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켈레톤을 키운다 174화
험악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 (3)
러시아 정부가 실질적으로 붕괴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3년 전이었다.
「고담」
어느 날 생겨난 조직.
러시아 대다수 기업이 합심해 만든 집단은.
실질적 독재인 러시아의 4선 대통령을 단박에 몰아냈다.
아니, 몰아냈다기보다는.
‘꼭두각시’로 만들었다는 표현이 낫겠다.
“우리 대통령이 이상하다!”
몇몇 국민들이 소리를 냈다.
대통령이 공황에 걸렸다는 소리 혹은 미쳤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래도 난 괜찮은데? 솔직히 옛날에 막무가내로 독재하는 것보다 지금처럼 가만히 있는 게 더 나을지도?”
“맞아, 옛날엔 전쟁이라도 일어날까 불안했다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자들과.
“그래도 국가 원수인데 탄핵해야 하는 거 아냐?”
“이상하면 바꿔야지! 게다가 옛날에 했던 투표도 다 조작이라는 썰이 있잖아. 이 기회에 제대로 해보자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부류.
그 와중에서도.
고담의 행보는 은밀하게 지속되고 있었다.
세계적인 마피아 집단.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범죄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이들.
고담이 원하는 건, 고작 ‘독재’가 따위가 아니었다.
민주주의라는 사상 위에 서서, 법으로 통치하는 것?
세계 랭킹 69위, 충왕(蟲王) 안드레이의 성질에 맞지 않았다.
“나는 완전한 군주제 국가의 재설립을 원한다. 내 말이 곧 법이며, 힘으로 국가를 단합시킬 수 있는 강력한 규제를 원한다.”
그의 사상은 조용히 그림자를 통해 전해졌다.
당연히 심각한 반발이 있었다.
하지만, 고담은.
그런 목소리를 내는 자들을 그 누구도 모르게 도륙했다.
기사?
날 수가 없었다.
인터넷?
모든 정보를 차단했다.
혹여 올리더라도.
발견하는 즉시 삭제됨과 동시에, 목숨도 삭제됐다.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세계의 눈을 속이며 지하 세계를 점령했고.
그 결과가 현 범죄 국가의 탄생.
‘이제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어.’
혼자.
회의실에 앉아 있던 자하르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 곧 세계가 눈치챌 거다.
러시아의 실상을.
‘이전에도 하이 랭커가 한 번 왔다 갔었지.’
아무리 소문을 막으려 해도 러시아는 유럽의 거대한 국가다.
눈치챈 몇몇 유럽국들이 도움의 손길을 뻗고자 하이 랭커를 보내온 적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현(現) 세계 랭킹 18위의 쌍검(雙劍) 옥타비아 스펜서.
원정 왔던 그는 그대로 발걸음을 돌리며 말했었다.
- 러시아는 신비한 국가다. 범죄 조직이 있는 것은 알겠는데, 나는 그들에게 닿을 수 없었다.
- 국가가 망해가는 건 보인다. 거리 자체가 조용하고 어딜 가든 마피아 천지이니까. 근데 이상하게도 아무런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 음, 마치 당연히 그런 것 같은 느낌?
의미심장한 말.
더 놀라운 점은, 옥타비아의 저 발표를 듣고도 세계의 움직임이 없었다는 거다.
또한.
- 나도 마찬가지다.
- 뭘 도와달라는지 모르겠다.
- 범죄 집단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후진국을 보는 듯했다.
- 던전에 들어가도 아무것도 없던데?
그 외에도 수많은 랭커들이 발을 돌리거나.
[유럽 랭커, 러시아에서 또 의문사?]
[하이 랭커 사망으로 인한 랭킹 변동. 러시아 마피아 집단과 싸운 거로 추측?]
아니면, 죽어 나갔다.
왜냐?
고담은 그만큼 은밀했으니까.
또한 강했으니까.
세계 랭킹 69위인 충왕이 러시아에서 가장 높은 랭커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세계 랭킹 15위의 국가인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만큼 랭커 숫자가 촘촘히 많거든.
“후.”
자하르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세상에 우릴 구원해 줄 자가 있을까?
사실, 「이담」이라는 단체가 있다.
다를 이(異)에 고담 할 때 담.
해서 이담.
블라디미르 로디긴이라는 몽상가가 랭커 몇을 모아 만든 조직.
유일하게 고담에게 대항하는 비밀 전투 조직이라 들었는데.
‘걔네도 결국 다 죽었다는 소문이 도는 걸 보면…….’
자하르는 그저 침묵했다.
우리 쪽에 세계 랭킹 78위가 와 있지만.
그뿐이다.
고담은 막을 수 없는 재해 같은 것.
그저 숨죽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지금처럼 살아가면 되는 거다.
“자하르 님! 자하르 님!”
그가 상념하고 있을 때, 부하가 들어왔다.
“왜.”
“랭커님이 나가셨습니다.”
“그래? 결국, 그 던전. 가시려는 건가?”
고담의 흔적이 있는 던전.
러시아에 있지만, 정작 러시아 사람들은 잘 모르는 던전.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블랙홀 같은 곳.
‘또한.’
이상하게 해외엔 소문이 잘 나지 않는 곳.
“근데, 그…… 랭커분이 쓰라고 물자를 주고 가셨습니다.”
“물자?”
자하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예, 식수랑 핫팩이랑 라면 박스, 버너, 가스 같은 것들요. 숙박비 미리 내는 거라는데요?”
“아……?”
그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예상치도 못한 따스한 도움에 무언가 울컥해지는 감정.
동생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더니, 선의까지 베풀어주신다고?
한국의 랭커들은 다 이렇게 착한 걸까?
“…….”
자하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하늘에 기도했다.
랭커님의 무사 귀환을.
* * *
던전 입구 근처.
길가에 시민 하나 보이지 않는 적막한 광장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요.”
기소율이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네, 많이 이상하죠.”
내가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지방이래도 이렇게 큰 도시에 사람 하나가 보이지 않는데. 거기다가 이런 말도 안 되는 던전까지 있는데, 소문 하나 나지 않았으니 말이죠.”
“위험한 거 아닐까요?”
“소율 씨.”
“……예?”
본인이 이름 부르라 했으면서.
막상 부르니까 어색한지, 동공이 살짝 커진다.
‘음.’
기소율.
MBTI 앞글자가 I인 거 아냐?
저번부터 왜 이리 반응이 재밌지?
어쨌든.
“제가 어디 위험한 던전 피하는 거 봤어요?”
“……아뇨.”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내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소율 씨도 원래 위험한 던전 다니는 거 좋아하지 않았어요?”
예전에도.
등급 불명 던전의 선발대 역할을 맡았었지.
내 물음에 기소율이 고개를 저었다.
“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 물론, 어렵다고 도망치는 성격은 못 되지만.”
“그게 그거죠, 뭐.”
“그래도 위험해 보이는 건 살짝 찔러는 보고 가는 편이에요. 무모한 것도 도망치는 것만큼이나 싫어해서요.”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간다는 건가?
하긴, 예전에도 그랬지.
‘길잡이 강선욱이었나?’
그자를 시켜 정찰도 했었다.
위기 상황에 대비해 짐꾼이었던 나를 시켜 비상 물자도 챙겼었고.
벌써 추억이 되어버린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하지만.
“전 원래 그냥 갑니다.”
“예?”
“위기는 언제나 절 성장시켜 주거든요.”
“그게 무슨.”
“가끔은 오히려 제 예상보다 더 위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만큼 더 강해질 수 있는 발판이 될 테니.”
랭킹 1위가 목표라면?
쉬운 던전에만 안주하면 안 된다.
적어도 델라일라의 시련 같은 거 수십 개는 더 깨줘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 창왕 늙은이한테 창 맛도 보여줘야 하고.’
분명 그때.
세계 랭킹 10위, 창왕(槍王)이 나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나는 상대가 누구든 피하지 않는다.
심판창에겐 미안하지만.
조만간 갚아주러 갈 생각이다.
물론, 더 세져서.
“후, 정말. 못 말리겠네요, 동훈 씨는. 뭐, 저야 직원인데. 사장님이 가자고 하면 따라가야겠죠.”
슥슥!
기소율이 신발 끈을 동여매며 채비했다.
근육을 펴고 관절을 풀며, 준비 운동을 시작했다.
나를 완전한 리더로 인정하겠다는 태도였다.
이제 던전에 갈 차례.
그러나.
“음?”
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사람 하나 없는 한적한 곳인데.
뒤에서 기척이 느껴진 것이다.
그것도 셋이나.
“음?”
기소율도 알아차린 듯, 굽혔던 허리를 곧게 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이, 잠깐!”
익숙한 한국 발음이 들려왔다.
참고로 세상이 요지경이 된 후, 모든 세계인의 어투가 자동 해석되어 들린다.
아마 세계인뿐만 아니라 외계인도 마찬가지일 거다.
섀도우 셰퍼드나 태양이, 용족, 엘프, 드워프 등등. 그리고 어르신도 마찬가지니까.
‘그래서.’
한국 발음이 더욱 반가웠다.
“스켈레톤 킹, 암제! 아직 입장하지 말고 잠깐 대기해라!”
“……?”
나와 기소율이 고개를 갸웃하며, 몸을 뒤로 돌리자.
근육질 남성 하나와 여성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이명 쇠주먹.
근육으로 뒤덮인 랭커의 이름은 봉재영.
세계 랭킹 101위의 남자가 눈앞의 사내를 바라봤다.
‘이자가 요즘 그렇게 핫한 스켈레톤 킹이로군?’
그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요즘 인터넷에서 무슨 말만 나오면 [갓동훈]이니 [갓켈레톤]이니.
웃기지도 않은 찬양들.
사실, 그는 인정하기 싫었다.
‘무슨 한 번에 78위야. 그게 말이 돼?’
1,000위 밖에서 한 번에 하이 랭커가 된 사례?
13년 역사를 찾아봐도 처음 보는 일이다.
즉, 상식을 벗어난 일.
‘실수겠지.’
슈퍼컴퓨터에도 오류가 있고.
신이 만든 생물체에도 돌연변이가 있다는데.
시스템이라고 다를까?
‘게다가 뭐? 스켈레톤 킹?’
그가 아는 네크로맨서의 꽃은 데스 나이트나 리치다.
절대 스켈레톤 따위가 아니었다.
‘분명 저 녀석, 경험도 실력도 분명 나보다 한참 아래일 거야.’
그래서 그가 러시아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바로 협회장을 찾아갔었다.
궁금한 건 직접 보아야 성미가 풀리는 그의 성격 때문이었다.
- 협회장님. 저번에 부탁하셨던 거 있죠?
- 거기 러시아 지원 가달라고 하셨던 거. 그거 제가 갈게요.
- 대신 그 스켈레톤 킹 말이에요? 잘하고 있나, 감시역으로 가겠습니다.
- 예? 아니, 협회장님. 생각해 보세요.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랭킹 밖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제대로 된 던전 경험이 있겠어요? 괜히 믿고 맡겼다가 소중한 국력을 잃을 수도 있는 거예요. 예예, 제가 가서 좀 알려 주겠습니다.
- 지원은…… 음, 그냥 협회 소속 랭커 둘만 붙여주세요. 아시죠? 칙칙한 사내놈들 말고 좀 상큼한 애들로다가.
저급한 말투.
게다가 거의 통보식으로 말한 채 비행기를 띄운 봉재영은.
도착하자마자 던전으로 달려왔다.
“반갑다. 난 101위, 봉재영이다. 암제도 오랜만이군?”
“……예.”
기소율이 무표정으로 대충 대꾸했다.
봉재영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저년도 마찬가지야. 아주, 최근에 조금 폼 올랐다고 잘났지, 잘났어.’
마치 시베리아의 바람처럼 쌀쌀한 기소율의 태도에.
그는 살짝 빈정이 상했다.
하지만 익숙했다.
옛날에도 암제는 항상 본인에게 이렇게 차가웠으니까.
“아, 예, 반갑네요. 저는 주동훈이라 하는데……. 무슨 일로 오셨나요?”
스켈레톤 킹이 인사를 받으며 물은 것은 그때였다.
봉재영이 그를 넌지시 쳐다봤다.
‘별론데?’
78위 치고는 그 기세가 약했다.
온전히 잘 느껴지지 않았다.
‘완전한 근거리 전투직이 아니라 그런가?’
네크로맨서이니까.
‘역시 시스템 오류 맞다니까.’
봉재영 역시 랭킹 101위다.
그 기세만 보고도 어느 정도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눈이 있었다.
‘암살자 같은 경우라면 기세를 조금 감출 수야 있겠지만.’
주동훈은 네크로맨서다.
암술 쓰는 네크로맨서?
헌터 인생에 들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이 정도면 내가 먹을 수 있겠어.’
씩 웃은 봉재영이 입을 열었다.
“협회의 지시다. 이곳 던전은 우리가 함께 들어갈 거야. 그것도 감시자 역할로. 자, 너희들도 인사해.”
그가 뒤에 따라온 협회 소속 랭커 둘에게 눈짓했다.
“아, 예. 안녕하십니까. 협회 소속 권소예라 합니다.”
세계 랭킹 909위, 드루이드(The Druid) 권소예.
“저는…… 어, 임수진입니다. 요즘 핫하신 분을 뵈어서 영광이네요.”
세계 랭킹 930위, 아수라(Asura) 임수진.
둘 다.
20대의 여성 랭커였지만.
서울 소속은 아니라 서울 오성(五星)에 들진 못했다.
“아, 그러시군요.”
인사를 들은 스켈레톤 킹이 고개를 꾸벅였다.
“그나저나 협회 측에서 명한 감시라 했나요?”
“그래, 정확히 감시 역할이다.”
봉재영이 두 눈을 부릅뜨며 말하자.
“으음, 뭐.”
사내가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용인 던전 들어가는 거야 저와 상관없는 일이니……. 알겠습니다. 같이 들어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