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화
16장 군계일학 낭중지추(8)
거대한 체구에 얼굴을 가릴 정도로 푹 눌러 쓴 로브.
그럼에도 느껴지는 짙은 이목구비.
‘저 녀석은… 카마트라?’
놈을 보자마자 바로 루미나스의 수장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순간 당혹스럽긴 했으나 [평정]으로 인해 차분하게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고, 한국의 헌터청에서 녀석에 대한 정보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단번에 떠오른 것이다.
그래서 나는.
“헌터 연합 전원, 전투 준비하세요! 상대는 루미나스의 수장입니다!”
곧바로 상황을 판단하고 연합 헌터들에게 소리쳤다.
“루, 루미나스…!”
“루미나스의 수장, 카마트라다! 다들 아이템은 내려두고 무기 들어!!”
후두두두둑-!!
루미나스의 악명 때문일까.
수장이라는 것만 말했을 뿐인데 대다수의 헌터들이 모두 무기를 들고 일사불란하게 대응했다.
그러자 그 뒤로.
스윽- 탁-! 타닥-!
폐허가 된 건물 곳곳에서 검과 창, 활 등 다양한 무기를 든 헌터들이 나타나면서 포위망을 형성했다.
언뜻 봐서는 평범한 헌터 같은 행색.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특이한 공통점이 있었다.
스페이드 문양.
얼굴이나 손등, 발목 등에 루미나스를 뜻하는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게다가 겉으로 보이는 인원수만 해도, 헌터 연합의 몇 배 이상은 족히 되어 보였다.
이에 칼 제이스와 리 샤오펑이 이를 갈며 말했다.
“제길,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루미나스가 다 모인 것 같군요.”
“수준도 보통은 아닙니다. 느껴지기로는 S급 이상도 적지 않은 것 같은데… EX급 던전 때문에 모인 헌터들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EX급 던전 클리어에 모든 전력이 투입된 틈을 노린 것 같습니다. 한 나라의 명운이 걸린 위기를 이런 식으로 이용할 줄이야….”
“루미나스의 악명이 어디 가진 않는군요. 저놈들, 만반의 준비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쉽지 않겠어요.”
칼 제이스와 리 샤오펑은 주변을 포위한 루미나스 헌터들을 돌아보며 그렇게 평가했다.
나도 곁눈질로 빠르게 놈들의 전력을 파악했다.
확실히, 이전 국내에서의 전투와는 다르게 병력의 밀도가 높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였다.
저벅-
카마트라가 한 발짝 걸음을 내디디며 말문을 열었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군. 살고 싶다면, 신념의 정수를 내놓아라.”
“……!”
“저 녀석이 그걸 어떻게…?!”
단 한마디였을 뿐이지만 파장은 엄청났다.
EX급 던전에 들어가 본 적도 없는 카마트라가, 던전 안의 퀘스트를 통해 얻은 신념의 정수를 언급했다.
대체 어떻게 아는 것일까.
카마트라의 발언은 나도 궁금증이 일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걸 파고들 때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없는 사이, 루미나스가 리야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것이었으니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타협이란 있을 수 없었다.
칼 제이스도 이를 알고 잘 알고 있었다.
“…갖고 싶다면, 직접 힘으로 얻어 보시지. 전원 공격!”
카마트라의 발언에 눈 하나 깜빡 않고, 곧바로 전투 명령을 내린 것이다.
칼 제이스에 이어 바로 공격에 돌입하는 건 리 샤오펑도 마찬가지였다.
“연합 헌터 전원, 돌격! 루미나스를 처단하라!!”
그 역시 동료들에게 전투 명령을 내리며 카마트라에게 쇄도했다.
과연 세계 최고라 불리는 SSS급 헌터들이라고 해야 할까.
EX급 던전을 나오자마자 폐허가 된 도시와 미리 대기하고 있던 루미나스를 조우했지만, 혼란 없이 빠르게 판단하고 대응했다.
물론, 카마트라도 만만친 않았다.
“큭큭, 살 기회를 줘도 제 발로 걷어차는군. 루미나스 전원, 공격하라!”
“예! 알겠습니다!!”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하게 루미나스 헌터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동시에.
딸각-!
손을 들어 미리 준비한 것처럼 보이는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음? 왜 작동이 안 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몇 번을 더 눌러봐도 소용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주변의 폭탄을 모두 해체했습니다, 마스터.
[캐릭터 : 다크어둠이 은신을 사용합니다.]
[캐릭터 : 다크어둠이 함정 해제를 사용합니다.]
잠깐 대치하던 사이, 다크어둠이 [은신]을 쓰고 움직여 주변에 설치된 폭탄을 모두 해체해 버렸으니까.
루미나스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건 폭탄뿐만이 아니었다.
“일제 사격!!”
카마트라의 명령 뒤로, 루미나스 헌터들이 각자 무기를 휘둘러 스킬을 난사했지만.
쿵-! 쿵-! 쿠구구구구궁-!!
투명한 보호막과 얼음벽에 모두 막혔다.
“허섭스레기 같은 놈들일세. 그것도 공격이라고 하냐?”
“동감하네, 마법사여. 차라리 마계 코볼트들의 주먹질이 더 강했던 것 같군.”
“이 정도는 완전 껌이에용!”
매직킹의 보호막과 땡길거야의 [동료 보호], 연진의 [워터 플라스크]와 [결빙 플라스크]의 연계로 만든 얼음벽이 루미나스 헌터들의 공격들을 모두 막아낸 것이다.
이에 루미나스 헌터뿐만 아니라 카마트라도 눈을 휘둥그레 뜨며 경악했다.
“저, 저런 말도 안 되는…!”
“왜? 뭐가 잘 안 되나?”
나는 [침투]로 거리를 좁히고 화산검을 휘두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가 EX급 던전에 들어가 있는 동안 나름 만반의 준비를 한 것 같은데, 단숨에 파훼 당해 당황하는 꼴을 보자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 건방진 놈이…!”
카마트라는 이를 갈며 화산검을 피하고, 펑퍼짐한 로브 속에서 검과 방패를 꺼내 반격하려 했다.
그러나 녀석은 그 단순한 반격마저도 성공시키지 못했으니.
“감히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다니!”
“카마트라, 네놈을 즉결 처형하겠다!!”
내 공격 뒤로 칼 제이스와 리 샤오펑이 합세해 협공을 펼친 탓이었다.
쿵-! 쿵-! 콰아아앙-!!
카마트라에게 쏟아지는 SSS급 헌터들의 강공.
“크윽! 이놈들이…!!”
“지원하겠습니다, 유일한 존재이시여! 크악…!”
주변에 있던 루미나스 헌터들이 다가와 카마트라를 도우려 했지만, 오히려 접근 도중 폭발에 휩쓸려 나가떨어졌다.
SSS급 헌터들이 퍼붓는 공격이 워낙 강하다 보니 등급이 낮은 헌터들은 버티지도 못하는 것이다.
내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
“무, 무슨 놈의 헌터들이 이렇게 세!!”
“여기 좀 도와줘! 크헉!!”
카마트라는 SSS급 헌터 둘의 공격에, 루미나스 헌터들은 헌터 연합과 캐릭터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애초에 헌터의 전투는 물량 싸움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등급이 한두 단계만 차이가 나도 전투력의 차이는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진다.
수는 루미나스 헌터들이 압도적으로 많으나 헌터 연합에는 세계 최고의 헌터들이, 그것도 디바인 실드 소속이 다수 포진해 있다 보니 루미나스를 상대로 일당백이 가능했다.
캐릭터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물론, 루미나스도 두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원, 강화 물약 섭취를 허가한다.”
“알겠습니다, 유일하신 분이시여!”
“유일하신 분이시여!”
“쿨럭! 끄아아아아아악!!”
[어둠의 추종자 크레일(SS)]
[잔혹한 칼잡이 칼루파(S)]
[집념의 특등사수 카틴(SSS)]
카마트라의 강제 명령 아래, 루미나스 헌터들은 전매특허인 강화 물약을 섭취해 몬스터까지 되었다.
게다가 물약 자체도 이전보다 훨씬 개량되었는지, 변하는 속도와 등급 폭이 이전과는 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연합 헌터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소리쳤다.
“녀석들이 그 물약을 마셨다!”
“다들 조심해! 모두 등급이 최소 한 등급씩은 올랐다!”
“보고 받았던 것 이상인데, 이건!”
등급은 무려 S급 이상.
심지어 몇몇은 SSS급까지 올라가는 기염을 보여줬다.
하지만.
“상관없어! 앞에 상대했던 EX급 몬스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맞아! 다들 합 맞춰서 싸워! 충분히 이길 수 있다!!”
밀리고 있던 전세가 비등비등한 정도로 유지될 뿐, 역전될 정도는 아니었다.
조금 전 EX급 몬스터를 상대했기에 역체감이 되는 것도 있었고, 연이은 승리에 헌터 연합의 사기도 굉장히 높았기 때문이다.
“크윽! 이 망할 녀석들이!!”
그 속에서 카마트라는 검을 내리쳐 막대한 충격파를 방출하며 나름 선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칼 제이스와 리 샤오펑은 내 옆으로 복귀하더니 이마에 난 땀을 닦으며 말했다.
“역시 카마트라는 쉽지 않군요. 중력 제어에 공간 이동 능력까지 가지고 있어서 맞추는 게 쉽지 않아요.”
“거기다 흡수 능력까지 갖고 있으니 섣불리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협공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당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SSS급 헌터들이 카마트라의 힘을 언급하며 제압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러나.
‘뭐야, 생각보다 쉽잖아?’
나한테는 해결책이 보였다.
칼 제이스와 리 샤오펑이 언급한 능력들은 홍진성과 마강진, 방시현 등을 상대하며 한 번씩 겪어본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
“제가 해결하도록 하죠.”
“네? 한상우 헌터님, 저희와 같이 협공하시는 게….”
“괜찮습니다. 1분만 기다려주세요.”
사실 1분도 필요 없었지만 방해없이 단독으로 싸울 필요가 있었기에, 그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시간을 제시했다.
그런데 이게 자만하는 것으로 보인 것일까.
“오만하구나, 한상우!!”
카마트라는 내 이름까지 불러대며 오러를 잔뜩 실은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공기를 가르며 날아오는 오러.
강하긴 하지만 EX급 보스 몬스터, 마족 군단장이 보여줬던 것에 비하면 장난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피하는 대신 화산방패로 막은 뒤.
‘시작하자, 얘들아.’
-넹, 사장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군.
전언으로 캐릭터들을 불러 방금 짠 전략을 실행했다.
“간다!”
“에잇! 받아라, 나쁜 놈아!!”
콰아아아아앙-!!
먼저 나와 연진이 [분화]와 [화염 플라스크]를 날려 카마트라를 공격한다.
“흥! 맞을 것 같으냐!”
녀석이 공간 이동을 통해 피하면.
“이거 완전 쥐새끼가 따로 없네.”
매직킹이 [디스펠]을 사용해 공간 이동을 원천 차단하고, 땡길거야가 [끌어오기]를 통해 녀석을 한자리에 고정시킨다.
파지지지직-!
“무, 무슨…!”
카마트라는 당황한 얼굴로 자신의 발목에 묶인 오러 사슬을 바라봤다.
그사이.
“타인의 목숨을 우습게 아는 그대에게 잔혹한 처벌을.”
[쾌속 이동]으로 접근한 다크어둠이 [배후 강타]를 사용했다.
물론, 한 번에 녀석을 처치할 수는 없었다.
쩌어어어어엉-!!
녀석이 협공을 눈치챈 듯 방패를 목 뒤로 가져가 다크어둠의 쌍단검을 막아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공격은 그게 아니었다.
[캐릭터 : 매직킹이 블링크를 사용합니다.]
[캐릭터 : 매직킹이 파훼의 창을 사용합니다.]
카마트라가 다크어둠의 공격을 막는 사이.
파지지지직-!!
매직킹이 쇄도해 오러 창날이 일렁이는 지팡이를 내질렀다.
그러자.
“……!”
서걱-!
카마트라의 로브가 길게 찢어졌다.
매직킹이 가슴을 노리고 [파훼의 창]을 찔렀으나 카마트라가 몸을 틀어 가까스로 회피한 것이다.
그 뒤로.
쿠우우웅-!!
매직킹은 다크어둠을 데리고 [블리크]로 전장을 탈출했다.
연이어 공격하려는 순간, 카마트라가 염력을 사용해 주변의 공기를 완전히 짓눌렀기 때문이다.
무위로 돌아간 듯한 협공.
하지만 성과가 완전히 없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화아아아아악-!
한 차례 격돌 후, 카마트라의 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며 모습이 바뀌었다.
살짝 베였지만 모든 버프 효과를 해제하는 [파훼의 창]의 효과가 발현된 것이다.
그런데.
“음? 저건…?”
카마트라의 본 모습이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었다.
길게 고민할 것도 없었다.
“셀리나…?”
셀리나 칸데바.
루미나스의 수장이, 디바인 실드의 단장으로 바뀐 것이다.
혹시 헛것을 보는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카마트라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어…?”
“세, 셀리나 칸데바 님…? 당신이 어째서…?”
리 샤오펑과 칼 제이스도 버프 효과가 해제된 카마트라의 본 모습을 알아봤다.
그때였다.
“큭큭, 크크큭…! 크하하하하핫!!”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자 미친 것일까.
셀리나는 한참을 웃더니 섬뜩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거, 내가 실수했군요. EX급 던전에서 힘을 다 쓰고 나와서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전력을 다할 걸 그랬어요. 이제부터 제대로 해주죠.”
뭘 제대로 한다는 것일까.
굳이 물을 필요는 없었다.
그걸 묻기도 전에.
녀석이 눈에서 보랏빛 광채를 띠면서 힘을 개방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푹-!
“커헉…!”
칼 제이스의 검이 리 샤오펑의 목을 꿰뚫었다.
“……?!”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 기이한 행동은 헌터 연합 전체로 퍼져 나갔다.
“뭐, 뭐야! 왜 갑자기 날 공격하는 거야! 끄악!!”
“디, 디바인 실드! 디바인 실드들이 미쳤어!!”
하얀 갑주를 입은 디바인 실드 헌터들이 루미나스가 아닌 연합 헌터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진상은 곧장 파악할 수 있었다.
“주군! 대다수의 헌터들이 눈에 이채를 띠고 아군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디바인 실드 헌터들의 동공 위로 스페이드 문양의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설마…!”
나는 이를 갈며 이 사태의 원흉을 쳐다봤다.
그 순간.
“킥킥킥, 이걸로 모든 게 끝입니다.”
셀리나 칸데바는 광기 어린 미소를 짓더니 로브를 벗고 본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