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켈레톤을 키운다 173화
험악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 (2)
“자, 잘못했습니다!”
무릎 꿇은 파벨이 애달프게 외쳤다.
“제가 다 책임지겠으니, 차라리 화가 안 풀리신다면 제 목숨만 거둬 가시고 아우들만큼은 살려주십쇼! 생긴 건 저래 봬도 순진한 놈들입니다!”
진짜 대단한 놈들이었다.
아무리 인간이 궁지에 몰리면 작아진다 해도.
이렇게까지 빠르게 태세 전환을 할 수 있다니.
“아, 아닙니다! 형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파벨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수하로 보이는 이들 역시 그 껄렁한 태도를 순식간에 바꾸었다.
“다 저희 잘못입니다!”
흉악한 뱀눈들이.
“우리 형님은 놔두시고 차라리 저희를 죽이세요! 우리 형님이 얼마나 착한 사람인 줄 아십니까?”
“맞습니다! 우리가 훨씬 나쁜 놈입니다! 형님에겐 토끼 같은 자식과 여우 같은 마누라가 있다고요!”
초롱초롱한 사슴 눈으로 변하는 마법.
그들 전부.
무기를 버린 채 무릎 꿇고 투항했다.
“…….”
나는 그저 멍한 표정으로 저들을 바라봤다.
“……이게 맞는 거예요?”
기소율도 혼란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조금 전까지 팔을 꺾는다느니, 정신을 못 차렸다느니 협박하던 깡패들이 어찌 저런 순수해 보이는 표정을…….”
인정한다.
진짜, 모르는 사람이면 속을 수도 있을 법한 표정.
게다가 저 흉악한 대머리 보고 착하단 말을 하다니, 그건 좀 너무하잖아?
“저도 황당하네요. 게다가 뭐 저런 턱도 없는 억지 신파극을…….”
“아무리 봐도 우리가 랭커인 걸 알고 수작 부리는 범죄자들이죠?”
기소율의 물음에 러시아 헌터들이 다급해졌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신속하게 부인했다.
“아니! 진짜라고요!”
“생긴 거로 뭐라 하지 마세요! 우리 파벨 형님, 생긴 건 음흉하게 사람 수천은 죽였을 법한 살인마여도 마음만큼은 부처가 따로 없다니까요?”
“맞습니다! 그런 거 다 선입견입니다!”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로.
자꾸 살려달라면서.
자신들의 착함을 강조하는 녀석들.
저벅.
나는 무릎 꿇은 파벨을 향해 걸었다.
“…….”
그가 입술을 씹은 채, 시선을 내리깔다가.
내가 다가오니, 다시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내가 입을 열었다.
“생각은 해봤어?”
“새, 생각 말입니까?”
“아까 말했던 역제안 말이야. 내가 너희를 두들겨 패지 않는 대신, 순순히 협조해 주라는 거.”
“…….”
“미안한데, 난 너희가 착하든, 악당이든, 순수하든. 별 관심이 없어. 그냥 내가 필요한 정보만 주고 꺼지면 돼. 오케이?”
“그, 그럼 저희의 무례가 용서되는 겁니까?”
파벨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왜, 너희 같았으면 바로 두들겨 팬 다음 드럼통에 담갔을 걸 그냥 봐주니까 믿기지 않냐?”
아무리 저들이 선함을 강조해도.
-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거지.
- 저놈 보소. 웃어? 정신 못 차렸나 본데요? 아니면 정신에 이상이 있나?
- 미친놈이었군. 그냥 얻어맞자. 조금 이따 드럼통에 담가주마.
나에게 했던 이런 말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아, 아닙니다! 그리고 그 드럼통에 담근다는 말은 뜨끈한 욕탕을 말한 거였…….”
“계속 말장난할래?”
화르륵!
내가 지팡이를 창으로 변형시키자, 그가 다급하게 일어섰다.
“지, 진짜입니다!”
파벨이 억울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뒤쪽 빌딩을 가리켰다.
“우선 저희 본거지로 모시겠습니다! 제가 백날 말해봐야 직접 보시는 것만큼은 못할 테니까요! 게다가 저희 자하르 형이 똑똑하고 아는 게 많으니, 그편이 저보다는 형을 상대하는 게 더 도움 되실 겁니다!”
“그래?”
내 물음에 녀석이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흠.”
그럼 일단 가서 보자고.
* * *
그 시각.
빌딩 창문 밖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자하르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젠장!”
자하르가 외쳤다.
정중하게 모시라고 보내놓은 동생과 수하들이 무릎을 꿇은 채 손 들고 서 있어?
상황이 너무도 명백하지 않은가!
파벨이 아무리 멍청해도 S급 헌터다.
또한 그가 데리고 다니는 수하들도 무식해서 그렇지 다 A~S급이다.
그 정도 헌터 20명이면 웬만한 랭커도 무시하지 못할 텐데.
근데 그걸 단번에 격파했다?
“무조건 랭커잖아!”
그것도 높은 순위의.
“자하르 님! 자하르 님!”
부하 한 명이 헐레벌떡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조금 전 크라스노야르스크 국제 공항에 랭커 둘이 입국했다는 소식입니다!”
“뭐? 랭커 둘?”
자하르는 온몸이 얼어붙는 느낌을 받았다.
주륵.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걸 왜 이제 말해, 새끼야!”
“지, 지금 정보가 들어온 걸 어떡합니까!”
“제기랄, 누군데!”
“그, 그게…….”
부하가 머뭇거렸다.
자하르의 목소리에서 상황이 심각함을 판단한 것이다.
“빨리 안 말해?”
“대, 대한민국에서 입국한 78위의 스켈레톤 킹과 151위의 암제라고…….”
“미친!”
콰아앙!
자하르가 저도 모르게 탁자를 강하게 내려쳤다.
‘하필……!’
왜 하필 그런 자가 이곳으로 온단 말인가.
‘하이 랭커.’
100위 권 내의 하이 랭커는 그야말로 막을 수 없는 재해였다.
비랭커 S급 수백이 있어도.
아무리 막강한 전략과 함정이 있어도.
개미가 사자를 잡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
그야말로 급(級)이 달랐다.
‘불안하긴 했어.’
어쩐지 동생을 보내면서도, 좀 느낌이 이상했다.
‘차라리 내가 갈걸.’
멍청한 동생이 초면에 어떻게 행동했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
자하르는 다시 창문 밖을 지켜봤다.
녀석들이 천천히 일어나 다시 이쪽으로 다가오는 광경은…….
‘랭커를 여기로 데려와? 어쩌려고!’
자하르의 동공이 수축됐다.
랭커가 비정상인 놈이면 여기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극악의 환경 속에서 겨우 일궈낸 우리의 커뮤니티.
그 모든 것이 박살 나는 걸까?
두려웠다.
미치도록 불안했다.
“자, 자하르 님. 1층에 누가 도착했다는데요……?”
조금 후.
부하가 전달하는 그 정보가 왜 청천벽력 같을까?
‘그냥 무조건 꿇자…….’
그에게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하이 랭커 앞에서 대가리를 박는 것쯤이야.
그거 가지고 뭐라 할 수하들?
여기 아무도 없었다.
* * *
“스켈레톤 킹과 암제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처처처적!
빌딩에 들어서자 수많은 검은 정장들이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허어.’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이거 원.’
하이 랭커란 게 대단하긴 한가 보네.
그냥 이동만 했을 뿐인데, 생전 처음 보는 놈들이 조직 두목 모시듯 대하는 걸 보면.
“부끄럽지만 저는 이곳 애들이 믿고 따라주고 있는 두목, 자하르라 합니다.”
검은 정장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얼굴, 아니, 온몸에 털이 가득한 남자였다.
“혹여 동생들이 불편하게 했다면 대신 사죄드리며, 바라시는 게 있으면 모든 맞추겠습니다. 또한,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 극진히 모시겠습니다!”
호오.
총대를 메는 건가?
나는 문득, 이들에 대해 잘못 판단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살짝 들었다.
보통 진짜 나쁜 놈들은.
위기가 발생하면 뒤로 내빼게 마련이거든.
“우선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나와 기소율은 그를 따라 회의실로 이동했다.
* * *
- 그 던전에 대해서는 저희도 잘 모릅니다. 으음, 사실…… 다른 나라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쪽 지방에서는 예전부터 유명했었습니다. 거기 들어가면 무조건 죽는다는 소문이 있어서, 그 누구도 들어가길 꺼렸었죠.
- 아, 그리고 1년 전쯤에 「고담」 애들이 들락날락했다는 썰도 있어서, 그 공포감이 더한 것도 있습니다.
- 고담 말입니까? 모르십니까? 현 러시아 마피아의 정점에 서 있는 애들인데. 거기도 하이 랭커가 두목이라, 예…… 빡세죠. 아, 이런 건 말하면 안 되는데.
자하르는 열심히 정보를 토해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고.
기소율은 옆에서 그걸 끄적끄적 받아적었다.
‘고담이라…….’
그러고 보니, 예전에 잠깐 들어본 적 있다.
충왕(蟲王) 안드레이랑 포악자(The ruthless) 지마가 소속되어 있는 집단.
러시아 마피아 어쩌구 했었던 것 같기도?
‘결국, 이렇다 할 정보는 없네.’
던전에 대한 건, 이들도 잘 모른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진짜 모릅니다. 저희가 하이 랭커분께 거짓말할 이유도 없고요.”
자하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했다.
사실, 정보를 듣기 전에 회의실로 이동하면서.
자하르의 안내로 빌딩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그 대머리 말이 진짜로 맞았지.’
이들은 이름만 마피아지, 그냥 평범한 집단이었다.
그냥 아포칼립스 세계와 별다를 바 없는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똘똘 뭉친 시민 느낌?
각 층에는 아이들과 여인, 노인들이 터를 잡고 생활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실력 있는 헌터들만 검은 정장을 입고 나서는 모양이었다.
- 저희도 일부러 흉악해 보이는 애들로만 내세우고 키웁니다. 사실, 인간이란 게 본능적으로 파벨같이 빡세게 생긴 놈들은 피하거든요.
- 그렇다고 우리가 그저 약한 건 아닙니다. 약하면 살아남기 힘든 도시이기도 하고, 사실 지금도 강한 놈들이 계속 영입되고 있답니다.
- 그거 아십니까? 형님이 상대했던 애들 중에, 작년 랭커였던 놈도 둘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밀려 나갔지만.
그 외에.
드럼통에 담근다는 말.
그 말도 진짜인 건 솔직히 의외였다.
망한 도시에서 가장 귀한 게 깨끗하고 따듯한 물이며.
그 어떤 악당이라도 두들겨 팬 다음 따듯한 물을 대접하면, 자연스레 교화(敎化)된다나?
“오케이. 그 정도면 됐어.”
짜악!
나는 손뼉을 한번 쳤다.
“어쨌든 여기가 범죄 도시로 유명한 건, 진짜 범죄 도시여서가 아니라 현 러시아 대다수가 이 모양 이 꼴이라는 거지?”
국가가 부패하거나 멸망하기 직전, 도적이 들끓는 것과 같은 이치.
“예, 그렇습니다, 형님. 그렇게 따지면 모스크바도, 상트페테르부르크도, 노보시비르스크도 다 범죄 도시입니다. 거기도 갱단이 들끓거든요.”
“생긴 건 흉악해도 흉악한 짓은 한 적 없고?”
“그저 센 척입니다, 형님. 이곳은 가만히 당하고 있으면 진짜 당하는 도시라서요.”
“그래, 알겠다.”
흐음.
러시아에 처음 와서 만난 마피아가 진짜 착한 애들이었다니.
문득, 친우 하나가 떠올랐다.
블라디미르 로디긴.
시련에서 목숨 바쳐 나를 지켜냈던 동기.
그도 이런 마피아 두목이었을까?
“잠깐, 이곳 좀 둘러봐도 될까?”
“물론입니다, 형님!”
자하르가 즉각 대답했다.
“그냥 집처럼 편하게 지내셔도 좋습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 최고층에 접객실도 마련해 놓았지요! 그곳에서 편히 쉬십쇼!”
이 정도면 확실하다.
진짜 뒤가 구리면, 내가 오래 머무는 게 달가울 리 없을 테니까.
오히려 반기는 기색인 걸 보면, 진짜 착한 놈들인 듯했다.
무서운 도시에서.
내가 머물고 있을 것만큼, 안전한 순간은 없을 테니.
자하르는 나와 기소율을 크나큰 방으로 안내 후, 호다닥 방을 빠져나갔다.
“어쩌시려고요?”
좀 전에.
내가 잠깐 블라디미르를 생각할 때 표정을 본 탓일까?
기소율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냥 거처 하나 마련해 놓는 거죠, 뭐. 그래도 나름 이곳을 주름잡는 집단인 거 같은데. 정보도 얻을 겸?”
어차피 정보를 얻지 못했으니.
선택지는 하나.
직접 던전에 들어가는 것밖에 없다.
‘하지만.’
묘한 느낌이 들었다.
왠지 이곳에서 어떠한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
그냥 심장이 말해주는 감각일 뿐이지만.
사실, 내 감각만큼 확실한 지표도 없다.
“후.”
기소율이 옅은 숨을 내뱉었다.
“결국, 부딪혀 봐야 하는 거군요?”
동시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하르가 신경 좀 썼는지, 호화로운 냉장고와 음료, 간식거리들이 가득했다.
“흠흠.”
기소율이 살짝 불편한 표정으로 헛기침했다.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듯했다.
오는 도중에 보았던 아이와 노인들이 삐쩍 말라 있었으니까.
괜히 힘 있다고 아등바등 사는 곳에 와서 행패 부리는 꼴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이토록 붕괴된 시장에서 저런 음식 구하는 것 자체가 힘들 수 있다.
“그건 걱정 마요.”
알다시피, 내 신조는.
은혜도 원한도 그대로 갚아주는 것.
없는 살림에 좋은 방을 내어주고, 좋은 대접을 해줬으니.
그에 대한 보답 정도는 살짝 해줘도 되지 않겠는가?
주머니에서 폰을 꺼낸 곧이어 문자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 부공방주님? 무릉도원에 식수랑 비상식량들 좀 넉넉히 챙겨 놔주세요. 조만간 챙겨 갈 테니까.
큰 건 아니지만.
이미지 관리 차 행하는 나만의 작은 위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