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켈레톤을 키운다 259화
나들이
“음…… 그러니까.”
땅 구매 차 어딘가 다녀온 김진아가 턱을 집었다.
그러고는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쉬고 싶은데, 어떻게 쉬는지 모르겠다고요?”
“예, 맞아요. 제가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어서리.”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확인해 주자 김진아의 표정은 한층 더 해괴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은 휴식을 통해 살아간다.
일이 바쁜 그녀도, 힘들 때면 밤하늘의 별을 보며 맥주캔을 따고.
별천지에 나와서 일하는 직원들도 연차라는 게 있다.
또한, 나라에서도 법정 공휴일이라는 것을 지정해 국민들이 조금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뭐, 인정은 해.’
나는 김진아의 저 표정을 이해했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모르겠다는 걸 어떡해?
본래 세상엔 다양한 사람이 있는 법.
나와 똑같은 환경에서 살아오지 않은 자는 절대 이해할 수 없다.
“으음, 길마님이 쉬고 싶으시다면야…….”
회의실, 소파에 걸터앉은 김진아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제가 진짜 진짜 일이 많이 바쁘거든요? 근데 연차 써서 길마님이랑 술 한잔 정도는 기울여 줄 수 있어요.”
“……예?”
쉬고 싶다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스스슷!
그 순간, 허공에 누군가가 등장한 것은 그때였다.
“저도 참여 가능합니다, 동훈 씨.”
아무런 향도 나지 않던 공간에 피오니 향이 가득 찼다.
암제 기소율 특유의 체향.
‘많이 늘었네.’
내가 속으로 감탄했다.
주변에 은신하고 있는 것은 느꼈다만, 향까지 컨트롤하고 있음은 몰랐기 때문.
물론.
김진아는 은신하고 있는 줄은 몰랐나 보다.
“으아앗! 깜짝이야……!”
저렇게 화들짝 놀라는 걸 보면.
“그, 근처에 있었어요?”
김진아가 얼굴까지 붉어진 채로, 말을 더듬었다.
“아니, 암제님……! 밖에 외출할 때만 호위해 달라고 했잖아요! 여긴 무릉도원인데!”
“아, 최근에 은신 숙련도를 쌓을 일이 있어서…….”
“그래요? 후우…….”
김진아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때.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뭐, 어쨌든. 술 마시는 것도 괜찮은데……. 다른 것도 좀 추천해 주세요. 좀 오래 쉬어야 할 것 같은데 매번 술만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다른 거라……. 으음.”
김진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글쎄요, 저도 술 마시는 것 말고 다른 건 해본 적이 없는데요.”
“……예?”
뭐야, 이 사람.
나랑 비슷한 과였어?
“뭐, 공부하거나. 자료 조사한 거 정리하거나…… 그것 외에 남은 시간엔 맥주죠, 뭐. 최근엔 바빠서 그럴 시간도 없었지만.”
“헐.”
“차라리 저보단 암제님한테 물어보세요. 그게 빠를걸요?”
“…….”
나와 김진아가 기소율을 돌아다 봤다.
그러자.
기소율이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저요……?”
“예, 님이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단검을 들어 보였다.
“저는 훈련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하는데요……?”
허어.
이거…….
총체적 난국이었다.
* * *
김진아와 기소율을 벗어나 도착한 곳은 드루이드와 아수라가 있는 곳이었다.
드루이드(The Druid) 권소예는 이번에 랭킹 856위까지 올라섰고.
아수라(Asura) 임수진은 랭킹 901위를 찍었다.
아, 참고로.
한때 하이 랭커였던 쇠주먹의 랭킹은 550위란다.
저번 사건 이후.
탐욕과 쾌락을 완전히 벗어던진 그는 과거의 영광을 찾기 위해 거의 폐관 수련만 한다고 했다.
“음, 쉬는 거란 말이죠.”
권소예가 빙긋 웃었다.
“많죠, 길마님. 테니스나 골프도 있고, 아, 지금은 겨울이니 스키를 타도 되겠네요. 아니면 낚시를 해도 되고요. 아니면, 핫한 곳에 놀러 가서 사진 찍으셔도 되고 길마님 같은 경우는 해외여행도 쉽게쉽게 갈 수 있지 않나요? 으음……. 또, 연극이나 영화 같은 문화생활을 즐겨도 되겠네요. 아니면, 게임? 요즘 VR도 엄청나게 잘 나오잖아요? 취미 생활을 한번 찾아보세요.”
투다다다……!
물어보기 무섭게 쏟아내는 정보의 바다에 나는 정신이 없었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것들이 있었단 말이야?
“아 참, 이번에 개봉한 <분신>이랑 <부엉이>가 재밌다던데, 우선 그걸 먼저 보는 게 어때요? 제가 예약이라도 해드릴까요?”
“……그러실래요?”
내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
그게 뭔데.
그런 것 따위.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래.
이 기회에 다 경험해 보자.
지혜란 많은 것을 경험해 봤을 때 더 깊어진다고들 하니까.
* * *
의왕시, 백운호수.
그 뒤편에 있는 미개발 지역.
수걱!
드미르가 삽을 흙에 찍자.
“이곳인가?”
“예, 딱 여기서 저~어기까지요.”
김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부지의 넓이를 확인시켜 줬다.
“우리 별천지를 상징할 수 있는 무언가를 표현했으면 좋겠어요.”
“흠, 별천지를 상징하는 것이라, 재미있겠군.”
드미르가 씩 웃었다.
무언가를 만들고, 어떠한 것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바위 일족이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다.
“여기 중앙에서 호수 뷰를 아우르는 지역에 포탈 설치하는 곳을 만드는 게 목표란 거지?”
“예, 거기다가 오직 드미르 공방만을 위한 판매점과 전시장, 그리고 경매장도 설치하고 싶어요.”
“그거 좋은 생각이로군.”
따악!
드미르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스슷! 스스슷! 하며, 그의 수하들 열이 등장했다.
땅딸보 드워프들이었지만, 그들 모두가 로드급 스켈레톤이다.
“다들 준비됐나! 아직 무릉도원의 도시가 완성된 건 아니지만 재미있겠어.”
“여기도 동시에 진행하는 건가요, 드미르?”
스슷!
그런 그의 곁으로, 귀가 길쭉한 스켈레톤이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한때 숲 일족의 여왕이었던 월광(月光) 엘드린이었다.
이제 폴리모프가 익숙한지, 금발을 찰랑거리는 그녀의 미모는 빛이 났다.
울긋불긋한 근육의 드미르가 씩 웃었다.
“맞네. 사실상 압구정에 있던 공방이 부서진 터라. 매장을 다시 짓는 게 시급하다고 하거든.”
“그렇군요.”
엘드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드미르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여긴 나무가 많지. 이곳도 우리 무릉도원의 도시처럼 숲과 조화를 이룰 생각이야.”
“그렇다면 제가 도움이 될 수 있겠군요.”
“그렇지, 제물을 준비해서 주문의식도 걸어야 하고. 이번엔 보안도 특별히 신경 쓰라 했으니까.”
이번에 새 부지를 구한 이유가 결국은 보안 때문이다.
주동훈이 없더라도, 외부 침략에 견딜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경계를 만드는 게 목표.
“제물만 가치 있다면 문제없어요.”
“S급 아이템들을 사용할 생각이야.”
“오호, 몇 개나요?”
“다섯 개에서 열 개?”
드미르는 이제 자체적으로 S급 무기나 장신구, 방어구 등을 생산할 수 있다.
기력과 시간이 녹는 일이지만, 주문을 걸 수 있다면 뭔들 못 하랴.
“그 정도면 충분하겠네요.”
엘드린이 싱긋 웃었다.
“한번 열심히 준비해 보죠.”
“크하하, 좋아!”
드미르가 시원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수하들을 바라봤다.
“애들아, 준비됐냐고 물었잖아!”
“예, 드미르 님!”
“광물 현황은 어떻고?!”
“이번에 엠페러께서 오신 이후로, 다시 넘쳐납니다!”
주동훈이 머무는 땅에는 항상 광물이 넘실거린다.
“그렇다면, 됐다! 이제 망치를 들어라!”
별천지를 상징하는 것은 바로 주인!
드미르의 머릿속에 어떠한 영감이 떠올랐다.
오직 주인을 표현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 * *
삼성동 어느 영화관.
내 부탁을 들은 권소예는 총 여섯 장의 영화 티켓을 예매해 줬다.
문화생활을 하는데, 나 혼자 갈 수 있겠는가?
나는 스켈레톤들을 이끄는 자.
각 세계의 절대자들에게도 지구의 문화를 접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저 애 피부 좀 봐. 엄청 하얘. 생긴 건 이국적이면서 왜 이리 예뻐? 무슨 연예인이야?”
“옆에 있는 여자도 장난 아닌데? 무언가…… 엄청 성스럽게 생겼달까? 왜 있잖아. 중세의 고귀한 성녀가 있었다면 저런 느낌일 것 같은.”
“크, 남자들도 장난 아닌데. 다들 근육이랑 덩치가 무슨 헌터들인가? 생긴 것만 봐서는 무슨 S급이나 랭커일 수도 있겠는데?”
“……하이 랭커는 아닐걸? 다 우리가 모르는 얼굴이잖아.”
“미친놈아, 하이 랭커면 이미 여기 난리 났지.”
그 결과가 이 모양이었다.
나 혼자 가면을 쓰고 왔음에도.
숙덕거리는 걸 막을 순 없었다.
우리 절대자들의 폴리모프 모습들이 다 한 외모들 했기 때문.
“가자, 애들아…….”
가면을 푹 쓴 내가 중얼거렸다.
나, 태양, 아린, 카덴, 다나, 무각은 서로 두리번거리며 길을 헤맸다.
엘드린과 드미르에게도 권유하긴 했는데.
그들은 해야 할 일이 많다나?
무언가를 만들고 짓는 게 본인에겐 휴식이라 해서, 그러라고 했다.
나도 훈련에 집중하고 있을 때, 누군가 쉬라고 하면 좋진 않으니까.
“후.”
벌써 세 번이나 길을 잘못 든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뭔.’
해봤어야 알지.
예매한 티켓을 찾는 것부터, 영화관에 입장하는 것까지.
모두 아날로그가 아니라 디지털이라 적응하기 힘들었다.
“교수님! 저기로 가야 하나 봐요! 사람들이 저기에 무언갈 누르고 있어요!”
적응력 빠른 아린이 아니었다면 굉장히 힘들었을 거다.
“하하, 역시 아린이구나. 똑똑해.”
그녀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은 후, 우리는 그렇게 영화를 관람했다.
내용은 나쁘지 않았다.
<분신>은 이계의 대자연을 감상할 수 있는 영화였는데, 태양이가 보는 내내 감탄하느라 애먹었다.
영화관에서 떠들지 않는 게, 기본 에티켓인 것 정도는 첫 안내 시 설명으로 나오니까.
그래도.
몇 번 그러길래, 바로 10분간 소환 해제 시켜버렸더니.
그 이후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잘만 봤다.
<부엉이>는 스토리가 미쳤다.
반전에 반전을 더하고 또, 그 위에 반전이 있는 내용에 우리 모두가 몰입해서 잘 봤다.
‘아아.’
이런 게 쉬는 거구나.
문화생활이란 이런 거구나를 느끼며, 나는 주변을 거닐었다.
“교수님! 이건 뭐예요? 우와, 예쁘다!”
소녀 시절을 제대로 보내지도 못하고 죽었던 절대자, 우리 아린이와 쇼핑도 즐겼고.
“주인, 이게 뭔가? 사람들이 저 물체를 세게 치면서, 서로 자기가 강하다 우기는데…… 다 약자들이다.”
무각과의 펀칭 머신은 굳이 하지 않았다.
물어주는 걸 떠나서, 괜히 부서지면 머신 사장님께 민폐잖아……?
그렇게 수하들과 한껏 데이트를 즐기고 있을 찰나.
시끌시끌.
어디선가 굉장히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음?”
태청심법이 신호를 보내왔다.
또한 직감이 경고했다.
적의(敵意)를 지닌 누군가가 다가왔다고 알려주는 것이었다.
동시에.
“차, 창왕이다!”
“창왕? 세계 랭킹 10위? 아, 아니! 이젠 11위지?”
“창왕이 대한민국엔 웬일로?”
“창을 들고 있어! 피, 피해!”
아.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알았다.
자신에게 적의를 보내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진자의.’
과거, 델라일라의 시련을 끝내고 나왔을 때.
나와 시비가 붙었던 중국 노인.
심판창의 스승.
‘뭐, 이화창이 태양창보다 더 높은 수준이라고 했었나?’
뭉쳐서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홍해처럼 갈라졌다.
강렬한 창왕의 기세에 길을 내어주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창왕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바로.
‘나.’
그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