“여기가 SSS급 던전이라고?”
“겉보기엔 일반 던전이랑 크게 다를 게 없는데?”
“던전 클리어 조건은 조금 특이해.”
공략대 헌터 백여 명은 SSS급 던전에 진입하고도 나나 SS급 헌터들처럼 잔뜩 경계하는 자세를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최선두에 SS급이 서 있고, 다수가 모여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이 헌터들을 느슨하게 만든 듯했다.
가장 강하고 경험도 많을 SS급 헌터가 경계를 하는 데에 비해, 그 아래인 A급 헌터들이 긴장하지 않는 모습이 조금 아이러니하긴 했다.
안지은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일단 들어오긴 했는데… 어느 쪽으로 가야 할까요? 앞의 설원은 너무 넓고, 뒤쪽은 다리가 끊어졌는데.”
“흠…. 알 수가 없네요. 선택의 끝에 도달하라니. 보통은 보스 몬스터를 처치하라는 임무가 나오는데, 역시 여긴 특별하네요. 일단 여기에 베이스 캠프를 치고, 주변을 좀 더 살펴볼까요?”
“날씨를 보아하니 폭풍이 몰아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여기에 자리를 잡기보단 빨리 길을 정해서 이동하고, 안전한 곳에 자리를 잡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단순히 진행 방향을 정하는 것에부터 의견이 부딪쳤다.
나는 시작부터 조금씩 마찰이 생기고 있는 두 SS급 헌터를 조용히 쳐다봤다.
황현성과 안지은.
두 헌터 모두 다른 SS급들에 비해 최근에 SS급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비슷한 경력이라 그런지 서로 양보할 기미가 안 보였다.
안 그래도 SS급치고 강철만, 지소영, 서지환 같은 길드장까지 맡고 있는 국내의 주력 헌터에 밀리다 보니 서로에 대해서는 물러설 수가 없는 것이다.
“저기… 한상우 헌터님 생각은 어떠세요? 아직 SSS급이 되기는 전이었지만, 한 번 들어와 보신 적이 있잖아요?”
“그걸 S급 헌터에서 물어서 어쩌자는 겁니까? 그런 걸 결정하려고 SS급인 우리가 온 거 아닙니까?”
안지은이 내게 의견을 구하자 황현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놓고 불편함을 드러냈다.
“최대천 청장님 말씀 못 들으셨어요? 한상우 헌터님은 경험자고, 실력도 믿을 수 있으니 의견을 적극적으로 구하고, 따르라고 하셨잖아요.”
“현장 판단이 최우선인 거 모릅니까? 그리고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우리보다 나을 순 없죠. 만약 그랬다면 저분이 SS급이 되셨을 테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왜 그렇게 과민 반응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의견은 들어봐야죠.”
“크흠….”
나는 입도 뻥끗하지 않았는데 두 사람은 날 두고 대립했다.
사실 할 말은 있었다.
우리가 진입한 곳은 내가 이은하와 나머지 헌터들을 데리고 탈출했던, 출구 포탈이 있던 지점인 듯했다.
배경이 넓어졌다고 해야 할까.
주변에 빼곡하게 있던 나무들은 모두 날아갔으나 저 멀리 끊어진 다리를 보니 좀 더 확실해졌다.
게임으로 치자면 맵이 확장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점을 감안했을 때, 진행 방향은 끊어진 다리 쪽이 아니라 설원 방향이라는 걸 유추할 수 있었는데, 굳이 말해봤자 둘 사이의 다툼만 격화될 것 같아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길게 말할 시간도 없었다.
황현성과 안지은이 설전을 벌이고, 백여 명의 헌터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구경하던 그때.
설원 끝에 퍼진 뿌연 안개 사이로.
쿵-! 쿵-!
커다란 실루엣을 가진 몬스터 한 마리가 지축을 울리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저, 저건…?”
“모두 전투 태세! 산개해서 진영을 갖추세요!”
갑작스러운 몬스터의 등장에 두 SS급 헌터를 비롯, 공략대 전체가 무기를 들고 진영을 갖추었다.
다행히 최소 A급이나 되는 만큼, 상황이 발생하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반면, 나는 별 동요 없이 녀석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는 걸 지켜봤다. 사실 놈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녀석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주군, 전방에서 적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속도는 느립니다, 로드.
-죽일까요, 마스터?
실루엣이 드러나기도 전에 내 옆에 서 있는 세 캐릭터가 몬스터의 등장을 감지하고, 대안도 제시했다.
솔직히 마음만 먹으면 공략대가 인지하기도 전에 처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니, 일단은 지켜보자. 이 파티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해야 돼.’
나는 전언으로 공격을 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아무런 피해 없이 SSS급 던전 공략을 마치는 게 가장 좋은 결과이긴 하지만, 그 전에 아군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해야 효과적인 공략법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 나름대로 전략을 짜는 사이.
[설원의 예티(SSS)]
쿵쿵-! 쿵쿵-!
“흐워어어어!!”
SSS급 몬스터가 자태를 드러냈다.
4m에 달하는 거대한 몸집에 흰색 털이 수북한, 고릴라와 비슷하게 생긴 녀석이 흰 털을 휘날리며 가슴을 두드렸다.
보스 몬스터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협적이긴 해도, 그 정체는 어디까지나 SSS급 던전의 잡몹.
그렇기 때문에 솔직히 나는 별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SSS급이 최상급이라는 인식 때문일까?
“SSS…. SSS급 몬스터야!”
“미친, 저걸 상대하라고…?”
S급과 A급, 그리고 B급으로 이루어진 공략대의 헌터들은 공포에 사로잡힌 듯 공격할 엄두도 못 내는 모습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주춤거리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SSS급은 어느 정도인지 한번 확인해보죠!”
“네, 후속타 날리면서 지원할게요!”
황현성과 안지은은 각자의 무기인, 거대 망치와 창을 들고 땅을 박찼다.
두 사람은 SSS급 몬스터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 모습이었는데 확실히 자신감에 걸맞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아아아앗! 맹폭타!!”
먼저 선두로 달려 나간 황현성이 높게 점프해 양손으로 거대 망치를 내려찍자.
쩌어어어어엉-!!
굉음과 함께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뒤로 안지은이 던지는 기다란 창도 막강한 화력을 뽐냈다.
타닥- 타닥- 파지지직-!
“번개의 일격!”
스파크가 일어나는 창을 예티를 향해 투척하자 화염 속에서 막대한 전격이 터져 나왔다.
두 기술의 조합이 자아낸, SS급 몬스터라도 당장에 명을 달리했을 파괴력.
그런데.
“크워어어어!!”
예티는 두 사람의 협공을 버텨냈다.
나름 힘을 끌어모은 상급 스킬이었음에도 일격에 처치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피해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예티의 머리에선 피가 흘러내리고, 가죽 여기저기가 불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그러나 목숨을 완전히 끊지는 못했다.
황현성의 망치는 예티의 손에 잡혀 있었고, 안지은의 창은 복부를 꿰뚫긴 했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아직 목숨이 붙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건 곧 반격할 기회가 있다는 뜻이었다.
“흐어어어어!!”
예티는 괴성을 내지르며 한 손에 쥔 망치를 땅으로 내리꽂았다.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망치를 놓아야 하지만, 그러면 무기를 넘기게 되는 꼴이었다.
황현성은 거대 망치를 쥔 채 그대로 땅과 부딪쳤다.
“크악!!”
설원에 퍼지는 비명.
예티는 반대쪽 손을 들어 반격을 감행했다.
그대로 타격을 당한다면 SS급인 황현성이라도 중상을 입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
“망치 놓고 나와요!”
어느새 예티의 머리 위로 도약한 안지은이 새로 소환한 창을 역수로 쥐고 내리찍은 것이다.
이번 공격은 이전의 것처럼 전격을 머금진 않았다.
그러나 창날로 오러를 방출해 길고 강력했으며, 정확했다.
안지은이 내리찍은 창이 예티의 정수리에 정확히 꽂혔다.
푹-! 쿵-!
단말마도 없었다.
예티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고.
[설원의 예티(SSS)를 처치했습니다.]
우리에게 경험치를 선사했다.
‘오, 괜찮은데?’
나는 턱을 매만지며 감탄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SS급 헌터 둘이서 SSS급 몬스터를 처치했다는 게 인상이 깊어서였고.
두 번째는 다 같이 던전에 들어와 파티 상태가 됐음에도 독존의 디버프가 발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상태창을 열어 독존의 특성을 다시 한번 살펴봤다.
[특성 3 : 독존 - 군주는 남 밑에 들어갈 수 없는 지고한 존재입니다. 자신보다 레벨이 높은 이와 파티를 맺을 경우, 획득 경험치가 99% 감소합니다. 반대로 혼자서 몬스터를 처치할 경우에는 획득 경험치가 2,000% 상승합니다.]
레벨이 높은 이와 파티를 맺을 경우, 획득 경험치 99% 감소.
[독존]의 디버프 효과는 레벨이 높은 이가 없으면 발동하지 않는 듯했다.
물론, 몬스터의 경험치는 파티원들의 수에 따라 자동으로 나뉘어져 혼자 잡을 때보다는 낮아지지만 적어도 이제 파티를 해도 무료 봉사를 하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걸 통해 알 수 있었다.
내 현재 레벨은 420이니 황현성과 안지은의 레벨이 420보다 낮다는 것이다.
SS급의 분류는 401레벨 이상으로, 구간이 넓어서 같은 SS급이라도 실력이 천차만별이다 보니 이런 일도 생기는 것이다.
‘뭔가 감회가 새롭네. 나보다 레벨이 낮은 SS급 헌터라니.’
나는 그렇게 새삼 내가 얼마나 큰 성장을 이루었는지 실감하며 두 헌터의 예티 처치에서 긍정적인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공략대의 헌터들은 다른 느낌을 받은 것일까.
“으, 으으…. 으아아아! 난 나가야겠어! SS급 헌터도 버거워하는 몬스터랑 우리가 어떻게 싸워!!”
얼마 안 되는 합으로 SSS급 몬스터를 잡았건만, 공략대의 헌터 중 하나는 오히려 절망을 느꼈는지 겁에 질린 목소리로 그렇게 외치더니 뒤쪽의 입구 포탈을 향해 달려갔다.
아무래도 탈출석을 이용해서 밖으로 나가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퉁-!
“악!!”
탈출석의 정석적인 사용법대로 입구 포탈을 통과했지만 던전을 나가지는 못했다.
호기롭게 입구 포탈을 지나쳤지만 탈출석이 없는 것처럼 몸이 그대로 포탈을 관통하여 눈바닥에 엎어지고 만 것이다.
진상은 곧 밝혀졌다.
공략대의 헌터가 손에 쥔 탈출석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뭐, 뭐야? 탈출이 안 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