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16장 군계일학 낭중지추(13)
분노, 경멸, 비탄, 원망.
강철만의 눈엔 여러 감정이 섞여 있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자의 표정은 그러했다.
그러나 셀리나한테는 강철만의 표정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그저.
“가, 강철만…! 저들을, 저들을 막아줘요! 디바인 실드를 공격한 적입니다!!”
강철만에게 발을 절뚝거리면서 다가가 한상우 및 캐릭터들과 싸울 것을 간청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강철만은 대검으로 다가오는 셀리나를 겨눌 뿐이었다.
“…추하니까 그쯤 하시죠. 상황은 EX급 던전으로 대피한 연합 헌터들에게 이미 들었습니다. 셀리나 칸데바… 아니, 국제적 테러 단체 루미나스의 수장인 당신을 이 자리에서 즉결 처형하겠습니다.”
혼란은 없었다.
전투가 벌어진 직후, 고전을 면치 못하던 연합 헌터 몇몇이 EX급 던전으로 도망쳐 아이템이 사라지지 않도록 던전을 지키고 있던 강철만에게 사건의 전말을 알려줬으니까.
무위로 돌아간 셀리나의 이간질.
그녀에게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칫…! 감히 꼭두각시 주제에 내 말을 거역하다니…! 얼른 한상우나 공격해!!”
황금 구체의 힘을 빌리는 것뿐이었다.
다른 디바인 실드와 루미나스 헌터들은 신성력과 의식을 잃어 더 이상 세뇌가 불가능했지만, 아직 신성력이 남은 강철만은 황금 구체를 활용하면 충분히 조종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저벅- 저벅-
“몬스터로 변한 외형에, 한상우 헌터를 공격하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까지… 믿고 싶지 않았지만, 들은 게 사실이군요.”
“뭐, 뭐지…?”
강철만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한상우를 공격하기는커녕 대검을 늘어뜨린 채 자신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진상은 곧 드러났다.
[멸망의 보옥]과 포탈 생성에 모든 힘을 쏟아부은 터라 황금 구체와 자신의 몸엔 강철만을 조종할 신성력조차 남지 않은 것이다.
“자, 잠깐!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네요, 강철만 헌터. 우리 대화로…!”
셀리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황급히 변명을 시작했다.
그러나 통할 리가 없었다.
쿵-!
강철만은 한순간 거리를 좁혀 대검을 휘둘렀다.
양면의 셀리나는 검은 날개를 이용, 서둘러 위로 날아올랐지만 공격을 완벽하게 피하지는 못했다.
“꺄악!!”
강철만의 대검이 그녀의 다리를 갈라버린 것이다.
그래도 급소를 피해 다행이라고 볼 수도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생명을 좀 더 연장한 것에 불과했다.
전장엔 강철만 말고도, 아니 강철만보다 더 강한 존재들이 포진하고 있었으므로.
“모두, 시작… 아니, 끝내자.”
한상우의 나직한 음성 뒤로, 여러 신형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땡길거야는 오러 사슬을 날려 셀리나를 붙잡았고, 다크어둠과 매직킹은 높이 뛰어올라 쌍단검과 [에너지 볼트]로 검은 날개를 파괴했다.
그리고 그 뒤로.
탁탁탁탁-! 쿵-! 타앗-!
“하아아아앗!!”
세이에게 버프를 받은 한상우가 연진이 만든 얼음벽을 밟고 뛰어올라 화산검을 내질렀다.
[발화] [요새 뚫기]
단순하지만, 찰나에 최대 화력을 발휘할 수 있는 스킬.
가까워지는 오러 랜스를 본 순간, 양면의 셀리나는 마지막을 직감했다.
“신이시여….”
그녀의 나지막한 기도 뒤로.
콰아아아아아앙-!!
전장엔 폭발과 함께 굉음이 울려 퍼졌고.
[마신 추종자 양면의 셀리나(EX)를 처치했습니다.]
한상우의 시야엔 끝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툭-! 쿵-!!
한상우는 땅으로 착지한 뒤,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커다란 날개를 펼치며 수많은 병력을 호령했던 디바인 실드와 루미나스의 수장이 먼지로 변해 사라지고 있었다.
마침내 끝난 전투.
하지만 그녀가 남긴 비극과 참상은 그대로 남아 있었으니.
한상우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는 강철만에게 다가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혼란스러우셨을 텐데 올바른 결정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철만 길드장님.”
“아닙니다. 감사는 제가 드려야죠. 셀리나뿐만 아니라 디바인 실드와 루미나스가 전부 돌변했다고 들었는데 해결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하신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EX급 던전에서도 그렇고, 정말 믿기 힘든 활약이군요.”
강철만은 주변을 돌아보며 그렇게 대답했다.
폐허가 된 도시.
디바인 실드 헌터들부터 몬스터가 된 루미나스 헌터들까지.
수많은 헌터들이 의식을 잃은 채 널브러져 있었다.
세계 최고 등급인 SSS급 헌터마저 적이었던 상황.
하지만 한상우와 그의 길드원들은 위기를 극복했고, 종국에는 몬스터로 변한 셀리나마저 처치했다.
전투가 막바지였던 시점에 밖으로 나왔던 강철만으로서는, 어떻게 그들만으로 그게 가능했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강철만의 시선이 한상우와 캐릭터들, 그리고 이번에 새로 소환된 세이를 향했다.
확실히 한상우도 어느 정도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제압은 힘 조절이 필요해 사살보다 몇 배는 더 어려운데 자신과 캐릭터들은 세계 최고 헌터인 디바인 실드와 루미나스들을 모두 제압해 버렸기 때문이다.
어쭙잖은 변명은 통하지 않을 것이었다.
다만 지금은 구체적으로 설명할 때가 아니었다.
“윽, 으윽….”
“살려주세요….”
셀리나를 처치하긴 했으나 전투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구조를 요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절한 상태긴 하지만 몬스터가 된 루미나스 헌터들이 남아 있기도 하고.
한상우는 주변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그건 나중에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사상자를 수습하고 회복시키는 게 우선이니까요.”
“확실히 그렇군요. 일단 사태를 수습하도록 하죠.”
강철만은 한상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구호 조치를 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러다 돌연.
“아참, 셀리나 칸데바에 대해선… 제가 조사해도 되겠습니까? 구호 조치도 중요하지만, 진상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저도 디바인 실드였던 만큼, 이번 일은 직접 알아보고 싶습니다.”
셀리나가 누워 있던 자리를 보며 말했다.
구호 조치도 중요하지만, 진실을 밝히는 것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 판단한 것이다.
한상우는 잠깐 고심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죠. 구호 조치는 저와 길드원들이 맡도록 하겠습니다.”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우선 관련 증거부터 채집하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흔적이 사라지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셀리나가 디바인 실드와 루미나스를 동시에 운용하고 있었기에, 디바인 실드였던 강철만에게 진상 파악을 맡기는 건 리스크가 있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셀리나의 반응과 강철만의 행동, 그리고 SSS급 헌터인 칼 제이스도 단순 꼭두각시로 이용됐던 정황을 놓고 봤을 때 깊게 연루됐다고는 볼 수 없었다. 아마 마찬가지로, 신성력을 이용해 조종할 생각이었겠지.
게다가 아까 셀리나 앞에서 결단을 내렸던 강철만의 태도를 생각해 보면, 그 이상의 적임자도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한상우는 강철만의 의견에 동의한 뒤, 캐릭터들에게 구조 활동을 지시했다.
“전원, 지금부터 부상자들을 구조한다. 땡길거야와 다크어둠, 매직킹은 잔해에 깔린 사람들을 구조하고, 연진과 세이는 부상당한 사람들을 치료하도록.”
“예, 로드. 마나가 좀 들겠지만 바람 마법으로 잔해를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가지, 암살자여. 그런데… 괜찮겠나?”
“무슨 말이지, 깡통 기사?”
“워낙 비실해서 자갈보다 큰 돌을 들 수 있을까 싶어서 말이지.”
“흥! 너보단 수월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
땡길거야와 다크어둠은 여느때와 같이 투닥거리며 명령을 따랐고.
“연금술사 아가씨, 도와주시지 않으시겠어요? 아가씨의 포션이 있으면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빠르게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요.”
“넹, 얼마든지요! 사장님, 저는 포션을 만들어서 사제 언니를 도와드릴게요!”
다른 캐릭터들도 각자 분배받은 역할을 토대로 구조 활동을 시작했다.
적들을 처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고한 이들의 희생을 막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
마나 포션을 마시던 한상우는 구호에 힘쓰는 캐릭터들을 흐뭇하게 바라본 뒤, 휴대폰을 꺼내 신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행원으로서 신대훈도 분명 이 근처에 있었을 것이기에 안위가 걱정되기도 했고, 사태를 해결하려면 다른 이들의 힘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주머니 속에 넣어뒀던 핸드폰은 액정에 금만 조금 갔을 뿐 멀쩡하게 작동했다.
그런데 신대훈에게 전화를 걸던 그때.
번쩍-!!
갑자기 등 뒤에서 황금빛이 번쩍였다.
“……!”
한상우는 재빠르게 자세를 잡으며 몸을 돌렸다.
분명 모든 게 끝났는데, 돌연 등 뒤에서 섬광이 터지면서 셀리나가 사용하던 신성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진상은 곧 밝혀졌다.
셀리나가 사라졌던 자리.
강철만이 찌그러진 황금 구체를 들고 서 있었고, 황금 구체에서는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거 얼른 손에서 떼요, 강철만!!”
한상우는 화산검과 화산방패를 들고 다시 달려 나가며 소리쳤다.
강철만 또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인 듯, 당황한 목소리로 다급하게 외쳤다.
“제길, 안 떨어집니다! 떼어낼 수가 없어요!!”
점점 커지는 섬광에 황금 구체를 떼어내려 반대쪽 손을 사용했지만 접착제라도 바른 것처럼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상황.
그 뒤에 벌어진 일은 더욱 믿기 힘들었다.
화아아아악-!! 콰아아아아앙-!!
황금 구체에서 방출된 섬광이 점점 커지더니 이내 강철만을 집어삼키고 폭발한 것이다.
한상우는 강철만을 도우려 했으나.
“주군, 가까이 가시면 안 됩니다!”
어느새 앞으로 다가온 땡길거야에 의해 저지당했다.
그리고 빛이 사그라들었을 때.
강철만은 온데간데없고.
[최후의 순교]
[등급 : EX급]
[마신의 힘으로 생성된 던전입니다.]
[제한 시간 내에 클리어하지 못할 경우, 강철만의 신성력을 매개로 삼아 폭발합니다.]
[남은 시간 : 30분]
[1인 던전입니다.]
[단 한 명만 진입할 수 있으며 진입자 외의 존재는 해당 던전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새로운 던전이 생성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