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7화
"......."
시몬은 고민했다.
홍펭의 직속제자 권유가 진심이라는 건 알겠다. 그렇다면 내 마음은 어떤가.
마투학 전공.
틀림없이 홍펭의 수업은 재미있었다.
야외에서 진행되는 커리큘럼, 연달아 튀어나오는 위기, 그리고 밖에서 먹는 식사와 고강도 경쟁까지.
힘든 구간도 있었지만 전부 나 자신이 강해지기 위한 단련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면 견뎌낼 수 있었다.
하지만.
"분에 겨운 제안은 감사드립니다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사양하고 싶습니다."
시몬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그녀는 별로 놀라지 않은 듯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지금은 더 깊게 배우고 싶은 학문이 따로 있습니다."
"음-"
그녀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좋아요. 내가 괜한 미련을 가지지 않도록 속 시원히 말해줘서 고마워요."
"......아."
"하지만 내가 이대로 지몬을 포기할 거란 말은 아니에요."
"네?"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천천히 휘날렸다.
"아직 전공을 전하기 전까진 1년이나 남았잖아요? 제가 더 노력해서 지몬의 마음을 돌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어요."
시몬은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그리고, 내 개인적으로도 지몬이 어디까지 갈지 궁금해졌어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휘둘렀다. 칠흑의 텔레포트 마법진이 바닥에 펼쳐졌다.
"제자가 아니라도 괜찮아요.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찾아오제요."
"......감사합니다, 교수님."
"이번 일은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어요. 이제 가도 좋아요."
시몬은 다시 한번 꾸벅 허리를 숙인 후, 마법진을 밟았다.
후우웅!
시몬이 사라지고, 바람이 불며 집안의 장식물이 흔들렸다.
그녀는 삐걱거리는 나무의자에 앉아 홀가분한 미소로 창밖을 보았다.
"홍펭 교수님!"
문이 벌컥 열리며 조교 한 명이 뛰어들어왔다.
"어떻게 됐습니까? 시몬은요?"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조교가 울컥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감히 교수님의 제안을......!"
"괜찮아요 브레드."
그녀가 조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창밖을 보았다. 브레드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왜 교수님이 갑자기 그 학생에게 꽂히셨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마투학에 더 재능 있는 헥토르에게 제안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 외에 다른 마투 지망생 네 명도 충분한 가능성을......!"
"천재."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키젠에저 많은 천재들을 봐왔지만, '그런 종류의 천재'는 처음 봐요."
"......예?"
그녀는 대답 없이 미소 지었다.
* * *
시몬은 A반에서 가장 늦게 키젠에 도착했다.
고된 수업으로 지쳤지만, 다행히 오후 수업까지는 아직 두 시간 이상 남아 있었다.
기숙사로 돌아가서 하수인들에게 교복 세탁을 맡기고 땀범벅인 몸을 씻으러 목욕탕으로 향했다.
"시몬!"
딕을 만난 건 목욕탕에서였다. 그는 시몬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어쩐지 들뜬 표정이었다.
"흐흐흐! 아까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도 못 믿을 거야!"
"뭐길래?"
딕은 주위를 한번 두리번거리더니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텔레포트 마법진을 밟아서 이동하는데, 갑자기 뭔가 쾅! 하고 막힌 기분이 드는 거야! 정신을 차리니까 뜬금없이 바힐 교수님의 연구실 안이더라고!"
시몬이 눈을 깜빡였다.
"저주학의 바힐 교수님?"
"맞아!"
"혹시 거기서 무슨 일 있었어?"
"그냥 청소시키시던데."
"......."
시몬이 쓴웃음을 흘렸다.
"키젠에 다녔던 선배들한테 들은 적 있어! 텔레포트 스카웃! 바힐 교수님이 나 찍은 거지? 나도 직속제자 되는 거야?"
시몬은 땀을 삐질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으...... 럴지도 모르겠네."
"와 씨, 이렇게 키젠의 실세와 연이 이어지다니! 너도 직속제자가 뭔지 알지? 그냥 학교생활 활짝 피는 거야! 징계나 퇴학 조치도 담당 교수 눈치 보고 넘어가는 경우도 허다하대!"
"올해 들은 소리 중 가장 어이없는 소린데."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시몬과 딕이 고개를 돌렸다. 헥토르와 그의 파벌 두 명이 멈춰 서 있었다.
"X도 없는 평민 나부랭이가 바힐 교수님의 직속제자라고? 지나가던 개도 웃겠다."
친구들도 낄낄 소리 내어 웃었다. 딕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이쿠야. 도련님이 쫌 꼬우셨나 봐? 뭐든지 네가 최고여야 하는데, 바힐 교수님이 너보다 날 더 눈여겨본 것 같아서?"
"......."
헥토르가 한 걸음 다가왔다. 다시 보니 키나 덩치가 거대한 건 물론, 온몸이 탄탄한 근육질이었다.
"입조심해라. 상인 나부랭이."
"내가 또 상인 나부랭이라서 너 같은 부류의 애들을 잘 알지."
딕이 손목을 휘휘 흔들며 빈정대듯 말했다.
"마투학 수업 땐 메이린도 깠다며? 존X 세상사 너만 사연 있고 힘든 줄 알지? 너도 X발 X밥이야 이 새끼야. 무어 가문의 교육을 통과한 게 아주 뭐 벼슬인 것처럼 굴어요."
발끈한 헥토르가 거칠게 오른팔을 뻗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칠흑의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딕의 몸이 꺾이며 거칠게 기둥에 부딪혔다.
"커, 커헉!"
"천한 새끼가 입에 담을 말이 따로 있지."
눈에 핏발이 선 헥토르가 팔을 옆으로 그었다.
"그냥 여기서 뒈져 이 새끼야."
끄드득!
저주였다. 딕이 고통스러워하며 목을 부여잡자 주위의 학생들이 웅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끄윽, 크흐흐!"
딕은 이런 와중에도 씩 웃으며 중지 손가락을 내밀었다. 헥토르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지, 진정해 헥토르!"
"야! 이거 선 넘는 거 아냐? 수업시간 외에 저주를 쓰면......!"
두 친구가 말리려 다가왔지만 헥토르가 짜증스럽게 휘두르는 팔 한 번에 벌러덩 넘어갔다.
헥토르가 반대쪽 손바닥에도 마법진을 그리려는 순간.
"......!"
갑자기 그의 눈앞으로 발바닥이 훅! 다가왔다.
쩌억!
헥토르가 아슬아슬하게 두 팔을 교차해 막아냈다. 그리고 미끄러운 목욕탕 바닥에 미끄러지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충격으로 시전 중인 저주가 취소됐고, 고통에서 해방된 딕이 켁켁 소리를 내며 물러났다.
타닥.
그리고 시몬이 바닥에 내려오며 살벌한 안광을 빛냈다.
"그래, 네가 언제 나서나 했다."
헥토르가 씩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양손에서 칠흑을 뿜어냈고 시몬은 손에 낀 반지에 칠흑을 흘려보내며 가상의 레버를 붙잡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인 그때.
쾅!
헥토르의 발밑으로 양동이가 날아와 박살 나며 파편이 튀었다.
헥토르와 시몬이 움찔했고, 다른 학생들은 놀란 비명을 토해냈다.
"......시끄럽다."
쏴아아아아아.
욕탕에 앉아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무수한 흉터가 보이는 등으로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진짜 다 뒈지고 싶냐."
그리고 그는 시몬이 아는 사람이었다. 시몬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카쟌!'
다름 아닌 시몬의 방에서 쥐 죽은 것처럼 지내는 바로 그 사람이었다.
"......카쟌 에드발트."
헥토르가 팔을 내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소문은 들었는데, 아직도 학교에 붙어 있었나?"
카쟌은 말없이 목을 꺾었다. 그가 목을 꺾을 때마다 인간의 몸에서 날 수 있는 소리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크게 뿌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헥토르!"
"조, 조심해. 저 새끼 눈깔이 맛이 갔어."
그의 친구들이 뛰어와 호위하듯 헥토르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관두자."
헥토르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의외였다. 두 친구가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쪽도 처신 잘하는 게 좋을 거다. 두 번은 없어."
헥토르는 성큼성큼 걸어서 목욕탕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잠시 멍하니 있던 친구들이 도망치듯 헥토르의 뒤를 따랐다.
"딕!"
시몬도 얼른 바닥에 쓰러져 있는 딕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
"별거 아냐."
딕이 킬킬 웃었다.
"나한테 쓴 저주도 겁주는 용도였어. 저 새끼가 무슨 깡이 있다고."
쏴아아.
상황이 끝나자 다시 카쟌이 탕으로 들어가며 눈을 감았다. 같은 탕에 있던 학생들이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물러나는 모습이 보인다.
시몬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카쟌. 도와주셔서......."
"너희도 시끄럽다."
그가 등을 보인 채 말했다.
"꺼져."
"......."
시몬이 옅은 미소를 흘렸다.
역시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약간의 해프닝이 있었지만 큰 문제 없이 끝났다.
사실 딕은 헥토르를 도발해서 징계를 끌어낼 생각이었다고 밝혔다. 물론 시몬이 헥토르를 공격하는 바람에, 징계가 나와도 두 사람 다 타격을 받는 상황이라 깔끔하게 계획을 포기했다.
이야기를 듣고 머쓱해진 시몬이 미안하다고 말하자 딕은 환하게 웃었다.
"네가 나서준 게 훨씬 낫지! 헥토르한테 발차기 날릴 때 내 속이 다 시원하더라."
헥토르를 도발한 것도 반은 울컥해서였고, 어차피 학생 보호기간이라 징계를 먹여도 큰 타격을 입힐 수 없다. 물론 헥토르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리라.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기숙사 방 앞에 세탁 마법으로 깨끗해진 교복이 배달와 있었다.
두 사람은 얼른 교복으로 갈아입고 오후에 하나 남은 수업까지 무사히 소화했다.
모든 일정을 끝마치자 어느새 주위가 어둑어둑해졌다. 시몬과 딕은 저녁을 먹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으아아! 드디어 주말이다!"
딕이 기지개를 켜며 소리쳤다.
"시몬, 넌 이번 주말에 뭐 할 거야?"
"주말? 딱히 계획한 건 없는데."
"에이~ 그럼 안 되지! 키젠에서는 주말을 어떻게 쓰느냐가 진짜 중요해."
"그렇게 말하는 넌 계획이 있나 봐?"
딕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나는 평일 수업보다 주말 일정이 더 중요해. 로체스트에 내려갈 거야."
키젠의 부속도시, 로체스트.
키젠의 직원들과 학생들, 하수인 등이 방문하며 활성화된 중소규모의 도시다.
네크로맨서들의 쉼터이자 학생도시로 유명한데 무수한 식당들과 여관, 네크로맨서 관련 상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수업 재료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키젠 학생들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특히 주말에는 학생들이 몰리며 엄청난 유동 인구를 자랑하는데, 보통 키젠 학생들이 주말에 놀러 가자는 소리는 로체스트에 가자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근데 로체스트에서 뭐 하려고?"
"사업구상."
딕이 사뭇 진지하게 답했다.
"키젠에서 매달 생활비 명목으로 지급하는 돈으론 생활하기 부족해. 그렇다고 내가 공부를 압도적으로 잘해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빠르게 특기를 살려야지."
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딕 다운 발 빠른 움직임이었다.
"시몬, 너도 뭔가 돈이 들어올 루트 같은 걸 만들어두는 게 좋을 거야. 지금처럼 교수들이 재료를 대주는 건 학생 보호기간 동안만이거든. 매달 들어오는 생활비로는 키젠의 수업에 들어가는 막대한 재룟값을 다 충당 못 해. 그래서 고학년들은 각자의 고유한 수입 루트를 보유하고 있어."
"으음, 그래?"
수업 외적인 부분도 자립해야 한다니, 역시 만만한 생활이 아니었다. 게다가 시몬은 재룟값이 어마어마하게 드는 소환학에 관심이 있으니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흐흐, 아니면 내가 로체스트에 자리 잡길 기다리든가. 너한테도 일자리 하나 마련해 줄 수도 있어."
"아냐. 내게 필요한 돈은 내가 버는 게 맞지."
"......오, 금전적인 부분은 또 똑 부러지네."
딕은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 내일 일정을 준비한다며 몰래 로체스트로 떠났다.
물론 평일에 키젠 밖으로 나가는 건 금지되어 있지만, 자유로운 교풍인 키젠의 특성상 들키지만 않으면 그리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시몬은 홀로 기숙사에 들어왔다. 휴일 기분이나 낼 겸, 매점에서 군것질거리를 하나 사 들고 기숙사 방으로 들어왔다.
혹시나 카쟌이 있다면 제대로 감사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오늘은 그도 방을 비웠다.
혼자 남게 된 시몬은 넓은 방바닥에 앉아 군것질거리를 뜯었다. 6개가 들어 있는 폭신폭신한 미니 쉬폰 케이크였다.
시몬은 케이크 하나를 입에 넣었다.
맛있었다. 진한 버터의 풍미를 만끽하며 우물우물 씹고 있는데.
"......."
시선이 느껴졌다.
시몬은 조심스럽게 눈동자를 굴려 창가 쪽을 보았다. 창가에 매달린 채, 눈을 끔뻑끔뻑 뜨고 있는 소녀가 보였다.
'네, 네프티스 님......?'
참고로 여기는 4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