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2화
키젠 신입생들의 첫째 날, 모든 수업이 끝났다.
퇴근 전, 휴게실에 모인 1학년 교수들은 차를 마시며 신입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메이린 빌렌느는 기대 이상이었어. 첫날부터 샤니프 독을 조제했다니까!"
"피가 대단하긴 해요, 그쵸? 자제들 일곱 명이 하나같이 우수하네요!"
"상아탑 정식 후계자는 어때요?"
"아, 세르네? 두말할 필요가 있나. 상아탑에서 그렇게 자신 있게 굴던 이유가 있었어."
"샤텔 마에르는 어떻고. 거인혼혈은 피지컬에 비해 마법파트가 부족하다는 편견이 있는데 이 녀석은 골고루 뛰어나."
"그렇다고 교수님, 우리 샤텔을 뺏어가면 곤란해요?"
"허허, 말하는 본새 봐. 벌써 자기 학생인 척 굴어?"
"학생보호기간에 사전 접촉은 룰 위반인 거 아시죠?"
교수들은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고 은근한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며 신입생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이봐, 바힐 교수."
눈을 감고 차를 음미하던 저주학 교수 바힐이 듣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네도 오늘 A반 수업 있었지? 어땠어?"
"뭘 말씀이십니까?"
"에헤이, 또 시치미 떼는 것 봐. 네프티스 님이 직접 뽑은 특례 1번 말이야."
바힐이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빙그레 웃었다.
"제 수업에서는 상대 학생에게 10:1로 패했습니다. 대단한 재능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네요."
"......흠, 의외네. 그래도 명색이 특례 1번인데 뭔가 특별한 거 없었어?"
집요한 질문이었지만 바힐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체력은 좋았습니다. 첫 수업에 이그저스트를 아홉 번까지 버티더군요."
"오, 아홉 번이나?"
"체력도 중요한 자질이긴 하지만, 특례 1번치곤 좀 애매하긴 한데."
달칵.
그때 교수 휴게실의 문이 열렸다. 여전히 부스스한 머리카락에, 슬리퍼를 질질 끌며 소환학 교수 아론이 걸어 들어왔다.
가볍게 교수들에게 묵례한 그는 다른 교수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별 관심 없다는 듯 옷걸이에 걸린 자신의 겉옷을 챙기러 갔다.
"그러고 보니."
바힐이 운을 띄웠다.
"아론 선배도 오늘 A반 수업이었죠."
모두의 시선이 아론에게로 향했다. 아론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겉옷을 챙겼다.
"그게 뭐."
"특례 1번. 선배가 보기엔 어땠습니까?"
어느새 휴게실의 모든 교수들이 눈을 빛내며 아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 털어놓으라는 무언의 압박.
아론은 조용히 한숨을 쉬더니,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둔감한 범재. 독창적인 불량품을 만드는 창의성은 있었다."
"......."
교수들이 웅성거리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바힐만은 홀로 입꼬리가 무섭게 올라가 있었다.
'저 선배가 지금, 연막을 친 거야?'
현장에서 자주 아론과 함께 뛰었던 바힐은 그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는 학생이라면 저렇게 둘러 말하지 않는다.
둔감한 범재.
불량품을 만드는 창의성.
어떻게 보면 아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찬사였다.
'......이거 점점 더 구미가 당기는데.'
네프티스가 선택했고, 그 까탈스러운 아론이 찍어놓은 소년.
바힐은 시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점점 더 강한 확신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참, 선배."
그렇다면 이미 전쟁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작년에 말씀하신 이야기, 더는 직속제자를 받을 생각이 없다는 선언. 쭉 유효하다고 봐도 될까요?"
"......."
밖으로 나가려던 아론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다른 교수들도 대화를 멈추고 아론 쪽을 보았다.
갑자기 휴게실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바, 바힐 교수님."
옆자리의 여교수가 조그만 목소리로 말렸지만, 바힐은 빙그레 웃는 얼굴로 대답을 기다렸다. 아론의 입이 열리려는 그때.
달칵!
"다들 안뇽 안뇽!"
난데없이 은발 머리카락의 소녀가 종종걸음으로 들이닥쳤다.
"네프티스 님!"
그녀의 등장에, 대륙을 쥐고 흔든다는 키젠의 교수진이 일제히 허리를 꺾으며 예의를 갖췄다.
"오셨습니까."
신사처럼 인사한 바힐이 제일 먼저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초콜릿 아이스크림이었다.
오로지 네프티스를 만날 때를 대비해, 항시 냉동 마법이 걸린 아공간에 아이스크림을 넣어 다니는 사람은 이 키젠에 바힐뿐이었다.
"아, 정말! 자꾸 꼬맹이 취급하지 말랬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바힐의 손에서 아이스크림을 홱 빼앗아 들었다.
"레이디의 간식을 준비하는 것도 신사의 미덕이니까요."
"흥, 말은 잘해."
네프티스가 아이스크림을 한 입 깨물었다. 곧 그녀의 뺨이 상기되며 또래 소녀 같은 흐물흐물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몇몇 교수들이 입술을 깨물었다. 저 위대한 죽음의 마녀를 향해 귀엽다는 불경한 감상을 품을 수는 없었다.
"여기 앉으세요. 네프티스 님."
한 교수가 얼른 자리를 마련했다. 네프티스가 조금 큰 의자의 팔걸이를 집고 낑낑대며 의자 위로 올라갔다.
"웃차! 첫날 신입생들은 어땠어?"
그녀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물었고, 교수들은 앞다투어 자신이 느낀 바를 보고했다.
세르네나 샤텔 같은 검증된 특례입학 학생들보다는, A반의 메이린이나 헥토르, B반의 카에즈 등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집중적으로 언급됐다.
네프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경청했다.
"응, 좋아 좋아! 무슨 문제 있으면 보고하고, 오늘은 첫날이니 일찍 들어가 쉬어."
"예!"
"네프티스 님."
그때였다. 줄곧 조용하던 아론이 입을 열었다.
"잠시 단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다른 교수들이 눈을 크게 떴다.
물론 키젠의 교수 정도 되는 위치라면 네프티스와의 면담도 허용되지만, 이렇게 당돌하게 단독 면담을 요구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응, 좋아."
네프티스가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내려왔다. 아론은 고개를 한번 숙인 후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여전히 직설적이시군.'
네프티스가 나가고, 다시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꼰 바힐이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하지만 네프티스 님이 순순히 알려주진 않을 겁니다. 선배.'
* * *
입학 첫날, 키젠에서의 모든 수업이 끝났다.
시몬과 딕, 그리고 A반 전체가 하수인의 안내에 따라 기숙사로 이동했다.
그런데 작은 문제가 생겼다.
마지막 세 시간짜리 소환학 수업을 끝까지 다 듣는 바람에 A반은 기숙사에 늦게 도착했고, 방 정원이 대부분 다 차버린 것이다.
기숙사 방의 정원은 3인 1실.
시몬과 딕은 같은 방을 쓰기로 했지만, 앞서 들어온 학생들이 두 자리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2층에도 두 자리가 비는 방은 없네요."
기숙사 관리원이 연신 고개를 숙였다. 본인 잘못이 아닌데도 땀을 뻘뻘 흘리며 사과하는 모습에 시몬은 손사래를 쳤다.
"관리원님이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연상인 사람이 깍듯하게 대하는 게 시몬은 조금 부담스러웠다.
물론 키젠 내에서는 하수인들보다 학생의 서열이 더 높았다. 게다가 학생들의 대부분이 저명한 귀족들이니 하수인들이 낮은 자세로 나오는 건 당연했다.
딕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팔짱을 꼈다.
"3층이랑 4층도 두 자리 남는 방은 없겠죠?"
"......네, 다른 층도 비슷한 상황일 거예요."
관리원이 2층의 리스트를 보여주었다. 간혹 방에 한 자리씩 띄엄띄엄 남아 있을 뿐이었고, 그것도 거리가 너무 멀었다.
시몬과 딕이 시선을 마주했다.
"어쩔래? 시몬."
"혹시 모르니까 다른 층도 가보고 결정하자."
두 사람이 의견을 주고받고 있는 그때.
"비켜!"
퍽!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관리원이 짐가방에 부딪혀 쓰러졌다. 수레를 끌고 있던 갈색 머리카락의 학생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 뭐 해? 비키라니까!"
"죄, 죄송합니다!"
쓰러진 그녀가 얼른 고개를 숙였고, 옆에 같이 가던 친구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갈색 머리의 학생이 짐가방을 만져보더니 인상을 구겼다.
"아, 진짜. 그쪽 때문에 여기 찌그러졌잖아요. 이거 어쩔 건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은 얼어 죽을. 당장 따라와요."
그녀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며 몸을 일으키는 그때.
"미안한데."
시몬이 앞으로 나왔다.
"지금 내가 이분이랑 이야기하고 있잖아."
"......뭐?"
관리원의 동공이 동그랗게 커졌다. 갈색 머리 학생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일부러 부딪힌 거 빤히 보였지."
딕이 피식 웃으며 시몬의 옆에 섰다.
"......이 새끼들 쳐 돌았나. 니들 X발 뭔데 나대냐?"
"야, 야, 잠깐만!"
옆의 친구가 다급히 그의 어깨를 짚었다. 그러곤 귓속말로 속삭이듯 말했다.
"쟤 걔잖아! 강당에서 학생대표로 선서했던 특례 1번!"
"......어?"
시몬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학생의 표정이 이내 흙빛으로 굳어졌다.
당황해서 동공이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흔들리던 그가 애꿎은 관리원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크, 크흠! 다음부턴 조심해요! 가자!"
도망치듯 자리를 뜨는 모습을 보며 딕이 배를 잡고 깔깔 웃어댔다. 시몬도 피식 웃음을 흘리며 쓰러진 관리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요?"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시몬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한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레나라고 해요! 혹시 윗층도 돌아보시는 거면 안내해 드릴게요. 제가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
"아, 그렇게 해주시겠어요?"
이렇게 세 사람은 함께 위층으로 올라왔다. 그녀가 발 빠르게 움직이며 다른 관리원들에게 정보를 얻었고, 바로 4층으로 향했다.
"4층에 두 자리가 빈 방이 딱 하나 남았대요!"
레나가 달리며 말했다. 그 뒤를 시몬과 딕이 바짝 붙어서 달리고 있었다.
"빈방이 있다고요?"
"네, 행운이네요! 409호실은 원래 4인실로 쓰던 곳이라 방도 크고 경치도 좋고, 중앙 계단도 가까운 명당이에요! 그런데 그쪽에 딱 두 자리가 빌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이내 세 사람이 409호 문 앞에 도착했다.
레나가 방에 붙어 있는 이름을 살폈고.
"아......."
그녀의 얼굴에 급격히 그늘이 졌다.
"왜 그래요?"
그녀는 뒤돌아서 두 사람을 바라보더니, 무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그냥 다른 곳으로 가죠. 412와 413호가 한 자리뿐이지만 붙어 있으니까......."
"이 방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시몬의 물음에 그녀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곤 문 앞에 붙어 있는 이름표를 가리켰다.
"......카쟌 에드발트. 작년에도 있던 학생이에요."
그 말에 딕의 눈이 커졌다.
"그럴 리가, 여긴 1학년 기숙사잖아요? 2학년들은 다음 달에나 들어올 텐데."
"카쟌 학생은 유급생이에요. 어떤 큰 문제를 일으키는 바람에 유급됐고, 이번에 다시 1학년부터 시작하는 거로 알고 있어요."
"흠."
딕이 받아들기엔 그것도 이상했다.
키젠은 학생들을 내보내는 데 망설임이 없는 곳이다.
보통은 문제를 일으키거나 성적 미달 판정을 받으면 과감하게 퇴학시키게 마련인데 유급이라니? 흔치 않은 경우였다.
다시 시몬이 물었다.
"유급 사유는요?"
"저도 일개 기숙사 직원일 뿐이라 자세한 사유는 몰라요. 하지만 여러 말썽을 일으키기로 관리원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해서...... 같은 방 학생들의 얼굴에 피멍이 들거나, 방을 바꿔달라고 호소하는 일도 많았어요."
이 방만 두 자리나 비어 있는 이유가 있었다. 슬쩍 겁을 먹은 딕이 시몬을 곁눈질로 살폈다.
"시몬. 우리 그냥 다른 방으로......."
"잠깐 인사만 드리고 올게요. 그 정도는 괜찮겠죠?"
시몬은 그렇게 말하며 방문을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딕이 기겁하며 그의 뒤를 따라왔다.
원래는 4인실이라고 했던 만큼 방은 꽤 널찍했다. 2인용 침대와 1인용 침대 둘, 그리고 개인 책상과 옷장도 하나씩 있었다.
창가에는 키젠의 건물들과 산, 계곡이 내려다보였다. 과연 레나가 명당이라고 칭할 만했다.
그리고 한쪽 벽면에 이미 짐을 다 풀어놓고 2층 침대의 위에 누워 있는 사람이 있었다. 하얀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잠깐만, 시몬!"
딕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너도 레나 씨 이야기 들었잖아! 분명 한 성깔 하는 사람일 거라고!"
시몬은 스읍 하고 숨을 들이마시고는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