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2화
16장 군계일학 낭중지추(12)
“전원, 공격.”
한상우의 음성은 격하지도, 처절하지도 않았다.
그저 편안하고, 나지막할 뿐인 말투.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예, 주군.”
“명 받들겠습니다, 마스터.”
“쥐새끼가 박쥐 새끼로 바뀌었네요. 바로 처단하겠습니다, 로드.”
“저는 뒤에서 지원할게용, 사장님!”
“지켜주셔서 감사드려요, 용사님. 저도 최선을 다해서 보좌할게요.”
쿠웅-!!
한상우의 명령 뒤로 땡길거야와 다크어둠, 매직킹이 땅을 박차고 나가고, 연진은 산성 플라스크를 던졌으며, 세이가 두 손을 모으고 기도문을 외우자.
쩌어어어엉-!! 와장창-!!
양면의 셀리나가 만든 보호막이 산산조각 나며 전투가 시작됐다.
빠른 속도로 쇄도하는 세 명의 만렙 캐릭터.
“으윽! 끈질긴 놈들 같으니! 죽어라!!”
양면의 셀리나는 이를 갈며 다시 한번 손바닥으로 검은 화염을 방출했으나.
[캐릭터 : 땡길거야가 수호의 방패를 사용합니다.]
화아아악-!
땡길거야의 전방으로 형성되는, 거대하고 반투명한 오러 방패에 막힐 뿐이었다.
가벼운 공방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건 셀리나에게는 큰 패착이 되었다.
막대한 신성력을 소모하는 공격인 데다 시전 동작도 큰 스킬이라, 공격 이후 큰 빈틈이 생기는데 그게 완전히 막혔기 때문이다.
그 여파는 곧바로 나타났다.
“끈질긴 건 너다.”
“이제 그만 뒈져라, 박쥐 새끼야…!”
정면의 기사를 상대하는 사이, 암살자와 마법사가 옆과 뒤로 돌아 들어와 쌍단검과 창으로 변한 지팡이를 내지른 것이다.
[염력]을 사용하고 몸을 틀더라도 궤적상 완전히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둘 중 하나만 피할 수 있는 상태.
선택의 기로에서 셀리나는.
‘제길, 저 창은 맞으면 안 돼!’
[파훼의 창]을 피하고, 다크어둠의 쌍단검을 맞는 것을 택했다.
조금 전, 한 번 피격당했을 때를 돌이켜보면 창의 경우 자신에게 씌워진 버프를 모두 없애버리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쌍단검에 찔리면 피해는 생기겠지만 몸 주위로 빠르게 보호막을 생성한다면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나름 합리적으로 내린 판단.
그러나 그녀가 간과한 게 한 가지 있었다. 다크어둠이 제대로 공격할 경우, 그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었다.
묵빛의 쌍단검이 섬뜩한 빛을 번뜩이며 등을 내리친 순간.
쨍그랑-! 콰직-!!
“크억…!!”
셀리나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쌍단검의 파괴력이 워낙 강하다 보니 보호막을 뚫는 걸 넘어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 것이다.
연이은 타격을 허용했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기의 순간.
쩌어어엉-!!
양면의 셀리나는 재빠르게 신성력을 사용, 전신으로 충격파를 일으켜 다크어둠과 매직킹을 날려버렸다.
동시에.
“감히 인간도 아닌 것들이…! 좋다, 나도 똑같은 방법으로 상대해주마!!”
마신의 회복 마법으로 자가 치유를 하면서 손에 든 황금 구체를 조작, 검은 포탈을 열어 몬스터를 소환해냈다.
[지옥의 데스나이트(EX)]
[지옥의 데스나이트(EX)]
시커먼 투구와 갑옷, 그리고 대검을 든 데스나이트 다섯 마리.
놈들은 포탈에서 튀어나오자마자 만렙 캐릭터들에게 쇄도했다.
콰아아아앙-!!
“쳇, 귀찮은 놈들이 더 늘어났네.”
“으흐흐, 쉽지 않을 거다! 여기 누워 있는 놈들과는 차원이 다른, 위대하신 분의 축복을 직접 받은 기사들이니까!”
셀리나는 의기양양했다.
비록 주입했던 신성력을 회수하면서 디바인 실드와 루미나스 헌터들은 이용할 수 없게 되었지만, 황금 구체의 축복으로 그보다 더 강력한 부하들을 활용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확실히 데스나이트들은 강했다.
수는 많지 않았지만, SSS급 헌터인 칼 제이스나 리 샤오펑과 최소 호각은 될 법한 파괴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움직일 때마다 삐거덕거리는 게 꼭 깡통 기사 같군. 약해빠졌어.”
“천만에. 전신을 검은색으로 치장한 걸 보니 꼭 암살자 네놈 같군. 검술도 형편없어.”
“두 분을 섞은 걸로 하죠. 어떻게 하든 약한 건 똑같으니까요.”
만렙 캐릭터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다크어둠과 땡길거야, 매직킹은 [그림자 긋기]와 [끌어오기], [아이스 스피어] 등으로 데스 나이트들을 공격했다.
그럼에도 데스나이트들은 공격을 버텨내고 반격을 이어나가려는 듯보였지만.
“받아랑, 이 나쁜 놈들아!!”
“지옥의 존재들에게 따끔한 질책을 주소서.”
후방의 지원도 만만찮았다.
데스나이트들이 수적 우위를 이용해 압박하거나, 검을 휘두르려고 하면 한상우 옆에 있는 소환수들이 플라스크를 던지거나 힐, 버프, 속박 등으로 연계해 효과적으로 봉쇄했다.
‘이대로는 지고 만다…!’
전신을 엄습하는 위기감.
이젠 없는 힘까지 짜내어 쏟아부어야 할 때인 듯했다.
셀리나는 공중으로 날아오른 뒤, 황금 구체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우우우우우웅-!!
마나와 신성력을 합쳐 검게 빛나는 거대한 에너지의 구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믿었던 데스나이트들마저도 얼마 버티지 못했다.
하나하나도 상대하기 쉽지 않은데, 수적으로도 밀리니 승산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큰 스킬을 써서 한 번에 전부 끝내버리는 것뿐.
특히 광범위한 스킬을 사용하면 놈들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지금 전투 양상만 봐도, 주변에 널브러진 디바인 실드와 루미나스 헌터들 때문에 큰 기술을 사용하지 못하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이걸로 끝이다. 전부 소멸시켜주마!!”
양면의 셀리나는 광기 어린 웃음을 터트리며 머리 위로 형성된 검은 구체의 크기를 점점 키워나갔다.
하지만 한상우도 가만히 두고 보지만은 않았다.
[통찰 : 마신 추종자 양면의 셀리나 – 멸망의 보옥]
셀리나가 큰 기술을 사용하려는 낌새를 보이자마자.
쿵-!
땅을 박차고 나가며 캐릭터들에게 전언을 날렸다.
‘셀리나는 내가 상대하겠다. 연진, 얼음벽으로 디딤판을 만들어줘. 매직킹은 나한테 레비테이션을 걸고. 세이는 셀리나에게 빛의 속박을 사용한다.’
-알겠습니당, 사장님!
-예, 로드.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용사님. 확실하게 붙잡겠습니다.
한상우의 명령을 따라 캐릭터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쨍그랑-! 까드드득-!
한상우는 연진이 [워터 플라스크]와 [결빙 플라스크]로 만든 얼음벽을 밟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방법은 명확했다.
셀리나가 [멸망의 보옥]을 땅으로 던지기 전에 처치하는 것.
그녀는 스킬을 시전하는 중이라 움직일 수도 없었고, 세이가 [빛의 속박]으로 묶기까지 했으니 거리를 좁혀 공격만 하면 될 것이었다.
물론, 양면의 셀리나에게 가는 길이 쉽지만은 않았다.
“스카악!!”
“스하아아악…!”
한상우가 얼음벽을 밟고 뛰어오르려는 순간, 양옆에서 데스나이트들이 괴성을 토하며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과연, 평범한 녀석들은 아니었는지 그 공격을 당하고도 곧바로 다시 부활했다.
하지만 데스나이트들도 한상우를 막지 못했으니.
[캐릭터 : 땡길거야가 끌어오기를 사용합니다.]
파지지지직-!
“가십시오, 주군!!”
미리 대기시켜 두었던 땡길거야가 여러 개의 오러 사슬을 날려 놈들을 모두 당겨버렸다.
허허벌판처럼 드러난 활로.
“흐읍…!!”
한상우는 그대로 연진이 만든 얼음벽을 밟고, 매직킹의 공중 부양 버프 마법, [레비테이션]의 효과를 발휘해 양면의 셀리나에게 날아갔다.
양면의 셀리나 역시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감히 어딜…!”
황금 구체를 들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염력]을 사용, 한상우를 지상으로 내려보내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대책은 통하지 않았으니.
‘용족 군단장의 갑옷’ 7.
‘전설적인 꼬마 대장장이의 화산방패’ 6.
‘찬란한 대현자의 팔찌’ 9.
총합 22.
한상우가 장비한 아이템들의 마법 저항력 덕분이었다.
“무, 무슨 마법 저항력이 이렇게…!!”
그리고 홍진성이 마법 저항 5에도 고전했듯이, [염력]은 마법 저항의 영향을 특히나 많이 받는 스킬.
물론 EX급 몬스터가 된 셀리나의 염력은 과거 홍진성의 [염력]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으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한상우의 마법 저항은 너무나도 높았다.
거리를 좁힌 한상우는 곧바로 화산검을 휘둘렀고.
[발화]
[반월 베기] [만월 가르기] [급소 찌르기]
[제국기사단의 검술의 연계기가 완성됐습니다.]
[연계 효과 : 월광 폭발]
콰아아아아아앙-!!
연계기를 완성시켜 양면의 셀리나에게 거대한 푸른 불꽃을 선사했다.
그러나 그녀 역시 만만치는 않았다.
“이놈이…!!”
“끈질기기도 하네.”
한상우가 거침없이 다가오는 순간, 미완성인 [멸망의 보옥]을 던져 푸른 화염을 상쇄시키려 한 것이다.
공중에서 맞부딪치는 두 개의 힘.
화륵-! 쩌어어어어어어엉-!!
푸른 화염과 검은 오러가 서로 뒤엉키며 막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여파로.
휘이이잉-! 화아아아악-!
“으, 으윽….”
바닥에 엎어져 있던 리 샤오펑이 눈을 떴다.
후폭풍이 워낙 세다 보니 몸이 돌들과 부딪쳐 기절했던 의식이 돌아온 것이다.
리 샤오펑은 본능적으로 목을 만졌다.
마지막 기억이 검에 목이 꿰뚫리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상처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몰랐지만, 세이의 광역 치유 덕분에 목에 꿰뚫린 상처는 모두 회복되어 있었다.
리 샤오펑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졸음이 몰려오기도 했거니와.
‘…꿈인가 보군.’
잠시 흐릿한 시야로 펼쳐졌던 광경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쾅-! 쾅-! 콰과아아아앙-!!
푸른 화염과 검은 화염이 뒤섞여 타오르고, 한상우와 군주 길드의 길드원들이 방패와 보호막 등을 펼쳐 지상의 피해를 줄이려는 광경은 SSS급 헌터가 봐도 꿈이라고 판단할 정도로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하지만 아주 잠깐, 리 샤오펑이 본 모습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월광 폭발]과 [멸망의 보옥]이 충돌한 직후 한상우는.
‘전원 방어 태세! 사람들을 지킨다!’
-예, 주군!
캐릭터들에게 방어 태세를 지시했다.
폭발이 워낙 세다 보니 기절한 헌터들과 민간인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상우는 화산방패를 들어 [용암 전개]로 방어했고, 캐릭터들은 [수호의 방패], 보호막, 얼음벽, [쾌속 이동]을 통한 인원 구출 등으로 지상의 피해를 최소화했다.
그렇게 거대한 폭발의 후폭풍까지 모두 끝나자.
“하아, 하아…. 정말이지, 강하군요.”
폭발의 여파로 데스나이트는 모두 소멸하고, 피투성이가 된 양면의 셀리나는 지상으로 떨어져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무위로 돌아간 비장의 수들.
‘힘이… 더 많은 힘이 필요해!’
양면의 셀리나는 이를 악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황금 구체를 높이 들며 소리쳤다.
“위대한 존재시여, 제게 힘을 내려주소서!!”
힘이 거의 바닥난 터라, 싸움을 이어가기 위해선 더욱 많은 신성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충전되지 않아? 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보통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면 조금이라도 힘이 들어왔었는데, -이상하게도 신성력이 조금도 채워지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신념의 정수를 획득하라.
지금껏 주기적으로 들리던 목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달라진 현실.
“왜? 뭐가 잘 안 되나 보지?”
한상우는 그런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걸음을 내디뎠고.
‘설마… 버림받은 건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양면의 셀리나의 머릿속으로는 이성과 감성이 떠올랐다.
이성이 말했다.
자신은 버림받은 거라고.
위대한 존재께서 내린 과업을 실패하고,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여주니 버려진 거라고.
감성은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기적을 일으켜주시는 존재께서, 10년이라는 시간을 헌신해온 자신을 버릴 리가 없다고.
“시, 신전…. 신전으로 가야 해!! 거기서 다시 시작하면…!”
양면의 셀리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혼자서 중얼거리더니, 황금 구체를 끌어안고 마강진이 했던 것과 같은 간이 포탈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녀의 발버둥은 수포로 돌아갔다.
“어디 가려고, 박쥐 자식아.”
양면의 셀리나가 포탈로 들어가려는 순간, 매직킹이 [인페르노]를 사용해 포탈 앞을 화염벽으로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방해하지 마라…!”
막혀버린 활로.
촤악- 촤악-! 촤아아아악-!!
양면의 셀리나는 아예 크고 작은 포탈을 주변에 다수 생성해 활로를 늘려 버렸다.
“칫! 셀리나를 막아! 아니면 포탈을!”
방금 전의 공격으로 힘을 전부 소진했을 줄 알았는데, 아직 이런 발버둥이 가능하다니.
한상우는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소환수들에게 명령했다.
그런데 캐릭터들이 명령에 따라 움직이려는 순간.
후우우욱- 쾅-! 쾅-! 콰과과과광-!!
하늘에서 쏟아진 수십 개의 유성이, 셀리나가 마지막 힘을 짜내어 만든 포탈들로 향하는 길을 모두 막아버렸다.
누구의 소행인지 가릴 필요는 없었다.
움직이려고 하는 양면의 셀리나 앞을.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셀리나 칸데바.”
대검을 든 강철만이 가로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