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3화
16장 군계일학 낭중지추(3)
“저, 저게 무슨…?”
“EX급 몬스터가 저만큼이나…?”
연합 헌터들은 입을 쩍 벌린 채 눈앞의 광경을 바라봤다.
[훈련된 마계 고블린(EX)]
[훈련된 마계 트롤(EX)]
[마족 군단 정예 병사(EX)]
[마족 군단 정예 기사(EX)]
[훈련된 마계 와이번(EX)]
[마족 군단 정예 마법사(SSS)]
[라크시아 연합 기사(SSS)]
[라크시아 연합 마법사(SSS)]
산 아래 펼쳐진 벌판.
요새에서 나온 수천 명의 기사들이 수만 마리에 달하는 마족, 마물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전장은 온갖 검술과 마법이 난무하는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전투라기보다는 전쟁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법한 광경.
연합 헌터들로서도 참전은 감히 엄두도 못 낼 수준이었다.
방금 동굴에서 마계 고블린 백여 마리를 상대하는 데도 그렇게 애를 먹었었는데, 요새 앞 벌판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마계 몬스터들이 존재했다.
심지어, 앞에 상대했던 마계 코볼트는 최약체로 보일 정도로 그 이상의 몬스터들도 보였다.
키가 족히 10m는 될 법한 마계 트롤이 여럿 있었고, 마족 병사와 기사들은 라크시아 연합 기사들을 상대로 창과 검에 오러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었다.
마족 마법사들은 마계 와이번을 타고 날아다니며 파이어볼을 난사하기까지 했다.
그러자.
“…저렇게 많은 몬스터는 대헌터시대 초기 이후로 처음 보는군요.”
“아니, 차라리 대헌터시대 초기 이상입니다. 그땐 C급 이하가 대부분이었지만 저들의 등급은 EX급이에요.”
한상우 옆에서 전장을 지켜보던 칼 제이스와 리 샤오펑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뒤로 강철만이 입을 뗐다.
“설마 저 많은 몬스터들을 저희가 다 처치해야 하는 건 아니겠죠?”
“잘 모르겠습니다. 보통 던전을 클리어하기 위해선, 던전의 몬스터들을 모두 처치해야 하긴 하는데…. 그런데 저 기사들은… 뭐죠? 인식표가 있는 걸 보면 헌터들은 아닌 것 같은데….”
강철만의 물음에 칼 제이스가 답하더니 의문을 덧붙였다.
그때, 한상우가 전장을 주시하며 입을 뗐다.
“게임으로 치자면 NPC 같은 존재라고 보시면 됩니다. 대화도 가능하고, 던전 진행에도 영향을 주죠. SSS급 던전에서 겪었습니다. 그땐 유령 형태였는데 이번엔 기사인 것 같군요.”
“아, 그때 말씀하신 게 이건가 보군요. 들은 기억이 납니다. 선택의 길 초입에서 나왔다고 하셨죠?”
“NPC라…. 정말로 게임 같네요. 저들을 도와서 몬스터들을 처치하면 되는 걸까요?”
“재밌네요, 게임이라니. 제가 게임이라면 환장하는데 잘됐어요.”
던전 안에는 말이 통하는 지성체가 없다는 게 상식이었지만, SSS급 헌터들은 한상우의 말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다.
작전 회의 당시, SSS급 던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보고서를 공유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용족 군단의 던전이나 빛바랜 망자들의 왕이 있던 던전 등을 얘기하면 좀 더 구체적이었겠지만, 거기까지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자신의 능력이나 보상과 관련된 일이기도 하고, 선택의 길에서 있었던 일화를 얘기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되었으니까.
특히 강철만의 경우, 게임을 비유해 설명해서 그런지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이어 랭킹 1위다운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도 다행이네. 이번 던전이 하이어와는 관계가 없어 보여서.’
한상우는 전장을 바라보며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에 하나라도, 하이어와 캐릭터들의 연결점이 드러나서 귀찮아지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문제는 오히려 다른 쪽에 있었다.
칼 제이스가 말했다.
“그런데 저 기사들… 많이 밀리는 것 같습니다.”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모두가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수천의 기사들과 수만의 마족 군단이 충돌하는 싸움.
심지어 등급은 마족 군단이 더 높으니 기사들이 밀리는 건 당연지사였다.
“퇴각! 전원 성 안으로 퇴각하라!”
“퇴각하라!!”
인간 측의 기사들이 방패를 든 채 성문 앞까지 후퇴했고, 마물들은 날카로운 손톱을 휘두르며 따라붙었다.
그 순간.
“발사!!”
“기사들을 보호하라!!”
성벽에 숨어 있던 궁수와 마법사들이 나타나 공격을 쏟아냈다.
지상의 마계 고블린부터 하늘을 나는 마계 와이번한테까지 화살과 마법을 퍼부은 것이다.
나름 허를 찌른 작전.
하지만 그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족 군단의 수가 너무 많은 탓이었다.
기사 근처의 몬스터들은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었으나 벌판에는 아직도 많은 마족과 마물들이 있었다.
심지어.
벌판 저 먼 곳에는 마족 군단의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천막들도 설치되어 있었다.
공성전을 위한 집결지인 듯했는데, 그건 곧, 벌판에 보이는 병력 이상으로 더 많은 후속 병력이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단기전이든 장기전이든 인간 쪽의 패배라는 결과는 명확해 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격차는 점점 벌어져, 연합 헌터들 사이에서의 수군거림도 커졌다.
“젠장, 마족들이 너무 세잖아? 병력도 훨씬 많고.”
“설마 저걸 우리가 다 처치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곳곳에서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조금 전, EX급의 코볼트를 상대하는 것도 버거웠었다.
디바인 실드 소속들이 힘을 개방해 전력이 강해졌다고 해도, 저렇게 많은 EX급 몬스터를 잡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때였다.
볼멘소리에 반응하기라도 한 듯 헌터들의 시야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런데.
[시작의 동굴을 통과해 운명의 전장에 진입하였습니다.]
[진영을 선택하세요.]
[마족 군단 / 인간 연합]
[선택 완료 시, 해당 부대의 거점으로 순간 이동하여 임무를 시작합니다.]
[마족 진영 임무 : 라크시아 연합군단장이 보유하고 있는 신념의 정수 획득하기]
[인간 진영 임무 : 마족 군단장이 보유하고 있는 마신의 파편 파괴하기]
[각 진영 선택 시, 해당 진영의 아군은 선택자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또한 동료에게 들어가는 데미지 역시 99% 감소합니다.]
[진영을 선택하지 않을 시, 각 진영은 진입자를 적으로 인식합니다.]
[선택까지 남은 시간 – 1시간]
[제한 시간 내에 선택하지 못할 경우, 자동으로 선택됩니다.]
뭔가 이상했다.
예상대로 헌터들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맞았는데, 마족 군단으로도 진영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뭐, 뭐야! 메시지가 떴어!”
“나도야! 근데 뭐지…? 마족 군단도 선택할 수 있는데?”
“너도 그래? 뭐냐 이거. 진짜 마족 편에 서서 싸워도 되는 거야?”
연합 헌터들은 혼란에 빠졌고.
“다들 아직 선택하시면 안 됩니다! 기다리세요!”
“절대 선택하면 안 됩니다!”
“하, 한상우 헌터님? 이건….”
강철만과 리 샤오펑 등 SSS급 헌터들은 다른 헌터들을 통제하며 상황을 살폈다.
설명과 전황을 보건대 다른 선택을 할 경우, 서로 적으로 싸우게 될 확률이 컸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
칼 제이스도 휘둥그레진 눈으로 의견을 구하려는 듯 한상우를 바라봤다.
한상우는 이를 갈며 선택지를 노려봤다.
‘젠장, 이거 용족 군단 때랑 비슷한 상황이잖아.’
루미나스의 황금 열쇠를 이용해 들어갔던 용족 군단의 던전.
그때와 판박이라 해도 될 정도로 상황이 비슷했다.
당시, 한상우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인간의 편에 서서 싸웠다.
하지만 그땐 확실한 보상이 존재했고, 또 자신에겐 그 상황을 타개할 만한 힘이 있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한상우 혼자가 아니고, 적들의 등급 또한 일격에 처치되지 않는 EX급이었다.
눈앞의 전황과 승리를 생각한다면, 마족 군단을 선택하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EX급 던전이 그렇게 단순할까?
그리고 그때도 보상을 미리 보여주며 은근슬쩍 인간의 편에 서서 싸우기를 희망하는 것처럼 보였던 던전과 시스템이, 이번에는 과연 마족이 이길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게 맞을까?
주어진 시간은 1시간.
단서는 한정적이었고, 제3의 길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상우는 분석을 끝내고 말문을 열었다.
시간을 지체했다간 마족 군단을 선택하는 헌터들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잠시 들어주십시오. 시간은 한정적이니, 모두 집중해주시기 바랍니다. 마족 군단이 유리한 지금 상황은 너무 부자연스럽습니다. 어느 한쪽에 들어가 내부에서 피해를 줄 수 없다는 건, 혹시 모를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것이겠죠.”
“오, 확실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그렇다면 내부에서 공격을 가하는 상황을 의식했다는 건데, 이미 열세인 인간 연합 측의 내부에서 공격을 할 필요는 없겠죠, 그렇다면 마족 연합에 속해 내부를 공격하는 상황을 상정한 듯하니, 인간 연합을 선택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저도 한상우 헌터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참전한다고 해도 인간 연합에게 희망이 있을까요? 수부터 등급까지 전력 차이가 너무 납니다. 승산이 전혀 없어요.”
한상우는 자신이 생각한 정답을 얘기했지만, 칼 제이스는 이견을 제시했다.
의견이 갈리는 건 연합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거… 인간 연합 선택해도 되는 건가? 가봤자 다 죽을 것 같은데.”
“마족 군단 선택하면 안 되나? 설명 보면 마족 군단 선택해도 별다른 피해는 없을 것 같은데…. 그냥 마족 선택해서 임무만 수행하면 되는 거 아냐?”
“그것도 그렇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몬스터랑 손을 잡고 인간을 공격하기에는 조금….”
진영 선택에 대한 각자의 의견들이 곳곳에서 새어 나왔다.
설상가상으로, 상황은 더욱 급박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마스터, 적들의 기척이 느껴집니다.
-산 아래에서 몬스터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주군.
[훈련된 마계 고블린(EX)]
[훈련된 마계 고블린(EX)]
“쿠르륵!”
“키에에에엑!!”
진영 선택을 논의하고 있는 와중, 마계 고블린 수십 마리가 헌터 연합을 발견하고 산 아래에서 동굴 입구로 올라온 것이다.
“젠장, 하필 이런 때에 습격을…. 다들 전투 준비하세요!”
강철만은 대검을 휘둘러 산을 타고 올라오는 마계 고블린들을 상대했다.
사태를 지켜보며 명령을 기다리던 연합 헌터들도 각자의 무기를 들어 전투에 돌입했다.
다시 시작된 마계 고블린들과의 싸움.
그러나.
길게 싸울 수는 없었다.
쿵-! 쿵-!
[훈련된 마계 트롤(EX)]
“크워어어어어!!”
이제는 마계 고블린뿐만 아니라 마계 트롤까지 산을 타며 동굴 입구로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블린에 비해 몇 배는 더 큰 몸집.
“미친! 저걸 어떻게 잡아!”
“그냥 마족 군단 선택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인간 진영 선택하면 저런 걸 수없이 상대해야 하는데,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연합 헌터들 사이로 부정적인 의견이 우후죽순 튀어나왔다.
SSS급 헌터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한상우 헌터님, 얼른 결정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몬스터의 수가 점점 늘어나요!”
“크윽! 차라리 빨리 인간 진영 선택하고 정비합시다! 그게 지금보다는 나을 것 같아요!”
차라리 빨리 선택해서 당장 벌어지고 있는 싸움을 피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뇨, 선택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더 어려워질 거예요.”
한상우는 퀘스트를 선택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대신.
쿵-!
땅을 박차고 산 아래로 내려 마계 트롤에게 돌진했다.
그리고.
[발화]
[반월 베기] [만월 가르기] [급소 찌르기]
[제국기사단의 검술의 연계기가 완성됐습니다.]
[연계 효과 : 월광 폭발]
콰아아아아아앙-!!
[훈련된 마계 트롤(EX)을 처치했습니다.]
[발화]로 강화시킨 제국기사단의 검술 연계기를 완성시켜 일격에 처치해버렸다.
물론 마계 트롤을 상대하는 사이, 근처에 있던 마계 코볼트들도 달려들었지만.
한상우에게 닿지는 못했다.
땡길거야와 다크어둠, 매직킹과 연진 등 캐릭터들이 옆으로 다가와 놈들을 처치해 버렸으므로.
그야말로 압도적인 무력.
사태가 정리되는 데는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헌터 연합은 입을 쩍 벌리고 할 말을 잃은 채, 한상우와 군주 길드 길드원들을 바라봤다.
그때, 강철만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럼 이대로 포기하자는 말씀이신가요?”
실력이 뛰어난 것과 별개로, 어느 진영도 선택하지 않겠다는 것은 곧 퀘스트를 포기하겠다는 의미와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상우의 뜻은 다른 것인 듯했다.
“그럴 리가요, 던전 레이드는 진행할 겁니다. 대신….”
한상우는 화산검에 묻은 피를 바닥에 흩뿌리고, 전장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한 시간 안에 두 임무를 동시에 완수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