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화
16장 군계일학 낭중지추(9)
* * *
사람의 정신은 이성과 감성으로 나뉘어 있다.
셀리나 칸데바는 일찍이 그 사실을 깨달았다.
별로 알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 알콜 중독자였던 아버지가 폭력을 행사하지만 않았더라도 그녀는 그걸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성은 말했다.
어머니처럼 아버지한테서 도망쳐야 한다고.
감성은 반대였다.
그래도 아버지라고.
기다리면 언젠간 정신을 차려서 여느 아버지처럼 자신을 안아줄 거라고.
절대적인 승자는 없었다.
어떤 날은 이성이, 또 어떤 날은 감성이 튀어나와 그녀를 지배했다.
불안과 고독, 삶에 대한 열망이 교차하던 나날들.
셀리나는 생각했다.
아버지가 사라지면 끝이 날까.
하지만.
이성과 감성의 괴리는 아버지가 음주운전으로 강에 빠져 죽고, 세상이 바뀐 후에도 계속됐다.
대헌터시대 초창기, 그녀는 짐꾼으로 돈을 벌기 위해 던전에 진입했다가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섰다.
-더, 던전 중첩 현상!? E급 던전인데 저기 왜 D급 보스 몬스터가 있어!
-도망쳐! 저건 절대 못 이겨!
-나, 나도 데려가요!
-무시해! 다른 사람 구하려다간 다 죽고 말 거야…!
보스 방에서 던전 중첩 현상을 마주한 헌터들이 셀리나를 버리고 도망친 것이다.
이성은 수긍했다.
저게 합리적인 거라고.
각성도 하지 못한 짐꾼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감성은 반발했다.
개 같은 놈들이라고.
나를 미끼로 던지고 도망치다니, 만약 살아나간다면 믿음직한 고용주라고 생각했던 녀석들을 모두 죽여버릴 거라고.
셀리나는 짊어지고 있던 짐을 던져버리고 D급 보스 몬스터, 지옥의 사냥개한테서 도망쳤다.
그러다 결국.
-컹! 컹컹!
-꺄아아아악!
던전 끝자락에 형성되어 있던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다.
-윽! 으윽….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몸.
이성은 알아차렸다.
머리는 깨지고, 사지는 부러져 살아날 희망은 없다고.
감성은 외쳤다.
살고 싶다고. 행복은 바라지도 않으니 그저 살고 싶다고.
그때였다.
낭떠러지 바닥의 깊은 어둠 속, 웬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살고 싶은가.
-……?
-살고 싶다면 복종하라. 내 너에게, 불멸의 힘을 나눠줄지니.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노이즈 낀 음성.
대체 누가, 어떻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일까.
셀리나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현상이었지만 깊이 파고들 시간은 없었다.
툭-! 툭툭-! 쿵-!!
-크르르르…!
-흐, 흐익!!
지옥의 사냥개가 절벽을 내려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탓이었다.
셀리나는 음성이 들려온 어둠 속으로 기어갔다.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주먹만 한 크기의 황금색 구체였다.
셀리나는 손을 뻗어 황금색 구체를 잡았다.
그 순간.
화아아아아악-!!
황금색 구체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크워어! 깨갱!!
셀리나에게 달려들던 지옥의 사냥개를 소멸시켜 버렸다.
-마, 말도 안 돼….
전신을 맴도는 강대한 힘.
D급 보스 몬스터는 한 번에 소멸했고, 온몸 가득했던 부상도 어느새 회복되어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단 하나, 몸에 이질적인 게 생겼다는 걸 제외하고는 모든 게 정상이었다.
셀리나는 멍한 표정으로 황금색 구체를 바라봤다.
그때였다.
-오오, 저것 좀 봐! 보스 몬스터가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죽었나 본대? 아이템 회수하러 가자!
-대박! 이게 웬 떡이야? 짐꾼이 미끼 역할을 톡톡히 했나 봐!
셀리나를 버리고 갔던 헌터들은 보스 몬스터가 죽은 것을 감지했는지, 드랍템을 습득하려 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절벽 아래로 내려온 순간.
“뭐, 뭐야…!”
콰악-! 퍼어어어억-!
그들의 몸은 모두 풍선처럼 터지고 말았으니.
셀리나가 황금 구체의 힘을 이용한 탓이었다.
그건 이성과 감성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한 결과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더 강한 힘을 얻고 싶다면 인간 다섯의 목숨을 빼앗아 내게 제물을 바치도록 하라.
자신을 살려준 목소리를 따라 행동했을 뿐이었다.
셀리나는 더 이상 이성과 감성 간의 괴리에 고민하지 않았다.
-레벨 10 이상의 신도 1명을 모으도록 하라.
-레벨 50 이상의 신도 10명을 모으도록 하라.
-황금 열쇠를 모으고, SSS급 던전을 일으켜 용족 군단을 불러내도록 하라.
황금 구체가 내리는 지시를 충실히 수행했다.
그것은 명확하고, 즉각적이었다.
황금 구체의 명령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내면 더욱 큰 힘을 바로바로 얻을 수 있었다.
마치 신이 내려주는 것처럼 강력한 힘.
이 힘을 이용하면 스킬뿐만 아니라 아이템도 일부 만들어낼 수 있었다.
메시지에 표기된 힘의 이름은 ‘신성력’.
셀리나는 황금 구체를 신으로 받들고 미국, 독일, 한국 등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명령을 수행했다.
그리고 셀리나 칸데바와 카마트라, 두 가지 얼굴을 만들어 디바인 실드와 루미나스를 창설했다.
-레벨 200 이상의 신도 20명을 모으도록 하라.
-인간 백 명의 목숨을 내게 제물로 바치도록 하라.
신의 명령에는 타인의 지지가 필요한 일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윤리성을 저버려야 하는 일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셀리나는 신도 확보는 디바인 실드를 통해, 무고한 생명을 빼앗는 것은 루미나스를 통해 수행했다.
그리고 뒤로는 루미나스를 이용하여 신성력과 비슷한 힘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는 날이 갈수록 음성이 요구하는 난이도에 비해 지급받는 신성력이 점점 줄어든다는 불안감의 발현이었다.
만약 신성력이 없어진다면 자신은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거나 다름없기에 대응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다만 황금 구체가 이를 눈치채선 안 됐다.
셀리나는 황금 구체를 여러 나라의 본부에 잠깐씩 보관하며 실험을 진행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순조롭게 진행되던 작업에 차질이 생겼다.
한상우.
듣도 보도 못한 한국의 헌터가 루미나스의 핵심 전력 중 하나인 한국 지부를 초토화시킨 것이다.
계획은 일그러졌고.
-EX급 던전을 개방해, 마족 군단을 인간계로 내보내라.
-레벨 400 이상의 인간 100명을 내게 제물로 바치도록 하라.
음성의 요구는 극에 달했다.
지금껏 본 적 없을 정도로 어려운 난이도.
하지만 명령이 주어진 이상,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만약 수행하지 못한다면 쓸모없다는 이유로 버려진다는 걸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셀리나는 디바인 실드 전원을 EX급 던전에 집어넣어 제물로 삼을 계획을 세웠다.
신성력을 줘봤자 EX급은 클리어하지 못할 것이었고, 만약 가능성이 보인다고 해도 중간에 신성력을 회수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상은 달랐다.
신전에서 확인한 순간, 헌터 연합은 EX급 던전을 성공적으로 클리어해내고 있었다.
이것도 한상우라는 헌터가 그 원흉이었다.
결국.
-신념의 정수를 획득하라.
음성의 명령이 바뀌었고, 셀리나도 빠르게 계획을 변경했다.
헌터 연합이 EX급 던전 레이드에서 많은 힘을 썼을 테니, 루미나스를 이용해서 놈들을 모두 처치하고 신념의 정수를 확보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젠 그것마저도 실패할 상황이었다.
한상우와 연합 헌터들은 상상 이상의 전력이었기에, 처치하기는커녕 대립하는 두 집단의 수장이었던 자신의 정체마저 드러나고 말았다.
남은 것은 전투를 포기하고, 패배를 인정하는 것밖에 없는 듯했다.
그때였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이성과 감성이 의견을 내놓았다.
이성과 감성이 동시에 말했다.
왜 포기하냐고.
모든 힘을 잃고, 아버지에게 맞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고. 이제 힘은 충분하니 가식과 가면을 벗어던지고, 자신이 꿈꾸던 세상을 만들어내라고.
이성과 감성이 똑같은 의견을 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더는 거리낄 게 없었다.
한 번 쓰면 돌이킬 수 없기에 최대한 사용을 자제하려고 했지만, 모든 게 드러난 이상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셀리나는 신성력을 주입한 대상을 조종할 수 있는 스킬, [신성 통제]를 통해 디바인 실드 헌터들을 조종한 다음.
펄럭-!
몸을 감추고 있던 로브를 벗어던졌다.
그러자.
두근-! 두근-!
신성력을 받아들였을 때 생성됐던 이질적인 물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EX급 던전 포탈 앞에 형성된 전장.
“……!”
한상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셀리나가 로브를 벗어던지자 하얀 갑옷 중앙의 가슴 부분으로 펄떡펄떡 뛰고 있는 검은 심장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저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디바인 실드의 헌터들과, 루미나스의 헌터들이 셀리나의 통제 하에 자신과 캐릭터, 그리고 연합 헌터들을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경험도 있었다.
“주군, 헌터들의 몸에서 예전에 광신도 녀석들이 내뿜던 것과 비슷한 기운이 풍기고 있습니다.”
“신성력을 매개로 대상을 조종하는 건가. 루미나스 수장과 디바인 실드 수장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신도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나 보군.”
광신도 던전에서 봤던 기사들처럼 디바인 실드 헌터들은 세뇌가 된 듯했다.
한상우는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빠르게 해결책을 찾았다.
“전원, 힘을 집중해 셀리나를 처치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
“예, 마스터!”
“알겠습니당, 사장님!”
“얼른 처치하겠습니다, 로드.”
캐릭터들이 재빠르게 신형을 움직였다.
[끌어오기], [배후 강타], [디스펠]과 [화염 플라스크] 등 아까와 같이 각자의 스킬을 사용하며 셀리나를 묶어 처치하려고 한 것이다.
콰아아아아앙-!!
한상우도 화산검을 들어 [분화]를 발사했다.
그러나.
“킥킥킥! 또 통할 것 같나요? 정말 가소롭기 짝이 없군요.”
셀리나는 비웃음을 흘리더니 공중으로 도망쳤다.
루미나스와 디바인 실드를 조종하고 있으니, 직접 싸우는 것보다는 공격을 피하면서 [신성 통제]의 지배력을 유지하는 게 더 나은 전략이기 때문이었다.
“저 망할 잡것이…!”
유유자적한 셀리나의 모습에 매직킹이 이를 갈며 자세를 낮췄다.
당장이라도 쫓아갈 기세였지만 매직킹은 그러지 못했으니.
“캬아아아악!!”
셀리나를 공격하는 데 시간을 쓴 사이, 루미나스와 디바인 실드 헌터들이 달려든 탓이었다.
셀리나를 추격하지 못하는 건 다른 캐릭터들도 마찬가지였다.
후우우우웅-! 콰아아앙-!!
“크캬악!!”
“주군, 적들의 목표가 저희로 바뀌었습니다!”
“전부 죽일까요, 마스터?”
“제압하기엔 수가 너무 많아용, 사장님!”
루미나스와 디바인 실드 헌터들이 캐릭터들한테도 쇄도했다.
수백은 족히 넘는 수.
그 정도의 수를 상대하다 보니, 아무리 캐릭터들이라도 적들을 무력화시키는 게 쉽지 않았다.
게다가 한상우한테도 많은 헌터들이 달려들었는데, 그 중엔 SSS급 헌터도 포함되어 있었다.
쩌어어어어엉-!!
전장에 울려 퍼지는 충격파.
한상우는 칼 제이스의 공격을 화산방패로 막아내며 외쳤다.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거지, 셀리나!”
“글쎄요. 궁금하면 거기서 살아나와 보시죠. 문제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 킥킥!”
확실히 난제였다.
“크윽! 여기 좀 지원해줘! 아악!!”
“루미나스에 디바인 실드까지 적이라니! 이게 어떻게 된…! 흐악!!”
예상치 못한 협공에 대부분의 연합 헌터들은 순식간에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고, 캐릭터들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마족 군단과 싸우면서 데미지가 누적되기도 했거니와 디바인 실드의 하얀 갑주는 EX급 몬스터 못지 않게 튼튼한 방어력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이 난관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리야드를 버리고 도망치는 게 맞았다.
하지만 감정적으로는 그게 되지 않았다. 이곳을 버리고 도주하기엔 너무 많은 이들의 목숨이 걸려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 도망친다 해도, 언젠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고 세뇌당한 헌터들을 처치하자니 선뜻 검이 나가지 않았다.
지금까지 함께 전장을 구른 동료이기도 하거니와 광신도들을 생각해보면 원래대로 만들 방법도 분명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편하게 궁리할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칼 제이스가 괴성을 토해내며 오러 블레이드를 내리치자.
“크야아아악!!”
“크윽!!”
쩌어어어어어엉-!!
한상우의 발이 땅에 파묻힐 정도로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발생했다.
‘제길, 남 걱정할 때가 아니다. 머뭇거리면 오히려 당하고 말 거야.’
격렬한 전투와 함께 몰아치는 이성과 감성의 괴리.
그 좁혀지지 않는 간극 속에서 한상우는 결단을 내렸다.
‘우선 몬스터가 된 루미나스부터 처치한다!’
‘예, 마스터!’
그나마 몬스터가 된 루미나스들은 원래대로 돌릴 방법이 없으니 그들부터 먼저 처치해, 전력을 최대한 줄이려고 한 것이다.
몬스터가 된 루미나스 헌터들을 처치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캐릭터 : 다크어둠이 그림자 긋기를 사용합니다.]
[캐릭터 : 다크어둠이 잔혹한 칼잡이 칼루파(S)를 처치했습니다.]
[캐릭터 : 다크어둠이 어둠의 추종자 크레일(SS)을 처치했습니다.]
“크아악!!”
다크어둠이 앞으로 치고 나가며 쌍단검을 휘두르자 몬스터로 변한 루미나스 헌터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우우우웅-!
몬스터가 되어 목숨을 잃으면 먼지로 변해 소멸하는 게 정상이건만, 루미나스 헌터들의 몸이 정체모를 빛을 방출하며 부풀어 오른 것이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상우는 직감했다.
“젠장, 물러나!”
콰아아아아아앙-!!
막대한 폭발이 다크어둠과 연진, 그리고 한상우를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