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켈레톤을 키운다 265화
드엘 공방 (1)
창왕을 죽인 후, 시간이 꽤나 흘렀다.
그동안의 휴식이 가짜였다면, 지금은 진정한 휴식이라 불러도 될 정도.
내가 하는 일은 단순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산에 올라 남은 기운을 파괴룡의 알에 털어 넣는다.
그럼 진짜 기운이 쭉 빠진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잠만 자고 싶을 정도로 몸이 노곤해진다.
그럼 그대로 임시 건물에 있는 탕에 몸을 담근다.
콸콸콸!
뜨끈하게 쏟아지는 물속에서, 지어지고 있는 웅장한 대도시의 풍광을 눈에 담으면.
“크으, 그래, 이놈아! 그런 게 바로 휴식이지!”
노인이 신나서 고개를 끄덕인다.
몸을 따듯하게 데우며, 휘적였으면 이젠 뭐 해야 하겠는가?
답은 하나다.
시원하게 만들어야지.
그리고 그 방법으로 추천하는 건 바로.
딸깍! 취이익!
냉동실에 30분간 넣어 놓은 시원한 캔맥주다.
만지기만 해도 차가운 맥주를 그대로 입에 대고 목에 넘기면?
꼴깍꼴깍!
“캬아.”
노곤한 몸에 활력이 돋는 느낌이다.
“좋네.”
사실, 이렇게 쉬는 게 거의 처음이었다.
모두가 나에게 휴식이 필요하다 해서, 휴식했다.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노는 것.
다른 말로 집콕.
무릉도원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영화?
이젠 괜히 사건·사고에 휘말릴까 보지도 않았고.
휴양지?
이 세상에 무릉도원만큼 아름다운 휴양지가 있을까?
나는 랭커가 된 기념으로 온전히 그 결과물을 즐겼다.
요컨대 이런 느낌이다.
랭킹 1위라는 높고 준험한 산이 있다.
그곳을 한 번에 완주하려다간 죽을 수도 있다.
근육이 찢어지거나, 폐가 부서지거나.
때문에.
그곳을 오르기 위해서는 중간중간 쉬어줘야 한다.
뜨거워진 발을 식혀야 하고, 뭉친 근육을 풀어줘야 한다.
또한, 에너지도 보충해야겠지.
물론, 마음이 편안한 것만은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이 많았으니까.
SS급에 대한 비밀도 풀어야 하고.
절대자들도 훈련시켜야 한다.
또한, 아직 나는 만술(萬術)의 초입부다.
마법, 창술, 검술, 무투술, 단검술, 궁술, 방패술 등등등…….
아직 배워야 할 것 천지고, 훈련해야 할 것투성이였다.
“시끄럽고, 일단 쉬어라! 네놈이 쉬지 않는다면 더는 가르칠 것도 없을 것이니라! 스승의 조언을 무시하는 제자에게 무엇을 교육할까!”
노인이 아니었다면, 아마 진즉 무기를 들었을지도 몰랐다.
지금도 수하들과 함께 토의하고 부딪히며, 실력을 갈고닦았겠지.
그렇게 3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많은 것이 바뀌었다.
커뮤니티에서의 내 평판은 점점 더 살을 붙여 전설화되어 갔고.
그에 따라 집단의 인기도 엄청나게 많아졌다.
“길마님!”
휴식 후, 91일 차가 되던 날.
욕탕에 김진아가 찾아왔다.
오늘은 주말이라 그런지, 정장이 아닌 볼캡에 가벼운 츄리닝 차림이다.
“저번에 모집글 올린 이후로, 지금까지 지원한 랭커 명단이에요. 한번 보실래요? 그냥 대박이에요, 대박!”
그녀가 그 어느 때보다도 즐겁다는 듯 해맑게 웃었다.
김진아는 이런 반전 매력이 있어서 좋다.
정장 딱 갖추고 화장한 후, 커리어 우먼으로 나설 때는 한없이 걸크러시 하면서도.
이렇게 편한 사복 차림일 때는 꼭 시골 소녀 같은 편안함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알까?
김진아의 이런 모습을?
“음, 그래요?”
촤르륵!
물에서 나온 손을.
우우웅!
건조 마법으로 간단하게 말린 내가 그녀가 내미는 서류를 받아들였다.
그곳에는 랭커만 추려놓은 지원자 명단이 보였다.
[지원자 명단]
1. 랭킹 80위, 용기사(Dragon knight) 맷 제랄드
2. 랭킹 107위, 약존(藥尊) 지도익
3. 랭킹 110위, 신응괴파(神鷹怪婆) 산산
4. 랭킹 245위, 백마도사(White Magician) 도하랑
5. 랭킹 460위, 흙의 마녀(Earth Witch) 에밀리 스트립
6. 랭킹 601위, 투호(鬪虎) 아드리언 프랭클
7. 랭킹 720위, 쌍도(雙刀) 로렌
8. 랭킹 738위, 봄사도(春使徒) 묘이 하나
9. 랭킹 830위, 검투사(Gladiator) 크리스티안 길리엄
10. 랭킹 850위, 영비(影秘) 니노마에 노아
11. 랭킹 930위, 프라하의 시인(Poet of Praha) 아녜스
“와, 많네요?”
내가 눈을 크게 떴다.
대박이라 하길래 어느 정도 기대했던 건 사실이지만.
이 정도로 많을 줄은 몰랐다.
흔히들 말한다.
랭커 하나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라고.
특히 해외 랭커들은 웬만하면 국가나 국민으로부터 자국 집단에 가입하라는 압력을 받기에, 밖으로 나오는 게 흔치 않다.
‘게다가.’
지금은 내가 수준이 높아졌기에 망정이지.
예전에는 900위대 랭커만 봐도 눈을 못 마주쳤다.
사실 랭커는 개뿔, 황금빛 S급 명패만 봐도 끔뻑 죽었지.
그저 랭킹에 드는 것만이 내 꿈인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 랭커가 무려 11명이 지원했다는데.
어찌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있을까.
“대다수 신흥 랭커들이에요. 흐흐흐.”
김진아가 행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례적인 일이죠. 보통 신흥 랭커들 중 일부는 기존 집단 버리고 빅3로 가거든요? 그런데도 여기에 지원했다는 건, 그만큼 우리 길드의 가능성을 크게 보고 있다는 거예요. 빅3 쪽에 가서 뱀의 꼬리로 남느니, 발전 가능성 있는 우리 쪽으로 와서 초창기 멤버가 되겠다는 의지인 거죠.”
“아무리 그래도 하이 랭커까지…….”
가장 위에 있는 명단.
랭킹 80위, 용기사(Dragon knight) 맷 제랄드는 나도 잘 알았다.
용을 타고 다닌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건 용이 아니라 드레이크긴 하다.
“헤헤헤, 하이 랭커가 넘볼 만큼 큰 길드가 되어가는 거겠죠!”
“익숙한 이름도 보이는데요?”
눈을 내리자, ‘묘이 하나’라는 이름이 보였다.
쟤는 내 동기인데?
“예, 이번에 지원하겠다고 연락받았었어요. 랭킹 850위 영비 보이시죠? 니노마에 노아 씨. 친구인가 봐요. 같이 데리고 온대요.”
“허어.”
델라일라의 시련 때, 침착하고 정확하게 힐링을 넣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묘이 하나라면 언제든 환영이지.
“아, 그리고 마법사가 많이 보이죠?”
“그러네요.”
백마도사 도하랑이랑.
흙의 마녀 에밀리 스트립.
“도하랑은 한국인 마법사예요. 둘 다 어떻게 소문이 퍼졌는지 몰라도, 마탑보단 별천지에서 마법을 배우고 싶다 하더라고요?”
“허허, 그것참. 통찰력 좋은 사람인데요?”
소피아가 대단하긴 하지만.
우리 아린이도 대단하거든.
“그리고 마지막.”
따악!
김진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신응괴파(神鷹怪婆) 산산이 문제예요. 조사해 보니까 인신매매나 살해 등등 안 좋은 소문이 많아서 거르려고 하는데.”
“예, 조사해 보고 인성 문제 있는 사람은 바로 거르세요.”
“역시 그렇죠? 맞아요. 우리가 이제 스펙 좋다고 다 받아줄 급은 아니죠! 히히, 우리가 뭐가 아쉬워서.”
그녀가 폰을 꺼내 신나게 쓱쓱 긋는다.
랭커가 많아지는 게 그렇게 기쁜가 보다.
어쨌든.
그녀는 나에게 시시콜콜한 랭커들의 정보를 공유하며, 허락을 받았다.
다른 건 몰라도 랭커 가입 문제는 중요 사안이라나?
“아, 그리고.”
정리를 마친 김진아가 고개를 들었다.
“내일 커팅식인 거 알죠?”
“……커팅식이요?”
“저번에 말했잖아요! 의왕시에 우리 건물 완공해 놨다고!”
“아.”
요새 통 집돌이 모드라 잠깐 잊고 있었다.
김진아, 드미르, 엘드린이 간혹가다 만나면 말하긴 했다.
깜짝 놀랄 거라고.
서프라이즈니까 기대하라고.
“아마 기자들이랑 사람들 몰려들 건데, 그때만 잠깐 얼굴 비춰주세요. 아직 건물 어떻게 생겼는지 못 보셨죠?”
“요새 도통 밖에 안 다녀서.”
“하하, 길마님.”
“예?”
“기대하셔도 좋아요. 진짜 웅장하거든요.”
* * *
다음 날 이른 아침.
의왕시 백운호수 둘레길에.
수많은 사람들과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
파바밧! 파밧!
셔터 내리는 소리가 공간을 계속 때렸고.
웅성웅성.
별천지의 커팅식 소식을 들은 관중들이 행사가 진행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호수 주변을 꽉꽉 채울 정도로 많은 인원들.
이들이 이렇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단순했다.
약 일주일 전.
김진아는 기사를 통해 발표했다.
[별천지(別天地)가 폐쇄했던 구(舊) 드미르 공방이 신(新) 드엘 공방이라는 이름으로 개장합니다!]
[개장식이 지난 후! 일주일간 대거 프로모션이 있으니, 많은 이용 바라요!]
먼저, 새로운 공방, 「드엘」.
국가의 도움으로 의왕시 부지를 매수했다는 소식은 나갔지만.
그 이후에 어떻게 지어지고 있는지 등의 현황이 하나도 공개가 되지 않았다.
보안이다 뭐다 해서.
설계 자체가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백운호수 부지 일대가 정체 모를 안개로 뒤덮여 있었으니까.
“도대체 저 안개 속에는 뭐가 지어져 있을까?”
“기대된다. 빨리 공개하라고……! 지금 모인 사람이 몇인데!”
“이제 올 만큼 다 온 것 같다! 그만 안개를 걷어라!”
몇몇 인원들이 불평했지만.
여기서 절대적인 갑(甲)은 집단, 별천지.
그들이 공개하기 전까지, 관중들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근데 부지 매수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개장이야? 요즘 별천지 장사 안 된다고 너무 급하게 한 거 아냐?”
“그럴 수도 있지. 드미르 완제품 이번에 프리미엄 더 붙었다더라.”
“하긴, 없어서 못 구하는 게 드미르 제품이니까. 차라리 부실 건물이라도 빨리 파는 게 더 남는 장사겠어.”
“에이, 그래도 이제 세계적인 집단으로 발돋움했는데, 부실 건물을 지을까?”
“뭐, 보면 알겠지. 곧 시작이니까.”
누군가가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김진아가 공표한 개장 시간은 오전 09:00.
이제 딱 1분 남았다.
하지만, 1분이 남았음에도 별천지 측에서는 어떠한 발표도 없다.
그저 잔잔하게 안개만 피어 있을 뿐.
하지만 사람들은 이제 안다.
별천지의 실질적 수장, 김진아가 얼마나 치밀하고 약속을 중히 여기는 자인지.
그런 그녀에 대한 믿음 때문일까?
“…….”
“…….”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짜기라도 한 듯 조용해졌다.
“아니, 그래서 언제까지 기다려야…….”
“응? 뭐야? 분위기 왜 이래?”
“쉿, 쉿쉿!”
간헐적으로 숙덕거리던 것들도, 그 분위기를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백운호수 일대가 적막에 휩싸였고.
호수의 물결은 어느 때보다 더 규칙적이고 잔잔하게 철렁였다.
이윽고.
푸쉬쉬쉬…….
정확히 1분이 지났을 때.
백운호수 건너편을 자욱이 감추던 안개가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어, 어어!”
“나온다!”
“오오오오!”
“우와아아아…….”
그 장엄한 광경에 수백 개의 카메라가 일제히 작동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입을 벌리며 그 광경을 지켜봤다.
숨겨져 있던 것.
서서히 드러나는 건축물.
“어, 어어?”
“응?”
그것은 건물이 아니었다.
절대 그런 걸 건물이라 할 수 없었다.
“드, 드래곤?”
“웬 용이?”
“저, 저게 뭐야?”
백운호수 앞 시야를 가득 메우는 두 거대한 용의 조각상이 드러났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싸우는 듯한 모습의 두 용.
그 모습은 위엄하다 못해 웅장했다.
“저건…….”
두건 쓴 한 여성이, 천천히 두건을 벗으며 눈을 빛냈다.
별천지 지원 차, 한국에 들어온 여자는 바로.
세계 랭킹 738위, 봄사도(春使徒) 묘이 하나.
“히에에에? 저게 뭐야? 무슨 용이 저렇게 사실적으로 생겼어……?! 와, 나 방금 소름 돋았어. 스고이이이!”
그 옆에서 놀라 물어보는 여성은 그녀의 친구.
영비(影秘) 니노마에 노아였다.
세계 랭킹 850위의 신흥 랭커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암제(暗帝) 기소율을 뽑은 그녀 역시 이번에 별천지에 지원했다.
“아란발론이랑 거대마룡…….”
“응? 그게 뭐야?”
“나중에 설명해 줄게.”
꿀꺽.
묘이 하나가 침을 삼켰다.
살벌하게 바라보는 두 용의 모습이.
마치 당시 델라일라의 시련 현장에 있는 것 같은 사실감을 자아냈기 때문이었다.
두 용 조각상은 서로가 서로를 향해 발톱을 들이밀고 있었고.
그 두 발톱이 만나는 지점 위에는.
우우웅!
포탈이 존재했다.
별천지의 본진, 무릉도원으로 향할 수 있는 포탈.
그리고 주변에 지어진 아름다운 양식의 건축물들까지!
[띠링!]
[전설의 대장장이가 만든 위대한 작품, ‘드엘’을 감상합니다.]
[24시간 동안 최대 기력이 100 상승합니다.]
[24시간 동안 힘이 10 상승합니다.]
[24시간 동안 민첩이 10 상승합니다.]
[24시간 동안 체력이 10 상승합니다.]
[24시간 동안 마력이 10 상승합니다.]
[24시간 동안 기술이 10 상승합니다.]
드엘.
별천지의 새로운 공방이 세상에 선보여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