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화
15장 스타의 삶(12)
‘뭐지?’
이질적으로 움직인 셀리나 칸데바의 그림자.
자연 현상이라기엔 뭔가 부자연스러웠다.
대체 무슨 현상일까.
순간 의구심이 들었지만, 찰나에 벌어진 일이라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셀리나 칸데바 님. 어려운 시국에 한달음에 달려와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기쁩니다.”
셀리나는 사우디 국왕이 오자 다시 생글생글 웃었고, 커졌던 그림자도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잘못 본 건가?’
얼굴 표정이야 그렇다 쳐도 그림자가 바뀐 건 조금 이상했다.
그러나 그걸 파고들 시간은 없었다.
“자, 그럼 세계 각국의 헌터님들이 모두 모였으니 왕궁으로 이동해서 EX급 레이드의 구체적인 작전을 짜도록 할까요? 이제 EX급 던전 브레이크까지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으니 빠르게 진행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우디 국왕이 주위로 모인 헌터들을 돌아보며 본격적으로 작전을 짤 것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예, 그러도록 하죠.”
국왕을 따라 왕궁 안으로 이동하는 헌터들.
나는 한 차례 고개를 갸웃거린 후, 마찬가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또다시 특이한 게 눈에 들어왔다.
헌터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나고 있는 와중에도, 셀리나 칸데바는 수행원들을 대동한 채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안 가십니까?”
“제 역할은 디바인 실드 소속 헌터들의 무사 도착과 참여를 확인하는 것이라서요. 작전엔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네, 살펴 가세요. 아참, 한상우 헌터님. 혹시 아직도 신성력을 전수받으실 생각 없으신가요? EX급 레이드에 분명 도움이 될 텐데요.”
“예, 일없습니다.”
거머리 같다고 해야 할까, 투철한 영업 사원 같다고 해야 할까.
셀리나는 집요하게도 저번에 거절하여 불발되었던 신성력 전수를 계속해서 권유했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나는 셀리나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 후, 어색하게 미소 짓는 그녀를 뒤로한 채 사우디 국왕의 뒤를 따라갔다.
* * *
“…여전히 당돌하군요, 한상우 헌터.”
연회장을 나오는 길.
셀리나 칸데바는 입고 있던 로브의 모자를 신경질적으로 젖히며 입가를 떨었다.
그러자.
정장을 입은 수행원 중 한 명이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셀리나 님? 안색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근처에 병원이 있는지 알아볼까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조금 피곤해서요. 설마 이런 상황에서도 제안을 거절당할지는 몰랐는데….”
평소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셀리나가 이 정도로 노골적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이유는, 바로 한상우였다.
EX급 던전 레이드라는 전대미문의 상황.
셀리나는 세계 각국의 협조를 받아 디바인 실드의 단원 전원을 집결시켰다. 방금 연회장에서 모두가 온 것을 확인하기도 했다.
여기까진 그녀의 생각대로였지만, 가장 큰 변수가 아직 통제되지 않은 상태였다.
한상우.
SSS급 던전을 클리어한 원정대의 주역이 이번 EX급 던전 레이드에 참여한다는 것이었다.
SSS급 던전 이상의 위험이 따르는 EX급 던전에 가는 상황이니만큼, 이번에는 신성력 전수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단칼에 거절당하고 말았다.
신성력 전수를 먼저 제안하고, 그걸 여러 번 거절당한다는 상황이 처음인 셀리나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수행원마저 그 감정의 동요를 느낄 정도였다.
“그렇다면 제가 다시 한번 접근해서 제안해볼까요, 셀리나 님? 금전적인 이득이나 아이템을 제안한다면 혹시 마음을 돌릴지도….”
“아뇨, 지금껏 거절했는데 또 제안한다고 바뀔 것 같지는 않네요. 그리고 괜찮아요. 어차피… EX급 던전에 들어가면 모든 게 끝날 테니까요.”
수행원의 제안에 셀리나는 다시 싱긋 웃으며 친절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그녀의 대답을 수행원은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예? 모든 게 끝나다니요, 셀리나 님?”
한상우에게 신성력 전수를 재차 제안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이해했지만, EX급 던전에 들어가면 모든 게 끝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수행원의 반응에 셀리나는 잠깐 걸음을 멈칫하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아…. 그게… 그냥 비유적인 표현이에요. 이번 EX급 레이드에 많은 디바인 실드들이 참여하니 다 끝난다는 얘기죠.”
“아아, 그런 뜻이었군요.”
“네, 그러니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 알겠습니다, 셀리나 님.”
셀리나는 수행원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설명한 뒤, 다시 선두로 나서 왕궁을 걸어 나갔다.
그리고.
누구도 듣지 못할 정도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진짜로 모든 게 끝날 테니까요.”
아주 잠깐, 셀리나의 얼굴 위로 광기에 찬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 * *
“후우, 드디어 시작이군.”
왕궁에서 출정식과 작전 수립을 마치고 6시간 뒤.
한상우는 킹덤 타워 옆에 솟아난 피라미드 속의 던전 포탈을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굳게 마음을 먹긴 했지만, SSS급 던전보다 더 강하다는 EX급 던전에 진입할 순간이 다가오니 떨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인물들의 태도는 전혀 달랐다.
“EX급 던전이라… 과연 얼마나 셀지 기대되는군요.”
“허허,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군, 성재경 헌터.”
“추성태 헌터님께선 겁이 나시나 봅니다?”
“그럴 리가 있는가. 난 EX급보다 더 높은 등급도 때려잡을 수 있다네!”
성재경과 추성태 등 다른 SS급 헌터들은 우스갯소리를 하며 전혀 긴장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둘뿐만이 아니었다.
EX급 레이드에 참여하는 헌터 대다수가 긴장보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참 희한한 일이었다.
SSS급 던전을 클리어하고, 만렙 캐릭터들을 데리고 있는 자신도 이렇게 조금은 긴장하고 있는데 SSS급 던전도 클리어해 보지 않은 SS급 헌터들이 이렇게 천하태평이라니.
그 위화감에, 캐릭터들도 의아함을 표출했다.
-이제 곧 역대 최고 등급인 던전으로 들어가는데 다들 신기할 정도로 자신감에 차 있네요, 로드.
-마치 사춘기 소년을 보는 것 같습니다. 자신감이 좋긴 하나, 왠지 실질적인 도움은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주군.
-자신감이 과하다 보니 암살자들보다도 단합이 안 될 것 같습니다, 마스터.
-저도용, 사장님! 사람들한테 겸손을 주입시키는 포션이라도 먹여주고 싶은 심정이네요!
매직킹부터 연진까지.
각국에서 손꼽히는 헌터들이 모여 있었지만, 캐릭터들은 그들을 걱정스러운 눈초리고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한상우는 헌터들이 어째서 과한 자신감에 차 있는지 알고 있었다.
조금 전 사우디 국왕과 작전을 수립할 때, 헌터들의 해이함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자 강철만이 따로 말해줬던 것이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헌터들한테서 긴장감을 찾아볼 수가 없군요. 이건 EX급 던전인데 말이죠.
-어차피 EX급 던전에 들어가면 알게 되실 테지만, 한상우 헌터님께만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모인 헌터들 중 대다수가 디바인 실드 소속입니다.
-대다수가 디바인 실드 헌터라고요?
-예. 세계의 고위급 헌터들 중, 디바인 실드에 소속한 비율이 제법 높거든요. 디바인 실드 내부적으로는 EX급 던전에 진입하자마자 신성력을 사용할 겁니다.
-디바인 실드 소속이니 신성력을 사용할 거라는 건 알겠는데, 그게 여유로울 수 있는 이유가 되나요?
-사실, 이번 EX급 던전을 앞두고 셀리나 칸데바 님께서 특별히 신성력을 추가로 부여해 주셨거든요. 인원이 많고, 신성력 또한 다들 평소의 몇 배에 달하는 수준으로 보유하고 있기에 EX급이 얼마나 강하든 충분히 싸울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신성력이 증가한 걸로 그렇게 판단한다라…. 그럼 왜 지금까지 신성력을 부여해서 SSS급 던전을 클리어하지 않은 거죠? 이 정도 인원에 신성력을 부여해서 전력을 올릴 수 있다면, 원래 있던 SSS급 던전도 클리어할 수 있었을 텐데요.
-셀리나 님의 방침이었습니다. 셀리나 님의 신성력도 무한한 것은 아니라, 충분한 여유분을 준비할 필요가 있거든요. 루미나스라는 위험 요소가 있으니까요. 지금은 이렇게 모두에게 힘을 부여하느라, 여유분을 모두 소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유분을 모두 소진했다? 그럼 지금 가장 취약한 상태인 거 아닙니까?
-예, 맞습니다. 그만큼 EX급 던전의 클리어가 중요하다고 판단하신 거겠죠. 그리고 이러한 결정에는 한상우 헌터님의 활약도 많은 기여를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요…?
-예, 한상우 헌터님께서 루미나스 한국지부의 주요 간부와 병력들을 처치하시고, 방시현까지 잡아주신 덕분에 루미나스의 힘이 많이 약해졌거든요. 만약 그러한 활약이 없었다면 셀리나 님께서도 신성력을 여유분까지 모두 쏟아내진 못하셨을 겁니다.
강철만의 얘기는 간단했다.
디바인 실드 단원이 되면 셀리나에게 부여받는 정체불명의 힘, 신성력.
평소 이상으로 부여받은 그 힘이 헌터들의 자신감의 정체였던 것이다.
‘신성력이라….’
한상우는 그제야 헌터들이 어째서 크게 긴장하지 않는지 깨달았다.
다들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설명을 듣고도 바로 납득이 되지는 않았다.
한상우는 여러 SSS급 던전을 돌며 경험했기 때문이다.
고등급 던전의 위험성은 몬스터의 무력보다도, 던전 안에 있는 숨겨진 임무나 기믹의 난이도에서 온다는 것을.
만약 SSS급 던전의 보스 몬스터를 아무것도 없이 정면으로 상대했다면 자신과 캐릭터들도 상당히 고전했을 것이었다.
자신의 경험을 말해줘야 할까.
한상우는 잠깐 고심했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이렇게 자신감이 과한 상태라면 무슨 말을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괜히 말해봤자 겁을 줘서 사기를 떨어트리는 거냐고 핀잔을 듣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게다가 그러기에는 바쁘기도 했다.
EX급 던전에 들어가기 전, 팔찌의 [격상]을 완성해야 했던 것이다.
다행히 작전 회의 이후, 잠깐 짬이 생겼고 한상우는 유상준이 가져다준 지혜의 꽃을 받은 뒤 제장이를 소환하고 [격상]을 완성했다.
그 결과.
[찬란한 대현자의 팔찌]
[등급 : 영웅]
[효과 : 지력 +40, 마력 +80, 마법 저항 +9]
[추가 효과 1 : 마나 증가 - 착용자의 최대 마나를 30% 증가시켜 줍니다.]
[추가 효과 2 : 마법사의 지혜 – 스킬 사용에 소모되는 마나의 양을 40% 감소시켜 줍니다.]
[추가 효과 3 : 현자의 비호 – 착용자에게 가해지는 마법 스킬의 피해량을 10% 감소시킵니다.]
대현자의 팔찌가 찬란한 대현자의 팔찌로 승급되었다.
이로써 [캐릭터 소환]에 따른 마나 부담이 줄어들며 EX급 던전 레이드를 위한 큰 준비가 하나 더 끝났다.
차근차근, 여러 경험과 어우러져 쌓아 올리는 여유의 근거.
반면, 한상우가 보기에 다른 헌터들이 가지고 있는 근거는 굉장히 빈약하게 보였다.
하지만.
‘알아서 하겠지. 어린아이들도 아니고, 각 나라에서 최고라 칭송받는 헌터들이 모였는데.’
한상우는 격상이 완료된 찬란한 대현자의 팔찌를 보며, 다른 헌터들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자신이 신경 쓴다고 개선될 일도 아니거니와.
“EX급 레이드 연합 여러분께 알라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마침내 레이드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국왕의 축복 아래, 전 세계 수백 명의 SS급 헌터와 3명의 SSS급 헌터들이 거대한 포탈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EX급 레이드 연합 전원 진입!”
“진입…!”
과연, 인류 최초로 나타난 등급이자 마지막 업적의 무대이기도 한 EX급 던전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한상우는 긴장과 기대감을 동시에 품은 채 포탈을 통과했다.
그 순간.
[EX급 던전에 진입했습니다.]
[주어지는 임무를 완수하여 던전을 클리어하세요(0/1).]
새로운 메시지와 함께 도시에서 동굴로 풍경이 바뀌더니.
쐐애애애애액-!!
거대한 넝쿨 채찍이 날아들었다.
“미, 미친…!”
“이런 젠장!!”
곳곳에서 터져 나온 욕지거리.
EX급 던전은 시작부터 진입자들을 사지로 몰아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