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켈레톤을 키운다 319화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 (2)
무릉도원, 부길마실.
아침 훈련을 마치고 막 샤워했는지, 젖어 있는 머리칼의 기소율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길마님. 요즘 출근이 빠르시네요?”
기소율의 말에, 김진아가 싱긋 웃었다.
“잠이 잘 오지 않아서요. 침대에 누워 있을 바에 업무라도 하나 더 보는 게 낫죠.”
별천지에서 기소율이 맡은 직책은 바로 부길마의 호위였다.
아무리 보안이 탄탄한 무릉도원이라지만, 김진아는 비랭커다.
수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뜻.
혹자는 랭커씩이나 되어서 겨우 일반인 하나 호위하냐고 하겠지만…….
사실, 기소율의 역할이 별천지에서는 가장 중직이며, 봉급도 세다.
멤버들 중 누구도 그 사실에 부정하는 자가 없다.
모두 인정하는 것이다.
천금 만금보다 귀한 게 김진아의 가치라는 것을.
“잠이 잘 안 온다니……. 혹시 길마님 때문에 그러신가요?”
어쨌든.
그런 이유로 김진아가 출근이 빨라지면, 기소율의 출근 역시 빨라진다.
특히 오늘같이 외근이 있는 날이면.
“네.”
나갈 채비를 갖춘 김진아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길마님의 수하들이 전부 남았잖아요. 그게 괜히 마음에 걸리네요. 적어도 아린 님 정도만 같이 가줬어도 마음이 한결 편했을 텐데.”
마음만 편하랴?
아예 발 쭉 벋고 잘 잤을 거다.
자기 전 맥주는 덤이고.
“아린은 인정이지요.”
“흐흐, 그렇죠?”
김진아가 씁쓸한 만큼, 기소율 역시 마냥 밝지는 못했다.
그녀라고 주동훈이 걱정 안 되는 건 아니었으니까.
다만.
“믿어야죠.”
기소율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제 부길마님도 아시잖아요? 동훈 씨는 지옥에 떨어뜨려도 살아 나올 사람이라는 걸.”
“그렇긴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동훈 씨가 어디론가 떠날 때마다 부길마님이 그렇게 힘들어하시면, 그분이 어디 마음 놓고 편히 떠나시겠어요?”
“으음, 그런 거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닐 텐데……?”
아마 지금도.
열심히 강해지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겠지.
“그런가요?”
기소율이 픽 웃었다.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
“그래도 저는 항상 놀라요. 복귀할 때마다 한층, 아니, 수십 층 더 강해져서 돌아오시는 동훈 씨를 볼 때면……. 와, 나도 나름 노력했다고 했는데, 아직 멀었구나 싶으니까요.”
“솔직히 사기긴 해요. 아니, 무슨. 벌써 세계 랭킹 4등이야.”
“이번에도 돌아오면 또 놀라겠죠?”
“그렇겠죠. 이번엔 뭐, 랭킹 2등이라도 잡수시려나?”
“그러니까 이번엔 우리가 역으로 돌려주는 거 어때요?”
“역으로요?”
김진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엄청나게 성장한 별천지를 보고 복귀한 동훈 씨가 오히려 입을 벌리게 만드는 거죠.”
“아하?”
그때였다.
부길마실 밖으로.
“흐아아아압!”
“하아아압!”
“아좌자자자잣!”
아침부터 훈련하는 별천지 멤버들의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각성한 스켈레톤들과 랭커들이 서로의 스킬과 지식을 공유하며 발전하고 있는 광경.
또 여정을 떠났다는 길마의 소식을 들은 멤버들은 다른 거 다 제쳐놓고 훈련에만 집중하는 중이었다.
‘그래.’
김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길마님 걱정할 때가 아니지.’
길마님은 저 멀리 어딘가에서도 아직 발전 중일 게 분명했다.
우리가 따라잡기조차 힘들 속도로 앞으로 치고 나가고 있을 터.
‘더는 거리를 내주면 안 돼.’
지금 노력하는 저 멤버들처럼.
길마님을 보필하려면, 그만큼 우리도 성장해야 한다.
“좋은 지적이었어요, 암제님.”
김진아의 목소리에 다짐과 각오가 한껏 묻어났다.
* * *
“…….”
수아가 입을 떡 벌렸다.
“…….”
제아 역시 한숨을 내쉬었다.
정령왕, 실피드.
사실상 그녀들도 실피드의 모습을 직접 쳐다본 것은 처음이었다.
실레스틴을 통해서 이야기는 참 많이 들었지만.
- 계약자여. 정령계에서 ‘유이사’ 그 이름을 절대 꺼내면 안 된다. 그…… 뭐라 해야 할까. 발작 버튼이라 표현해야 할까? 평소엔 얌전하신 정령왕께서 그 단어만 들으면……. 그냥 아주 난리가 나신다. 매번 시비 걸던 땅의 최상급 정령, ‘노에아넨’들도 잠깐 몸을 사리고. 상급 정령 ‘노에스’나, 중급 정령 ‘노임’은 그냥 땅 깊은 곳에 고개를 파묻고 올라오지도 않지. 하물며…… 하급 정령인 ‘노움’들은…… 후우.
현재 땅의 정령과 바람의 정령은 전쟁 중이다.
하지만, 그게 정령왕끼리의 싸움이란 말은 아니다.
일단.
이 정령계에서 정령왕끼리 부딪치지 않는 것은 일종의 불문율이다.
그 거대한 존재들이 손속을 나누다 보면, 서로 얻을 게 없기 때문.
얻기는커녕, 아마 정령계 자체가 붕괴되지 않을까?
- 저번 발작 때는 땅의 정령왕 ‘노아스’뿐만 아니라, 불의 정령왕 ‘샐리온’, 물의 정령왕 ‘엘라임’까지 와서 말렸을 정도이니…… 말 다 했지.
‘그런 정령왕한테.’
뭐?
다시 한번, 유이사의 이름을 꺼낸다고?
그냥 다른 표현도 있었잖아!
‘그녀’라든가!
‘그분’이라든가!
근데 뭐?
‘유이사 스톰트리?’
이름에다가 성까지 붙여 말해?
‘개새끼. 썩을 새끼!’
결국, 제아의 속에서도 욕설이 튀어나왔다.
‘죽으려면 혼자 죽지! 왜 우리까지 끌어들이려고!’
제아는 숨을 죽인 채, 불안한 눈빛으로 정령왕 실피드를 바라봤다.
수아의 얼굴 역시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절벽 위에서 외줄 타기 할 때 이런 기분이 들까?
아니, 그것보단.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기분이 더 가깝겠다.
꿀꺽.
그녀가 마른침을 삼켰다.
두 성좌급 실레스틴 또한 몸을 움츠린 채, 콩 벌레처럼 굳어 있었다.
그 반응만 봐도 정령왕 실피드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저 정체불명의 남자는 태연하게 실피드를 바라보고 있다.
- 예, 정확히는 위대했던 정령사 유이사 스톰트리. 그녀의 한이 뭔지 알고 싶습니다.
그가 물었던 질문.
그 이후로 실피드는 아무런 말 없이, 남자를 빤히 응시하고만 있었다.
“…….”
숨이 턱 막히는 적막이 한참이나 지속되었다.
차라리 화를 내든, 기세를 뿜어내든 하면 자포자기라도 할 텐데.
이런 묘한 적막이 오히려 더 공포스럽고 불안했다.
그리고 그 순간.
“한?”
마침내, 실피드의 입술이 열렸다.
“지금 한이라고 했어?”
정령왕의 기세가 한층 달라졌다.
부드러운 질문임에도 모든 존재를 압도하는 무게.
제아가 결국 참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도저히 뜬 눈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지 못할 것만 같아서.
‘그냥 동생 말을 들었어야 했나?’
실레스틴들 말처럼.
정령왕이 오기 전에 화풀이할 대상을 찢어서 없애 버렸다면.
정령왕도 어쩔 수 없지 않았을까?
“예, 한이요. 정령왕께서는 뭔가 알고 있는 것 아니신가요?”
“…….”
그때였다.
질문한 주동훈을 향해 실피드가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그의 몸 구석구석을 지켜보는 정령왕.
킁킁!
심지어 몸의 냄새까지 맡는다.
“왜 이래요? 부담스럽게……. 개도 아니고.”
그 말에 제아가 감았던 눈을 번뜩 떴다.
뭐, 개?
저 위대한 정령왕께 ‘개’라는 표현을 쓴 거야, 지금?
“……저, 저 미친놈.’
말없이 지켜보던 수아마저도 참지 못하고 속삭였다.
자극해도 정도껏이지.
저 정도면 자살하고 싶어서 환장한 놈이 분명했다.
하지만, 실피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킁킁!
계속해서 냄새를 맡더니…… 이내 눈살을 험악하게 찌푸렸다.
“이 냄새는. 분명……?”
그 순간.
휘이이이잉!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바람 한 점 없던 세상에 공기가 스멀스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그 바람이 내포하고 있는 기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기존 실레스틴이 뿜어내던 바람은 애처럼 느껴질 만큼 어마어마했다.
쿠과가가가가가……!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이 세상을 짓눌러 버릴 듯한 힘이 정령왕 실피드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두 실레스틴들이 당황했다.
- 제길, 계약자여, 잠깐 자리를 피해야 할 것 같다! 너희 세계로 돌아가 있어라!
- 나는 다른 정령왕과 접선을 시도해 보겠다! 아무래도…… 정령왕께서 다시 한번 감정이 폭발하려 하시는 것 같다!
위기 상황.
제아와 수아가 중심을 못 잡고 버둥거렸다.
실레스틴들이 움직여 무언가 행동을 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다섯 실레스틴들이여.”
정령왕, 실피드의 입이 열렸기 때문이다.
“내 말을 들어라.”
최상급 정령들의 처지에서, 정령왕이 불렀는데 응하지 않고 넘어간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예……!
- 마, 말씀하십시오!
제아와 수아의 실레스틴이 어쩔 수 없이 대답했고.
스슷, 스스슷!
사방에서 세 마리의 실레스틴이 더 나타났다.
- 예!
- 부르셨사옵니까!
- 정령왕의 부름에 응합니다!
정령왕의 손짓 한 번에, 멀리 있던 실레스틴들이 소환된 것이다.
그들은 전부 불안한 표정으로 실피드를 바라봤다.
‘……안 돼!’
제아는 낙담했다.
상황만 봐도 무언가 벌어지려 하지 않는가.
여기서 정령왕이 폭주하면, 자신과 동생은 끝장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누군가가 나의 작은 소망을 들어준 모양이도다.”
정령왕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제아의 예상을 잔뜩 빗나갔다.
“실레스틴들은 모두 벌이던 전쟁을 멈추고 바람궁으로 집결하여 손님을 맞이하라!”
“……손님?”
제아가 눈을 부릅떴다.
저 정령 친화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자가 정령왕의 손님이라고?
게다가.
바람궁?
바람궁은 정령왕 실피드의 구역이다.
정령사라면 누구든 가고 싶어 하는 정령계의 성지이자 가장 신성하게 생각하는 곳.
그곳에 누군가를 부른다는 것은 정령왕이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곳에.’
모든 실레스틴을 집결시킨다고?
제아가 옆을 바라보니, 수아 역시 눈을 부릅뜬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껏 없었던 파격적인 행사 아니던가!
‘게다가.’
실레스틴이 갈 수 있다는 말은 계약자인 그녀들도 함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정령계에서 정령과 계약자는 동급으로 취급하기 때문.
그리고.
단언컨대 ‘바람궁’은 이곳 ‘바람 폭포’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정령 친화력을 쌓을 수 있을 터.
흥분한 실피드가 다시 중얼거렸다.
“유이사. 아아, 분명 그녀의 향을 가지고 있는 자다.”
뭐?
유이사의 향?
“아아아아……. 이것은 참으로 달콤하고도 아늑하며 포근하구나. 어쩐지…… ‘한’이라는 표현을 쓸 때부터 알아봤도다. 유이사의 죽음을 알고 있는 자 아니던가.“
에에?
……유이사의 죽음?
제아가 눈을 크게 떴다.
정령사, 유이사 스톰트리.
바람의 정령왕과 계약함과 동시에 불, 물, 땅의 최상급 정령과도 계약했었던.
전 우주 통틀어 유일무이했던 정령사.
그녀가 죽었다고?
처음 듣는 소식이었다.
정령계에 나타나지 않기에, 실종되었거나 다른 세계에서 활약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죽었다니.
“다시 한번 명한다! 현 시간부로 이자는 나의 귀한 손님일지니. 바람 구역 내에서 이 자를 건드는 것은 곧 나 실피드를 건드는 것과 같을 것이다!”
실피드의 마지막 명을 끝으로.
제아와 수아는 그저 서로를 바라봤다.
‘뭐지?’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언니?’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