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화
14장 선택의 끝(3)
[선택의 길]
[첫 번째 갈림길에 도착했습니다.]
[두 개의 포탈 중 한 곳으로 진입하십시오.]
“어, 어라? 뭔가 메시지가 나타났어!”
“나도야!”
“선택의 길? 이게 뭐지? 던전에서 이런 문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공략대 헌터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소리쳤다.
모두 B급 이상의 헌터들이지만 던전에서 추가 퀘스트를 받아 본 경험은 처음인 모양이었다.
반면, 나는 숱하게 겪어왔던 일이기에 놀라울 건 없었다. 대신 다시 뜬 시스템창을 꼼꼼히 확인하면서, 눈앞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존재가 내뱉는 말을 유심히 들었다.
“선택의 끝은 인생의 수많은 갈림길에서 후회 없는 선택을 반복해야 도달할 수 있다네. 현명한 배분과 도전을 통해, 저주받은 이 땅을 부디 회복시켜주길 바라네.”
지팡이를 들고 로브를 눌러쓴 인물은 그렇게 혼자서 중얼거리더니 서서히 사라져갔다.
점점 투명하게 변하는 형체.
“자, 잠깐…!”
황현성은 서둘러 다가가 손을 뻗었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노인의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던 신형은 잡히지 않고 그대로 사라졌다.
그 모습에 안지은이 미간을 찌푸리며 내게 말을 걸었다.
“한상우 헌터님, 혹시 이전에 비슷한 걸 본 적 있으신가요? 인식표가 없는 걸 봐선 몬스터는 아닌 것 같은데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단서를 남겼다는 겁니다. 다른 던전들에서는 없었던 단서를요. 그걸 안 것만 해도 큰 수확입니다.”
나는 정체불명의 신형이 있던 자리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눈밭 위에 놓여 있는, 네모난 종이를 집어 들었다.
<선택의 길>
<포탈로 진입해 임무를 수행하세요.>
<포탈당 반드시 한 명 이상의 인원이 진입하여야 합니다.>
<선택한 포탈의 임무를 클리어해야만 다음 길이 열립니다.>
<다른 포탈에 진입하는 인원이 없거나 다른 쪽의 임무가 실패할 때마다 힘을 흡수한 최종 보스의 스탯이 2배씩 증가합니다.>
<경고 : 포탈 진입 시, 선택을 번복할 수 없습니다.>
종이에는 여러 규칙과 함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최상단에는 최종 보스 몬스터를 뜻하는 해골 그림이, 최하단에는 포탈을 의미하는 원 두 개가 있고, 중간에는 모닥불 그림과 물음표, 원 등이 여러 구간에 걸쳐 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건… 던전 탐색 RPG 장르에서 나오는 맵이랑 완전 똑같잖아?’
비록 처음 보는 지도였으나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종이에 적힌 던전의 규칙은 통상 로그라이크라 불리는, 매 게임마다 무작위로 생성되는 던전을 선택해 진행하는 게임의 구성과 꽤 많이 유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파악한 건, 이 중에서 나밖에 없는 듯했다.
“한상우 헌터님, 그건…?”
“이곳의 규칙이 적혀 있습니다. 아무래도 SSS급 던전은 단순히 몬스터를 처치하면 되는, 다른 던전들과는 다른 것 같군요.”
“이게 뭐지…?”
“뭐랄까…. 굉장히 신기한 방식이네요”
종이를 황현성과 안지은도 읽고, 이내 공략대 헌터들까지 모두 돌려봤지만.
“대충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래서 뭐 어떻게 하라는 거야?”
“중간에 모닥불 표시랑 물음표는 뭐지?”
다들 감도 잡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뭐랄까.
내 입장에선 헌터들이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한편으론 이해가 되기도 했다.
던전 탐색 RPG 장르는 게임 유저 중에서도 크게 대중적인 장르는 아니니까.
특히, 대헌터시대 이후로는 거의 고전게임 정도로만 남아 있는 수준이기도 하고.
그래서 나는.
헌터들에게 규칙을 설명하는 대신 앞으로 나아갔다.
해당 장르를 한 번도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경험없이 말로만 설명해 이해시키기란 매우 어렵기도 하거니와.
촤아아악-! 촤아아악-!
정면의 설원 위로 두 개의 포탈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어차피 헌터들은 SSS급 던전 클리어에 크게 도움이 되지도 않기에 설명해봤자 에너지 낭비일 뿐이었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포탈당 반드시 한 명 이상의 인원이 진입하여야 합니다.]
[방문하지 않는 구간이 발생할 경우, 보스 몬스터의 스탯이 2배 증가합니다.]
바로 포탈 앞에 떠 있는, 종이에 쓰여진 것과 똑같은 규칙이었다.
어떤 포탈이든 반드시 한 명 이상이 진입해야 한다.
나는 공략대를 돌아보며 말했다.
“종이 다 보셨으면 저한테 다시 주시겠습니까?”
“여기 가져왔어요, 한상우 헌터님. 그런데…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규칙에 따르면 인원이 나뉘어야 할 것 같은데요.”
안지은이 종이를 가져오며 내 의중을 물었다.
나는 혹시 빠트린 게 없는지 다시 한번 규칙들을 살펴보며 대답했다.
“저와 길드원들의 전력을 최대한 비슷하게 맞출 겁니다. 나머지 분들은 알아서 하시면 될 것 같고요.”
거만하게 들릴 수 있지만 나는 솔직하게 얘기했다.
공략대의 헌터들은 SSS급 던전 클리어에 실직적인 도움은 되지 않기에 어느 포탈에 들어가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캐릭터들의 분배다.
던전 탐색 RPG 장르의 가장 큰 특징은 무작위성이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경험하며 죽음을 반복하고, 그 가운데 규칙성과 공통점을 발견해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이건 게임이 아닌 현실의 던전이었다. 죽음을 반복하면서 던전에 대한 경험을 쌓아가는 방법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 경험을 쌓을 필요도 없이 힘으로 찍어 눌러버리는 것뿐이다.
‘아마 난도도 꽤 높겠지. 문제는 선택의 길이 중간에 네 갈래로 나누어진다는 점이야.’
처음에는 포탈이 두 개이지만 최종 보스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길이 네 개로 갈라지는 지점도 있었다.
만렙 캐릭터들을 한 명씩 배치해도 한 곳이 비어버린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예닐곱 거점만 통과하면 최종 보스한테 도달한다는 것이었고, 그중 한 부분은 모닥불로 표시된 휴식 구간이 두 군데나 있었다.
만렙 캐릭터들의 전투력을 고려해 보면, 거점이 적은 쪽을 내가 가는 게 안정성 면에서 좋을 듯했다. 혹시 내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나머지 길의 만렙 캐릭터들에게도 영향이 갈 테니까.
나는 내 뒤로 서 있는 캐릭터들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숙지시켰다.
‘땡길거야와 다크어둠, 너희 둘은 왼쪽 포탈로 진입해서 임무를 수행한다. 중간에 포탈이 갈라지는 지점에서는 각자 찢어져서 단독으로 클리어하도록.’
-명 받들겠습니다, 주군. 암살자가 짐이 될 것 같지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누가 할 소릴. 비록 깡통 기사라는 방해물이 있지만 완벽하게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마스터.
‘그래, 둘 다 적당히 하고…. 매직킹, 너는 나와 같이 오른쪽 포탈로 들어간다.’
-함께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로드. 힘든 일 없으시도록 최선을 다해 보좌하겠습니다.
만렙 캐릭터들이고, 거리가 떨어지는 만큼 소모되는 마나가 적지 않을 것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른 공략대 헌터들만 보냈다가 실패하면, 희생은 희생대로 치르고 보스는 보스대로 강해질 테니까.
나는 그렇게 캐릭터들에게 명령을 내린 뒤, 공략대에게도 간단하게 전략을 설명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들 봐서 아시겠지만 이 던전은 모든 포탈을 클리어해야 하는 곳입니다. 목숨이 달려 있는 만큼, 어느 포탈로 갈지는 각자의 선택에 맡기겠습니다.”
“꼭 규칙을 따라야 할까요, 헌터님?”
“함정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방금 로브를 쓴 인물이 한 말이 진짜인지도 밝혀지지 않았고요.”
중간중간 질문을 던져대는 헌터들이 있었으니까.
“…바로 이러한 점이 SSS급 던전의 위험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종이에도 명시되어 있지만 던전의 규칙을 따르지 않을 경우, 던전의 난도는 클리어가 힘들 정도로 올라갑니다.”
내가 답변을 시작하자 헌터들은 입을 다물고 경청했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왜 이런 요구 조건이 붙었는지, 앞서 로브를 입은 존재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중요한 건 시스템은 절대적이라는 겁니다.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어 다른 방법을 찾으시겠다면, 그렇게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어쨌든 저와 길드원들은 주어진 규칙을 따라 클리어할 테니까요.”
용족 군단의 던전과 신성의 힘 던전 등.
비록 퀘스트에서 파생된 던전이었지만 SSS급 몬스터가 나왔던 던전들은 모두 기존의 던전과는 클리어 방식이 달랐다.
단순히 몬스터를 처치하는 게 아니라 던전 내부에 고유의 기믹이 있었고, 그걸 해결해야만 클리어를 할 수 있었다.
아마 전 세계에서 SSS급 던전이 클리어된 적이 없는 것도, 강력한 몬스터 외에도 이렇듯 기존과 다른 시스템이 한몫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라 남에게 강요할 마음은 없었다.
“그럼 저희는 먼저 가겠습니다. 선택은 각자 알아서 하시길.”
들어오든가 말든가.
‘모두 진입.’
-예, 주군.
나는 공략대 헌터들에게 선택권을 넘긴 뒤, 캐릭터들과 함께 포탈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 순간.
화아아아악-!
풍경이 바뀌면서 첫 번째 스테이지가 나타났다.
[선택의 길 1]
[몬스터를 모두 처치하세요(0/20)]
[얼음갈퀴 전사(SSS)]
설원에서 동굴로 바뀐 배경.
그리고 반대편에는 예티보다 큰 몸집에 양손에 갈퀴를 장착한 몬스터 스무 마리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도열해 있었다.
조금 전에 상대했던 예티보다 강해 보이는 기운.
그러나 나는.
“시작하자, 매직킹. 후방에서 지원해줘.”
“예. 일단 선빵 치겠습니다, 로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SSS급 몬스터들을 향해 쇄도했다.
매직킹이 있어 든든하기도 했거니와 조금 전 예티와 싸워본 결과, SSS급일지라도 잡몹은 더 이상 내게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캬라악!!”
이러한 내 거침없는 돌진에 화가 난 것일까.
얼음갈퀴 전사들은 양손을 휘둘러, 갈퀴에서 형성된 오러를 내게 날려댔다.
물론, 당하는 일은 없었다.
최초의 공격은 피하고, 나머지는 화산방패를 들어 [용암 전개]로 막아냈으니까.
오히려 피해를 입는 건 얼음갈퀴 전사들 쪽이었다.
“저런 싹수없는 얼음과자 놈들이? 내가 선빵 치려고 했는데 감히 선수를 쳐?”
화륵-! 콰과과과광-!!
“캬우우욱…!”
[캐릭터 : 매직킹이 인페르노를 사용합니다.]
[캐릭터 : 매직킹이 얼음갈퀴 전사(SSS)를 처치했습니다.]
[…….]
[캐릭터 : 매직킹이 얼음갈퀴 전사(SSS)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선제공격을 빼앗긴 매직킹이 분노에 찬 [인페르노]를 사용하자, 땅에서 거대한 불꽃 기둥이 올라오며 한꺼번에 10마리가 넘는 몬스터들을 집어삼킨 것이다.
순식간에 절반으로 줄어버린 적의 수.
이 정도면 나 혼자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어느덧 코앞까지 좁혀진 거리.
나는 [압도]를 방출해 놈들의 사기와 능력치를 깎았다.
그리고.
“하아아앗!!”
[발화]로 화산검을 강화시킨 뒤, [요새 뚫기]를 내질러 최전선에 있는 몬스터 세 마리를 관통해 버렸다.
[얼음갈퀴 전사(SSS)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단 일격에 육체 대부분을 잃고, 다리만 남아버린 몬스터들.
물론, 부작용도 존재했다.
[요새 뚫기]의 동작이 워낙 크다 보니 양옆에서 반격을 감행해오는 녀석들까지는 견제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녀석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 신경 쓸 필요조차 없었다.
“감히 어딜!”
굳이 말하지 않아도, 매직킹이 알아서 [아이스 스피어]와 [화염 방사]를 연계해 놈들을 처치해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큰 동작으로 인한 허점은 사라졌고, 공격을 이어갈 기회도 얻었다.
나는 달려가던 가속도를 유지, 전방에 남아 있는 다섯 마리에게 접근해 [반월 베기]와 [만월 가르기]를 먹인 뒤, [급소 찌르기]로 마무리했다.
중간중간 얼음갈퀴 전사들이 입에서 상대방을 둔화시키는 듯한 얼음 알갱이를 방출하고, 갈퀴를 휘둘러 반투명한 오러를 날려댔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제국기사단의 검술의 연계기가 완성됐습니다.]
[연계 효과 : 월광 폭발]
콰아아아아아앙-!!
녀석들의 공격과 신형은 푸른 화염에 먹혀 모두 사라지고 말았으니까.
[얼음갈퀴 전사(SSS)를 처치했습니다.]
[얼음갈퀴 전사(SSS)를 처치했습니다.]
[얼음갈퀴 전사(SSS)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한 호흡.
한 순간에 이어진 연계 공격들에 SSS급 몬스터 스무 마리가 전부 쓸려나갔다.
그러자.
“저게… 말이 돼?”
“우와, 미쳤다…. 이쪽으로 들어오길 정말 잘했어.”
언제 따라 들어왔는지 등 뒤에서 감탄과 황당함이 뒤섞인 감상이 들려왔다.
나는 이마에 난 땀을 닦으며 몸을 돌렸다.
얼음 동굴 입구로 안지은과 공략대 헌터 오십여 명이 들어와 있었다.
아무래도 반반씩 나누어 들어온 듯한 모양이었는데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혼자서 레이드를 끝냈는데 다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날 바라보기만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공략대를 바라보며 나직이 화두를 던졌다.
“구경 잘하셨으면 아이템이라도 주워주시는 게 어떨까요?”
“아, 알겠습니다, 한상우 헌터님!”
언제 내 이름이 퍼졌는지는 몰라도 공략대 헌터들은 화들짝 놀라며 대답하더니, 우르르 달려 나와 얼음갈퀴 전사들이 드랍한 아이템을 줍기 시작했다.
계약상 던전에서 발생하는 수익은 동등하게 나누어야 하니 누가 줍든 상관없지만, 레이드에 참가한 이상 전투가 안 된다면 최소한 짐꾼 역할이라도 하는 게 맞았다.
그건 SS급 헌터인 안지은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 이질적인 게 눈에 들어왔다.
오십 명에 가까운 공략대 헌터들이 모두 내 쪽으로 달려와 아이템을 줍고 있는데,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미동조차 하지 않는 신형이 하나 있었다.
심지어 낯익은 얼굴이었다.
“이봐, 장용진. 넌 왜 안 움직이고 가만히 있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녀석에게 일갈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