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켈레톤을 키운다 162화
창왕 진자의
촤아악! 촤아악!
짹짹! 짹짹짹!
철썩이는 파도 소리와 지저귀는 새 소리가 싱그럽게 들려왔다.
인도 서부에 위치한 신비 섬의 해변.
“스으으읍!”
나는 호흡을 길게 들이마셨다.
“후우우!”
그리고 대차게 뱉어냈다.
상쾌한 공기가 폐를 깨끗이 헹군 채 허공에 흩어졌다.
‘아아, 달콤하구나.’
수많은 던전을 다녀보고.
그중엔 열대우림과 엘프들이 사는 숲도 있었지만.
역시 지구만 한 곳이 없다.
“크.”
어찌 이 맛을 잊으랴?
던전을 수없이 다니다 보면, 공기에도 맛이란 게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후아!”
나는 시원섭섭하게 숨을 뱉었다.
아!
속으로 외쳤다.
드디어 끝났네!
과거 징병제가 있었을 당시, 만기 전역한 병장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나는 후련한 감정을 온몸으로 만끽했다.
서울 오성(五星) 형님, 누님들!
이 주동훈이 결국 해냈습니다.
약속했었죠?
무조건 해내겠다고.
해내다 못해, 좋은 성적으로 끝마쳤습니다!
라며 자화자찬하고 있을 무렵.
“훈!”
“팀장!”
저 멀리서.
팀원들이 뛰어왔다.
다들 모여 있는 걸 보니, 내가 나오길 기다린 모양이었다.
“이야, 훈! 가장 늦게 온 걸 보면, 역시……! 5시간을 다 채운 거예요?”
가장 먼저 달려온 올레나가 장난스럽게 눈을 흘겼다.
“채우지 않았겠는가? 팀장이 어떤 사람인데.”
“맞아요. 우리야 뭐 1단계부터 3단계까지 다양하다 쳐도. 팀장이 3단계라? 그건 좀 어색하긴 하죠?”
이어 다가온 막시와 묘이 하나도 동조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블라디미르의 미간이 찌푸려진 건 그때였다.
“우리 팀장을 뭐로 보고. 겨우 5단계라고? 헛소리! 우리 팀장의 한계를 멋대로 평가하지 마라! 팀장은 그 틀을 깨버리는 사람이라고! 5단계가 끝이라고 5단계만 클리어할 양반이냐?”
“에이, 그러기도 한데. 블라디미르는 3단계에서 탈락했다면서요?”
“그건 나고! 팀장은 팀장이다! 그렇지, 팀장?”
그가 나를 열렬한 눈으로 응시했다.
다른 팀원들도 은근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하, 하하.”
내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 사람들이.
5단계만 해도 말이 안 되는 성적인데, 무슨 내가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저런다냐?
‘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은근히 좋았다.
저들이 하는 행동은 나를 인정하는 걸 넘어서.
우러러봐야만 나올 수 있는 행동이니까.
헌터란 기본적으로 자존심 덩어리들이다.
특히 고랭크로 갈수록 더 심해진다.
당장 A급만 해도.
일개 범인은 절대 될 수 없는 경지 아니던가.
게다가 저들은 그냥 헌터가 아니다.
모두가 랭커 다섯에게 인정을 받고 들어온 랭커 후보자다.
특히 심판창은 창왕의 제자요.
올레나는 옥스퍼드 수석 출신이다.
열심히 살아온 자들.
각자의 분야에서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아온 자들.
그런 자들이 나를 우러러보고 있다는데, 당연히 기분 좋지.
“이야!”
올레나가 외쳤다.
“저 거만한 긁적임 봐요! 게다가 부정도 안 해! 이건 진짜다! 이건 진짜예요! 블라디미르 말이 맞나 봐요!”
“정말?”
“역시, 그렇지? 내가 뭐랬어! 그게 우리 팀장이라고! 어이, 팀장! 그래서 5단계 위에는 뭐가 있더냐! 10단계? 아니면 20단계?”
그래.
인정하자.
내가 대단한 놈이라는 걸.
우리 기수의 팀장이 된 만큼.
그리고 우리 팀원들이 대단한 만큼.
더 거대한 존재가 되어주면 된다.
그게 저들을 위한 길이기도 하다.
“하하, 그런 게 어딨어요? 그냥 열심히 버텼죠. 뭐, 어쨌든 다들.”
내가 말했다.
“고생했어요. 진심으로요.”
그러자 다들 장난스러운 표정을 거뒀다.
동시에 미소 지었다.
“맞지, 고생했지.”
심판창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어.”
50명의 후보를 제쳤고.
역대 시련 기록 1위를 달성했다.
‘내가.’
만년 E급 헌터였던, 이 주동훈이 말이다.
모두가 무시했다.
하급 용병 길드에서 소일거리나 하며 살았고.
공터에 나가 훈련할 때도, 길드 관계자들은 나를 헛된 꿈이나 가지고 사는 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제는 세상에 떳떳하게 말할 수 있다.
나 진짜 노력했다고.
진짜 아팠고, 진짜 힘들어서 얻어낸 결과라고.
“이제 우리 다 랭커겠네요?”
올레나가 빙긋 웃었다.
“그거 알아요? 다들 핸드폰 보세요. 미국 시각으로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새해예요.”
새해.
헌터들의 축제이자.
미성년자를 벗고 성인이 된 자들이 새로운 ‘고유 능력’을 받는 날.
그리고.
세계 랭킹 게시판이 대거 변경되는 날.
“다들 아시죠? 게시판. 원래는 누가 죽을 때마다 잠깐잠깐 변경되고, 실력 같은 건 월초에 조금씩 반영되는 게…… 연초에는 완전히 뒤바뀌잖아요.”
“암, 알지. 연초 변경은 그냥 대격변이지.”
“흐흐, 기대되는군. 랭커라니! 내가 랭커라니……!”
동료들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두근.
나 역시 심장이 뛰었다.
랭커.
3년 전부터 마음속에 품어왔던 나의 꿈.
“허허, 난 빨리 가봐야겠어.”
중년 막시가 말했다.
“연말은 가족끼리 보내야지. 딸 아이가 기다리고 있거든.”
“와, 막시 아재. 딸도 있었어?”
블라디미르가 의외라는 듯 눈을 치켜떴다.
“말 안 했나? 두 명이나 있는데.”
“하긴, 페이스가 딸 둘 정도는 있어 보이긴 해?”
“허허허, 농담은.”
“농담 아닌데. 하여튼, 나도 가보긴 해야지. 우리 갱단 애들, 보스 없다고 질질 짜고 있을 수도 있거든.”
블라디미르가 나를 슬쩍 바라봤다.
“여하튼, 나중에 기회 되면 꼭 다시 만나 보자고. 특히 팀장. 오케이?”
“예, 그러시죠.”
그렇게 하나둘.
다음을 기약하며, 자리를 떴다.
막시와 블라디미르, 카푸, 그리고 묘이 하나는 공간술을 통해 섬 너머로 이동했고.
섬에는 나와 올레나 심판창만이 남았다.
‘나도.’
돌아가야지.
신경 쓰지 못했던 드미르 공방도 다시 돌봐야 하며.
앞만 보고 성장하느라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것도 정비해야 했다.
봉인 해제만 되고 신경 쓰지 못했던 뼈팔이.
이번에 각성한 카덴과 다나.
새로운 스킬들과.
노인과의 훈련.
등등등.
정리할 게 태산이었다.
그렇게 속으로 셈을 하고 있을 찰나.
스슷!
뒤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흐읍!”
나는 나도 모르게 헛숨을 삼켰다.
가히 엄청난 기세.
‘누구지?’
심사위원이라도 기다리고 있던 건가?
나도 올레나도.
그 기세를 느꼈는지, 긴장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볼 때였다.
“사부.”
심판창이 정중히 포권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오셨습니까?”
허.
심판창의 사부라면?
나는 눈을 부릅뜨며, 천천히 걸어오는 존재를 바라봤다.
창을 든 흑발의 노인은 마치 신선을 보는 듯 신비했다.
“세상에, 저분은……!”
올레나가 경악하며 외쳤다.
“선인회(仙人會)의 회주이자 세계 랭킹 10위인 창왕(槍王) 진자의(陈子毅)?”
그랬다.
전 세계가 알고 있는.
지구에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
“…….”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과거엔 랭커면 다 대단해 보였는데.
그게 얼마나 웃긴 판단이었는지, 비로소 성장한 나는 깨달았다.
등불과 태양을 보며, 어떤 게 더 밝은지 판단하지 못하는 개미처럼.
진짜 아무것도 몰랐던 거다.
‘과연, 엄청난 사람이다.’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빈틈이 없어서.
또한 내포하고 있는 기운이 너무도 엄청나서 숨이 턱- 하고 막힐 지경이었다.
“흠?”
그런 나를 느꼈음일까?
창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처음 보는 랭커로군. 자네는 누군가?”
그가 나에게 물어왔다.
……예?
랭커?
그냥 창왕이 하는 말인데, 왜 이리 가슴이 설렐까?
“혹여 자네도 제자를 찾으러 온 건가? 아니면, 델라일라가 간혹 고용하곤 한다던 심사위원인가?”
그렇다.
그 위대한 창왕이 나를 후보라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아예 심사위원과 동급으로 보고 있었다.
“사부! 그게 아니라, 이번에 사귄 제 친우입니다! 저와 같은 기수의 후보였습니다.”
“……후보라고? 심사위원이 아니라 랭커 후보란 말이냐?”
창왕의 미간이 더욱더 구겨졌다.
으음.
내가 판단컨대.
저 눈빛은 우리 만술 노인이랑 좀 비슷했다.
재목(材木)에 굶주린 눈빛.
아니, 더 나아가서.
질투심까지 살짝 섞인 느낌인가?
“그렇습니다, 사부. 과연 대단한 자였습니다. 이 제자……! 돌아가서 드릴 말씀이 많습니다.”
“그 내성적인 네가 인정할 정도란 말이냐……?”
진자의의 오묘한 눈빛이 나를 훑었다.
살인자들을 심판하고.
악(惡)한 자를 싫어하는 심판창과는 다르게.
그 스승이란 자의 눈은 무언가 뱀을 연상케 했다.
살짝 소름 끼치는 느낌?
“그렇습니다. 친우도 특히 창을 사용하는데, 우리 이화창과는 사뭇 다르면서도 확실히 강했습니다.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호오?”
창왕의 입가가 흥미롭다는 듯 비틀어졌다.
“대륙의 천재이자, 자존심 센 네가 인정하는 창술이라.”
스윽!
그가 창을 들었다.
굉장히 비싸 보이는 황금빛 창.
“궁금하군.”
쿠궁!
순간, 그의 몸에서 엄청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스승님?”
심판창이 살짝 당황했다.
“으음.”
나 역시 눈살을 찌푸렸다.
다 좋은데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다짜고짜 나타나서 창을 들이민다고?
아무리 세계적인 랭커라 해도.
너무 무례하잖아?
“스승님. 이게 무슨……!”
“조용하여라.”
“예?”
“이화창은 대륙 최강의 창술이니라. 한데, 네가 익힌 창술은 아직 제대로 여물지도 못했으니……. 그것만큼은 바로잡고 넘어가야 하지 않겠느냐?”
말은 어려웠지만, 결론은 단순했다.
우리 이화창이 짱이니.
다시 덤벼봐라.
그 수준 차이를 깨닫게 해주겠다.
이 말 아니던가?
“후…….”
나는 옅은 숨을 내뱉었다.
아무리 강한 상대라 할지라도, 이제는 다르다.
도전해 오는 건 피하지 않을 거다.
그렇게 창을 들 찰나.
투두두두…….
창공에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왔다.
“어어? 저기 봐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올레나가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에 뜬 헬기에는 ‘백돈’ 마크가 박혀 있었고.
그 위로 한 인영이 뛰어내리고 있었다.
“크하하하하!”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꼬챙이 노인네가 나이를 처먹더니 미쳐 버린 게로구나!”
쐐애애액!
중력으로 떨어지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내리꽂히는 사내의 주먹엔 화려한 건틀릿이 끼워져 있었다.
“랭킹 10위씩이나 먹어놓고. 그게 뭐 하는 추태냐? 애들은 내버려 두고 나랑 붙자!”
콰아아앙!
그의 주먹이 바닥에 내리박혔다.
두두두두…….
그것만으로 땅이 지진 나듯 흔들렸으며, 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미친…….”
올레나가 경악했다.
“무슨…… 크레이터가 생겼어.”
또한 그가 떨어진 위치에 직경 20m의 큼지막한 구멍이 생겼다.
“저분은…….”
“예전에 말한 적 있죠? 광전사예요. 아무래도 절 데리러 온 모양인데.”
내가 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히 놀랐다.
추천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여기까지 데리러 오시다니.
“광전사.”
세계 랭킹 20위.
광전사(狂戰士) 장대웅.
그 사내를 바라보며, 창왕이 중얼거렸다.
“여, 천즈이 어르신. 반가워?”
“무례한 건 여전하군.”
“무례한 건 노친네가 더 무례하지. 타국에서 다짜고짜 자국 랭커한테 무기를 들이밀다니. 그거 국가 분쟁 사유인 거 몰라?”
“큼, 저 아이가 네 제자인가?”
“제자는 무슨. 그냥 동생이다.”
“동생…….”
“하여튼!”
콰앙!
광전사가 다시 한번 주먹을 바닥에 내리박았다.
“노친네가 얼마나 강하든, 나 안 빼는 거 알지? 붙으려면 나랑 붙자! 마침 곧 새해인데 잘됐네. 랭킹 대변동으로 세계를 놀라게 해보자고!”
“…….”
창왕이 미간을 구겼다.
무언가.
실력으로 딸려서 그런다기보다는.
미친놈은 피하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크하하하하! 그 표정 뭐냐! 쫄았어? 쫄았냐고!”
“…….”
나는 그 모습을 황당하게 쳐다봤다.
아니, 대웅이 형.
나한텐 19위도 못 이긴다며 왜 이러는 거야?
“그 말…….”
창왕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은 건 그때였다.
“진심인가?”
스윽.
그가 창을 들었다.
동시에 중얼거렸다.
“그 발언. 선인회에 대한 선전포고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겠지?”
“…….”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뭐야, 이거.
밖에 나오자마자 또 상황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