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14장 선택의 끝(4)
* * *
‘강남은 쑥대밭이 될 것이다.’
SSS급 던전 생성 작전이 성공한 후, 성북동 저택에 앉아 있던 방시현은 그렇게 예상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SSS급 던전은 전 세계 헌터 그 누구도 클리어하지 못한 등급의 던전이니까.
그래서 한국에서 SSS급 던전 공략대를 구성하겠다고 발표했을 당시, 방시현은 쾌재를 부르며 SSS급 던전에 들어가는 헌터를 물색했다.
어차피 SSS급 던전 레이드는 실패할 테니, 혼란 속에서 몰래 다른 헌터들을 처치하며 힘을 흡수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준비는 완벽했다.
SSS급 던전 레이드가 이루어지기 전, 공략대에 참가하는 장용진의 외형을 빼앗았다.
운도 따라줬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지만 강철만과 지소영을 비롯, 큰 걸림돌이 될 SS급 헌터 대부분의 연락이 두절 되었다고 했다.
공략대에 참여하는 SS급 헌터의 수는 단 두 명.
이로써 SS급 던전 공략대의 구성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약해졌고, 300명을 목표로 했던 참가 인원도 대폭 줄어 최종 인원이 100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방시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비록 수는 줄었지만 이 정도라면 SSS급 던전 공략은 실패로 돌아간 거나 다름없으니, 자신은 그 속에 스며들어 하나씩 하나씩 헌터들을 흡수하며 힘을 키우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방시현은 장용진으로 변신, 속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SSS급 던전 공략대에 합류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잠깐, 거기. 우리 구면 아닌가?
공략대 집결 장소인 간이 천막 안.
SSS급 던전 공략대의 일원 중 한 명이 익숙한 얼굴이었던 것이다.
한상우.
마강진을 처치하고, 루미나스 한국 지부를 쑥대밭으로 만든 그 녀석이 자신을 보고 알은체하며 다가왔다.
순간, 방시현은 뜨끔했다.
뭔가 추궁하는 듯한 말투에 한상우가 자신의 본 모습을 알아보고 다가온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건 아닌 듯했다.
-누구시죠?
-…….
-제가 기억력이 안 좋아서….
방시현이 적극적으로 모른 척하며 자리를 피하자 한상우도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반응을 보아하니 외형을 훔친 장용진과 얼굴 정도는 아는 사이인 것 같았는데 방시현은 굳이 연기하지 않았다.
[의태]를 수없이 사용해본 결과, 어색하게 연기하면 아주 작은 실수만으로도 의심을 살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모르는 척하는 게 차라리 나았다.
다행히 한상우와 장용진은 그리 가까운 사이인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문제는 같은 팀의 팀원들이었는데… 그건 다행히도 지내다 보니 별문제는 되지 않았다.
장용진의 평소 성정 덕분인지, 얼굴을 구기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니 기분이 나쁜 줄 알고 눈치 보기 바빴다.
그렇게 방시현은 나름대로 자신의 연기와 겹쳐준 운 덕분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함께 있는 시간이 길다면 모를까, 어차피 하루 이틀만 지나면 모두 끝날 것이기에 완벽하게 연기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대망의 SSS급 던전 레이드 날.
방시현은 자신의 보배인 흡수의 단검을 만지작거리며 헌터들의 힘을 흡수할 각을 쟀다.
시작은 좋았다.
-으, 으으…. 으아아아! 난 나가야겠어! SS급 헌터도 버거워하는 몬스터랑 우리가 어떻게 싸워!!
설원 위, SS급 헌터들이 고전할 정도로 강한 SSS급 몬스터의 등장에 공략대 헌터들은 혼비백산했고.
-뭐, 뭐야? 탈출이 안 되잖아….
-미친, 그럼 여기서 꼼짝없이 죽어야 한다는 소리야!?
-악! 미, 밀지 마…!
-비켜! 이런 데서 죽을 순 없어!!
탈출석도 작동하지 않아 헌터들은 패닉에 빠졌다.
심지어 그 뒤로 20마리에 가까운 SSS급 몬스터도 나타났다.
‘흐흐, 슬슬 시작해볼까.’
방시현은 속으로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품 안의 흡수의 단검을 꺼낼 준비를 했다.
조만간 헌터들은 예티와의 전투로 인해 빈사 상태가 될 것이고, 자신은 그 틈을 타 여유롭게 식사를 즐기면 될 것이었다.
물론 다른 헌터들의 얘기를 미뤄봤을 때, 탈출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탈출석]
[등급 : 신화]
[효과 : 파괴 시, 던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포탈이 생성됩니다.]
[일회용입니다.]
[현재 상태 : 사용 가능]
방시현에게는 문제될 게 없었다.
과거, 열쇠를 통해 들어갔던 SSS급 던전에서 구했던 신화 등급 탈출석.
당시에는 탈출석이 신화 등급인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었지만, 우습게 보고 팔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방시현은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공략대 끄트머리에 서서 헌터들이 죽어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또 예상치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분명 자신의 예상대로라면 이제 헌터들이 전멸하는 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오히려 쓸리는 건 SSS급 몬스터인 예티들이었기 때문이다.
한상우.
파장의 중심에는 또 그가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도 그가 길드원들과 함께 예티를 순식간에 쓸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너무나도 간단하게.
방시현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와, 미쳤다. 저분들 어디 소속이시지? 처음 보는데 SS급 헌터인 황현성과 안지은보다 더 센 거 같아!
-아까 안지은 헌터님이 한상우 헌터님라고 불렀던 거 같은데? 옆에 있는 외국인 헌터님들 이름은 모르겠고.
-저분들이 우리의 희망이야! 살려면 따라가야 해!
예티들이 몰살당한 후, 공략대 헌터들이 한상우와 그의 길드원들을 찬양하며 쫄래쫄래 따라갔다.
작금의 상황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좀처럼 믿기 힘든 게 사실이었다.
선택의 길을 마주하고.
‘이제부턴 손도 못 쓰겠지. 그래야 해. 그래야 한다고!’
방시현은 초조함에 손톱을 뜯으며 한상우가 들어간 포탈로 따라 들어갔는데.
단 일격.
조금 전, 예티를 처치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SSS급 몬스터들을 한 번에 처치해버린 것이다.
방시현은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슬슬 공포와 무력감에 빠진 헌터들을 하나둘 흡수했어야 하는데, 공략대는 활기가 넘쳐났다.
심지어.
“이봐, 장용진. 넌 왜 안 움직이고 가만히 있지?”
한상우에게 찍히기까지 하고 말았다.
SSS급 몬스터 처치 후, 한상우가 공략대 헌터들에게 아이템이라도 주울 것을 요청했는데, 상황을 살피다가 혼자 남아 눈에 띄어버린 것이다.
애초에 짐꾼 역할이라는 걸 인지하고 온 다른 헌터들은 바로 본분에 따라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루미나스에서도 특별감찰관으로서 대우받았던 방시현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버렸다.
마음속에서 눈치보다 자존심이 앞섰던 것이다.
그러나.
“그, 그게….”
작금의 상황에 반항할 수도 없었다.
한상우뿐만 아니라 그의 길드원과 공략대 헌터들까지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자신이 루미나스의 특별감찰관이라 하더라도 이 많은 인원과 정면으로 대결하면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었다.
결국, 방시현은.
“하, 하하…. 잠시 부츠의 가죽끈이 풀려서요.”
자존심을 접었다.
당장은 힘을 드러낼 때가 아니라 판단한 것이다.
물론, 선택의 결과는 매우 쓰라렸다.
“…시간이 없으니까, 농땡이 부리지 말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예, 한상우… 헌터님.”
상관도 아닌 자의 명령을 따르고 아이템을 줍는 허드렛일이나 해야 하다니!
먹이로 생각했던 인물의 명령을 듣고 있자니 속이 뒤집혔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방시현은 다른 공략대 헌터들을 따라 마정석 등 잡템을 주우며 호시탐탐 한상우의 뒤를 노렸다.
‘분명 기회는 온다. SSS급 던전이니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야.’
던전의 등급이 SSS급인 만큼 분명 한상우의 뒤를 칠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좀처럼 그 기회는 오지 않았다.
선택의 길에 입성한 이후, 포탈을 세 개나 통과하며 각종 함정과 SSS급 몬스터들을 마주했지만 그때마다 한상우와 안경을 낀 외국인 헌터가 너무나도 훌륭하게 클리어해냈다.
‘이거… 설마 이러다가 SSS급 보스 몬스터까지 처치하는 거 아니야?’
방시현의 마음속으로 어느덧 초조함이 피어올랐다.
그런데 기다리면 반드시 때가 온다고 했던가.
마침내 기회가 나타났다.
“어라, 한상우 헌터님. 이번엔 포탈이 또 두 갈래로 나누어지네요.”
“여기서 잠시 흩어져야겠군요. 지도에 따르면 이번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면 다시 합류하게 될 겁니다.”
“그렇네요. 인원 배분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저 혼자 오른쪽으로 가겠습니다. 나머지 분들은 제 길드원과 함께 왼쪽으로 가주세요.”
세 번째 스테이지를 클리어하자 두 개의 포탈이 생겨났는데, 한상우 혼자서 오른쪽으로 진입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의 말에 안지은은 놀란 표정으로 재차 물었지만.
“네? 혼자서 가시겠다고요? 괜찮으시겠어요?”
“예, 모든 길을 클리어하지 않으면 보스가 강화되니까요. 제 걱정은 마시고 왼쪽 길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한상우는 별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하며 오른쪽 포탈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에.
“헛, 진짜 혼자서 오른쪽으로 가시려는 건가 봐. 괜찮을까?”
“괜찮지 않을까? 아까 SSS급 몬스터도 한 번에 잡으시던데.”
“맞아. 누가 누굴 걱정하냐. 우린 우리 안위나 신경 쓰면 돼. 그게 한상우 헌터님을 도와드리는 거야.”
공략대 헌터 중 몇몇도 우려를 표했으나 대체적으로는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지금까지의 전투를 통해 한상우의 실력을 보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자신들이 누굴 걱정할 처치가 아니라는 걸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평가 속에서 방시현은 나름의 계획을 세웠다.
‘좋아, 모르는 척 따라 들어가서 배신해 버리자.’
한상우가 혼자서 오른쪽 포탈로 가면 그 뒤를 따라가 뒤통수를 치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럼 진입하도록 하죠.”
“네, 왼쪽 포탈은 제가 먼저 들어가서 경계하도록 할게요.”
안지은은 공략대 헌터들과 함께 왼쪽 포탈로 들어갔다.
쉬익- 쉬익- 쉬익-!
하나둘 포탈 속으로 들어가는 헌터들.
방시현은 마지막까지 남은 후, 오른쪽 포탈 앞에서 마나 포션을 마시고 있는 한상우를 따라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슬쩍 오른쪽으로 발길을 튼 그 순간.
“야, 너. 어디 가냐?”
“……!”
누군가 방시현의 뒷덜미를 잡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회색 머리칼의 안경 헌터가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잘생긴 얼굴을 한껏 구긴 살벌한 표정.
방시현은 그 괴리감에 몸을 흠칫 떨었는데 그보다 더 놀라운 게 있었으니.
‘무, 무슨 힘이 이렇게…!’
바로 손아귀의 힘이었다.
몬스터와의 전투에서 지팡이를 휘두르고, 원소형 마법을 쓰기에 힘이 약한 마법 스킬 계열 헌터인 줄 알았는데, 단순 악력만 봐도 근접 계열의 S급 헌터보다 강한 것 같았다.
‘이거… 정면으로 맞부딪치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차라리 나중에 기습하는 게 나아.’
방시현은 빠르게 판단을 내린 뒤, 변명을 시작했다.
“이, 이쪽 아닌가요?”
“넌 왼쪽 오른쪽도 모르냐?”
“그게 잘 못 들어서….”
“귓구멍에 어묵을 처박았나…. 빨리 왼쪽으로 안 들어가? 그리고 너, 아까부터 우리 로드를 노려보는데…. 확 눈깔 파버린다?”
잘생기고 실력도 좋은데 입은 왜 이렇게 거칠단 말인가?
살면서 몇 번 경험해본 적 없는 위협과 욕에 방시현의 정신은 절로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 눈이 원래 좀 찢어진 관상이라….”
“그래, 약삭빠르고 못생긴 얼굴이긴 한데…. 조심해. 너, 내가 예의주시하고 있으니까.”
살면서 이렇게 수모를 당해본 적이 있을까.
비록 [의태]로 모습을 바꾼 상태였기에 자신이 아닌 장용진의 모습이었지만, 자괴감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동시에 수포로 돌아 가버린 계획.
‘크윽, 이 치욕은 반드시 갚아주마…!’
방시현은 오른쪽 포탈로 진입하는 한상우를 슬쩍 흘겨본 다음, 후다닥 왼쪽 포탈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