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7화
15장 스타의 삶(9)
* * *
-우와! 여기는 엄청나게 덥네용, 사장님!
-이곳은 로드께서 거주하시던 곳보다 기온이 높군요.
-사람들도 훨씬 많고 다양한 것 같습니다, 주군.
-모인 이들의 실력도 평범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마스터.
사우디아라비아의 킹 칼리드 공항.
전세기에서 공항으로 이동하자 캐릭터들이 전언으로 저마다의 감상을 쏟아냈다.
나도 비슷한 감상이었다.
공기는 뜨겁고 건조했고, 공항 안에는 인파라고 표현해도 부족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사우디의 공항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있다니.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크게 이상할 건 없었다.
이유야 내 옆에 있는 강철만의 입에서 바로 나올 정도로 뻔한 것이었으니까.
“EX급 던전 레이드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도 많은 헌터들이 온 것 같군요.”
“그러게요. 실력 있는 헌터는 죄다 모인 것 같네요.”
나는 강철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공항에는 의자뿐만 아니라 통로까지 꽉 찰 정도로 많은 이들이 있었는데, 착용하고 있는 장비들이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웠다.
일단 평범한 의복을 입은 사람은 없고, 대부분 아이템 같은 옷이나 갑옷을 입었는데, 겉으로만 봐도 최소 전승 등급 이상으로 보였다.
게다가.
몇몇은 뉴스에서 봤을 정도로 유명한 SS급 헌터들이었다.
일본의 SS급 헌터 야마모토나 독일의 SS급 헌터 휴고 등, 각 나라를 대표하는 헌터들이 공항 통로에 서서 사우디 왕실 측 관계자들과 대화를 나누도 있었다.
공항에 모인 헌터들의 몸값을 합치면 산정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전 세계의 유명 인사들이 다 모인 듯했다.
물론, 우리도 그에 뒤지진 않았다.
다른 나라의 헌터들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 우리에겐 세계에 셋뿐인 SSS급 헌터인 강철만이 있으니까.
“오오, 저기 봐. 한국 헌터들이 도착했어!”
“강철만이 온다고 하더니 진짜였군. 이번에 SSS급 헌터가 되었다지? 예전에 봤을 때보다도 훨씬 강해진 것 같아 보여.”
“그런데 한상우도 온다고 들었는데 누구지? 선두에 있는 사람인가?”
“한상우? SSS급 던전을 클리어한 그 헌터 말하는 거지?”
우리가 나오자 시선이 집중되며 공항이 한 층 더 시끄러워졌다.
특히 시선은 강철만보다 나에게 조금 더 집중되었다.
내가 SSS급 던전을 클리어한 공략대의 주력이었던 것도 있지만, 주된 이유는.
“하, 한상우 헌터님…!”
공항 로비로 나오자 수많은 인파 중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나와 내게 넙죽 절을 한 탓이었다.
“……?”
“오랜만에 뵙습니다, 한상우 헌터님.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함께 얼음 요새에서 함께 레이드를 했던 유상준이라고 합니다.”
“아…. 오랜만이네요. 목 부상이 심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다친 건 괜찮습니까?”
다소 뜬금없었지만, 이름과 사건을 듣자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유상준은 몸을 일으키더니 다시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때, 루미나스한테서 구해주신 덕분에 살았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헌터 활동을 하고 있고요. 오늘부터 원정대분들의 통역과 안내를 맡게 되었으니 편하게 대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 그렇군요.”
갑자기 뛰어나와서 왜 그런가 했는데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때, 수행원으로 따라온 신대훈이 내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미리 말씀드린다는 걸 깜빡했네요. 이번 원정에서 유상준 헌터가 도움을 주기로 했습니다. 물론 사우디에 있는 한국 대사관도 도와주겠지만,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헌터면 더 실전적인 도움을 줄 것 같아서요. 마침 유상준 헌터는 저희와 인연이 있기도 하고요.”
확실히 신대훈의 말이 맞았다.
“반갑습니다, 유상준 헌터. 잘 지냈나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강철만 길드장님. 아신 길드를 나올 때, 감사했습니다. 길드장님께서 지급해주신 위로금과 퇴직금 덕분에 이곳에서 정착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입으셨던 피해에 비하면 약소할 뿐이죠.”
유상준은 아신 길드 소속이었기에 나뿐만 아니라 강철만과도 인연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탈퇴를 했고, 그렇게 높은 등급의 헌터가 아니라 강철만과 긴밀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초면인 것보다는 나았다.
게다가 사우디의 현지 상황에 대해서도 빠삭한 모습을 보여줬다.
공항에 진입했을 때, 우리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사내 중 한 명이 다가오자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소개한 것이다.
“엇. 이분은 사우디아라비아의 헌터청장, 아흐마드입니다.”
아흐마드는 수행원들을 대동한 채 다가오더니 환영 인사와 함께 무어라 말하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물론, 나는 외국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기에 적절하게 반응할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로드, 외람된 말씀이오나 혹시 이 나라의 언어를 습득하지 못하셨습니까?
뒤에서 사태를 지켜보던 매직킹이 전언을 보내왔다.
나는 악수를 청한 아흐마드의 오른손을 맞잡으며 전언으로 답했다.
‘응, 그런데?’
-그렇다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로드.
어떻게 돕겠다는 건지는 물을 필요가 없었다.
매직킹이 지팡이를 휘두른 순간.
화아악-!
머릿속이 갑자기 맑아지더니 뭔가 들어오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리고 그 뒤로.
“평화가 당신에게 있기를. EX급 던전이라는 위기에 도움의 손길을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당신에게도 평화가. 반갑습니다. 저는 EX급 던전 한국 원정대를 이끌게 된 한상우입니다.”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아랍어가 나왔다.
“……!”
“아, 아랍어?! 한상우 헌터님, 아랍어도 할 줄 아셨습니까?”
주변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인사를 주고받던 아흐마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SS급 헌터들과 수행원들도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사실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냥 조금 할 줄 압니다.”
나는 태연하게 대꾸하며 속으로 매직킹을 칭찬했다.
‘대단한데, 매직킹? 언어를 이렇게 한 번에 습득시킬 수 있다니 아주 유용해.’
-이건 마법 중에선 기초적인 것에 불과하니 너무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 로드.
매직킹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릴 따름이었다.
물론, 별일이 아닌 건 아니었다.
내가 능숙한 아랍어로 인사를 주고받은 것만으로도, 아흐마드와 사우디 헌터청 수행원들의 눈빛이 매우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대우도 마찬가지였다.
“저를 따라오시죠, 한상우 헌터님. 저쪽에 왕세자님께서 헌터분들을 맞이하고 계신데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뭐지? 레이드가 결정되고 나서 배운 것 같지는 않고, 원래 아랍어를 할 줄 아는 건가?”
“어느 쪽이어도, 모국어도 아닌데 저 정도로 구사하긴 쉽지 않은데 말이지.”
“뭐하고 있어? 빨리 한국 헌터님들 모시지 않고! 기다리시게 하지 말고!”
아흐마드는 나를 왕세자에게 소개시키려 했고, 수행원들은 난리통에 입국한 우리들이 해야 할 수속이나 화물 등 잡다한 일들을 최대한 빨리 처리해주려고 했다.
사소한 것이지만, 지금 이 순간 줄 수 있는 서비스를 최대한 제공하려 한 것이다.
사실 이게 EX급 던전 레이드에 있어 큰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았다.
기껏해야 피로도를 줄이는 정도일까.
하지만 첫 대외 활동이 우호적으로 진행됐기 때문인지, 그것만으로도 꽤나 기분이 좋았다.
나는 그렇게 한국 원정대의 대장으로서 칼리드 공항을 돌아다녔고.
무수히 많은 악수의 요청을 받았다.
* * *
“후우, 피곤하네.”
리야드의 고급 호텔.
나는 커다란 침대에 털썩 누워 고급스러운 자재로 휘황찬란하게 디자인된 천장을 바라봤다.
이게 스타의 삶인 걸까.
오늘 하루에만 몇 번의 악수를 한 건지 모르겠다.
해야 할 일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이곳에 오기 전엔 그냥 비행기를 타고 오기만 하면 EX급 던전에 바로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사우디아라비아 헌터청의 조사 결과, EX급 던전은 참여 인원수에 제한이 없었고 던전 브레이크까지도 보름 정도 남은 상태라 최대한 많은 인원을 모아 입장하고자 한 것이다.
덕분에 레이드는 각 나라에서 모인 원정대가 연합을 이루는 형식으로 진행될 것 같았는데, 이렇게 되면 각 원정대끼리의 소통 문제도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언어가 다르기에 완벽하게 합을 이룰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서로 임무가 주어지면 적절히 배분하고 수행할 수 있도록 안면 정도는 터야 하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강철만 보고 대장하라고 할 걸 그랬나.’
어쨌든 지금까지의 일만 놓고 보면 대장 자리는 상당히 피곤했다.
그래도 보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헉! 여기 수영장이 있어용, 사장님!”
“왕실만 한 크기는 아니지만 이곳은 로드께서 거주하시던 곳보다 훨씬 크군요.”
“수색 결과 함정이나 폭발물은 없습니다, 주군.”
“다른 생물의 흔적이나 침입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마스터.”
“그래, 다들 고생 많았으니 푹 쉬도록 해.”
내가 바쁜 만큼 캐릭터들은 여유롭게 지낼 수 있었다.
호텔 방이 거의 다 찼음에도, 왕세자가 특별히 배려해준 덕분에 리야드의 특급 호텔에서도 최고급 스위트룸을 캐릭터들과 함께 쓰게 된 것이다.
덕분에 긴장도 조금 풀어졌다.
비행기에선 종종 캐릭터들에게 말을 거는 이들이 있어 신경이 쓰였는데, 여기엔 우리밖에 없어 방해받지 않을 수 있었다.
어쨌든 바쁜 일은 지나갔고, 지금은 푹 쉬기만 하면 됐는데….
이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잠은 비행기에서 너무 많이 잤고, 하이어를 플레이하자니 충성도 업적 때문에 [캐릭터 소환]을 해제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비스 지역이 아닙니다.>
<해당 IP로는 접속할 수 없습니다.>
혹시나 해서 하이어에 접속해봤는데 다른 나라다 보니 연결이 되지 않았다.
이제 남은 건 그냥 멍하니 있거나 TV를 보거나, 그것도 아니면 강철만이나 서지환 등 다른 SS급 헌터들을 찾아가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가만히 있자니, 성미에 차지 않았다.
헌터가 된 이후로, 나는 단 한 순간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유상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헛! 한상우 헌터님, 전화 받았습니다! 무슨 일이실까요?
“밤늦게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유상준 헌터님. 혹시 지금 진입할 수 있는 SS급 던전 있을까요?”
-SS급 던전이요?
“예. 길드원들이랑 레이드를 뛸까 해서요. 비행기를 오래 탄 탓에 잠도 안 오고, 전략 체크도 할 겸요.”
-넵!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안 되더라도 한상우 헌터님 부탁이라면 무조건 되게 만들어야죠.
“잘됐네요. 감사합니다.”
-사우디 헌터청에 요청만 하면, 바로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보통 밤에는 레이드를 잘 안 뛰니까 다른 사람도 없을 테니까요. 요청은 제가 대리로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부터 언제까지로 요청하면 될까요?
다행히 레이드를 할 수 있었다.
나는 호텔 창가에 서서 저 멀리, 어둠 속에 가려진 지평선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밤새도록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