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22화
내일 조별수업의 1순위부터 10순위까지의 영입 대상이 정해졌다.
1순위 영입 대상은 '제이미 빅토리아'.
우수한 성적의 저주학 지망생이다. 활발하고 행동력 넘치는 성격이라는 점도 플러스 요인이다.
2순위 영입 대상은 '클라우디아 멘지스'.
딕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했던 메인 혈류학, 서브 맹독학의 인재다. 그녀를 영입할 수만 있다면 1학기 내내 편해질 수 있다.
그 외에도 10순위까지 리스트를 구성했다.
"제이미나 클라우디아를 못 잡아도, 미련 버리고 빠르게 빠르게 다음 순위 애들한테 넘어가는 게 중요해. 아! 그리고 애들 영입할 때 특례 1번인 네가 있다는 점을 적극 어필할 건데, 괜찮지?"
"응. 문제없어."
두 사람은 빽빽하게 계획을 짠 뒤에야 침대에 누웠다.
시몬은 뭔가 뿌듯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열심히 전략을 준비한 조가 또 있을까?
내심 내일 수업이 기다려졌다.
* * *
다음 날 아침,
키젠에서의 새로운 일주일이 시작됐다.
1교시 '초급 흑마법' 강의실에 들어와 보니, 조용하던 저번 주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이제는 서로 아는 얼굴들이 생겨서 왁자지껄하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조용히 자리에 앉은 시몬이 교과서를 꺼내고 있는데, 딕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방금 제이미랑 이야기하고 왔어! 대충 안면은 다 터놨네."
시몬이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너 진짜 이런 거 잘한다."
"흐흐, 장사에 인맥관리는 필수니까. 원래 이게 내 일이었어."
그때 마침 강의실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학생들은 눈치껏 뛰어서 제자리에 앉았다.
드디어 A반의 담당 교수가 누군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제발 바힐!"
딕이 중얼거렸다. 시몬도 내심 소환학의 아론이 A반의 담당 교수가 됐으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 외에는 마투학의 홍펭도 괜찮았고, 칠흑역학의 에릭도 자상하고 친절하게 흑마법을 알려줄 것 같았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 순간.
"아......!"
모두의 입이 딱 벌어졌다.
"노, 농담이지?"
딕의 동공도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교수는 정적을 뚫고 강단 앞에 섰다.
극도로 절제된 느낌의 단발, 차갑고 똑 부러질 것 같은 인상, 그리고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보라색 눈동자까지.
키젠 총장 대리이자, 부총장의 직함을 가지고 있는 인물.
"제인 올리비아. 라고 합니다."
그녀는 키젠의 2인자였다.
"부총장 직함을 가지고 있지만, 수업에서는 편하게 교수라고 호칭하시면 됩니다."
네프티스의 최측근이자, 사실상 그녀를 대신하여 키젠의 전권을 휘두르는 실세.
지금까지 본 교수진들 중에서도 정점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저 사람이 왜 1학년 수업에 들어와?"
딕이 숨죽인 채 중얼거렸다.
그의 말처럼 총장 대리인 그녀가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잘 없을뿐더러, 있다고 해도 대부분 3학년 수업들이었다.
"글쎄요. 인생을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상황도 닥치는 법이지 않을까요. 딕 헤이워드."
딕이 공포 영상이라도 본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어, 어떻게 내 이름을 아는 거야?'
딕의 뒤통수가 줄줄 흘러나온 식은땀으로 흥건해졌다. 제인은 고개를 돌려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제가 한 학기 동안 1학년 A반의 초급 흑마법 수업을 담당하게 됐습니다. 아까 딕 헤이워드 학생의 말처럼 그동안은 3학년 수업만 담당해 왔으니......."
그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수준 차이를 너무 절감하지 않도록, 노력해 줬으면 합니다."
곳곳에서 꼴깍꼴깍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키젠 부총장의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건 엄청난 행운이지만, 그녀에 대한 소문 때문에 학생들은 마냥 웃을 수 없었다.
제인은 학생들 사이에서 흔히 쓰이는 은어인 '키젠스럽다'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조금이라도 싹수가 보이지 않거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과감하게 퇴학시켜 버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심지어 키젠에서 애지중지하는 상위전력 '3학년'들도 퇴학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을 정도니, A반 학생들이 벌써부터 두려움에 빠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럼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정적을 뚫고 제인이 입을 열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초급 흑마법>은 8개 과목을 총괄하고, 8개 과목이 가르치지 못하는 네크로맨서의 기본을 보완하는 수업입니다."
그녀가 신호를 보내자 조교들이 두꺼운 종이뭉치들을 들고 학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전에, 여러분 스스로 8개 과목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아야겠죠."
시몬과 딕의 어깨가 떨렸다.
첫 수업부터 전 과목 테스트라니!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시험 시간은 한 과목당 22분입니다. 먼저 네 과목을 친 다음, 4분 쉬는 시간을 가지고 남은 4과목을 연달아 시험 치르겠습니다. 부정행위가 발각된 경우, 제가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가 학생 보호기간이 끝나면 퇴학처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건 뭐 숨 돌릴 틈도 없었다.
간단히 학생들을 압박 속으로 몰아넣은 제인이 팔짱을 끼며 선언했다.
"그럼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 * *
시몬에게 있어선 처음으로 치르는 학교 시험이었다.
그와 동시에, 시몬의 인생 전체를 통틀어 손에 꼽을 만큼 힘겹고 고통스러운 세 시간이었다.
물론 육체적으로 힘들다기보다는 정신적으로 괴로웠다.
[7. 패럴라이즈 저주의 시전 이후, 대상자의 신체가 근육경직, 근긴장증 증상을 보이다 20분 뒤 석화되었다. 대상자의 체내 마나 손실률이 0이라고 가정했을 경우, 대상자의 저주 저항력과 패럴라이즈 마법진에 추가 투입해야 할 칠흑 수치로 올바른 것은?]
'......전혀 못 풀겠다.'
까만 건 글자요, 흰 건 종이로다.
분명히 대륙어로 되어 있는데 도통 무슨 소릴 하는지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분했다.
분명히 풀라고 있는 문제일 텐데, 다른 학생들은 다 깃펜을 움직이고 있는 와중에 혼자 멍하니 앉아 있어야만 하는 이 상황이 힘들었다.
겪어본 적 없는 종류의 무력감이 몸을 지배했다.
최근에 일들이 좀 잘 풀린다고 해서, 아버지의 언데드 군단을 손에 넣었다고 해서, 키젠에 쉽게 적응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오만이었다.
'그래, 이게 현실이야.'
선행학습도 해오지 않은 만큼 남들보다 훨씬 더 미친 듯이 노력해야 했다.
시몬은 손도 쓰지 못하는 문제들을 앞에 두고, 점점 더 오기가 생기고 악에 받쳐갔다.
그렇게 영겁과도 같던 세 시간이 흘렀다,
"으으으."
"진짜 어렵다."
시험이 모두 끝난 뒤, 다른 학생들의 표정도 좋지만은 않았다.
딕이 뒷자리의 학생에게 시험지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어땠어? 시몬."
시몬이 쓴웃음을 지었다.
"......공부, 진짜 열심히 해야겠어."
"동감이야."
모든 시험지를 회수한 제인이 학생들을 보며 말했다.
"다들 시험 고생했습니다. 점심 맛있게 먹고 두 시간 뒤에 뵙죠."
"수고하셨습니다!"
아무리 기분이 참담해도 점심시간이란 말에 몸이 벌떡 일으켜지는 건 예전과 같았다.
그렇게 A반 학생들이 썰물처럼 강의실 밖으로 빠져나가고.
"시작하죠."
"네!"
제인과 조교들의 업무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시험지를 나누어 분배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채점을 시작했다.
이 중에서 독보적으로 빠른 건 역시나 제인이었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그녀의 손은 거침이 없었다. 깃펜이 위에서 아래로 쭉 내려오고 바로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
그런데 언제부터일까, 제인의 책상 옆에 소녀의 얼굴이 보였다.
두 뺨을 책상 끝에 대고, 크고 푸른 눈망울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바쁘실 텐데 여긴 왜 오셨습니까? 네프티스 님."
차갑게 묻는 제인의 목소리에, 소녀는 순진무구하게 웃으며 말했다.
"놀러!"
"......."
제인은 무시하고 채점을 재개했다.
심술이 난 네프티스가 책상에 붙은 채 두 다리를 흔들며 장난을 쳤다. 참다 참다 결국은 발끈한 제인이 손날로 네프티스의 정수리를 내려쳤다.
"아야!"
"방해하지 마세요."
"으아아앙! 제인은 맨날 나만 때려어어!"
정수리를 감싸 쥔 그녀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달려가 근처 조교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갑자기 등장한 키젠의 지배자에, 조교의 얼굴색도 하얗게 변했다.
"휴우."
제인이 한숨을 쉬었다.
"불쌍한 제 부하 괴롭히지 말고 이쪽으로 오세요."
"싫어! 싫어! 가면 또 때릴 거잖아!"
"빨리요."
제인이 싸늘하게 말하자 네프티스가 입술을 빼쭉 내밀며 다가왔다.
"여러분은 옆에 빈 강의실로 이동해서 마저 채점하도록 하세요."
"넵!"
바로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조교들이 시험지를 들고 헐레벌떡 강의실 밖으로 대피했다.
네프티스가 눈에 힘을 주며 볼을 부풀렸다.
"제인! 너 요즘 나한테 너무 차가운 것 같아!"
"평소 그대로입니다."
"흥. 진짜 변했어! 슬럼가에서 주워왔을 때는 겁먹은 눈으로 내 손을 꼭 잡고 오들오들 떨던 순수한 아이였는데!"
"그 순수한 아이가 24시간 과로와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이렇게 됐습니다."
제인이 딱 잘라 말하며 시험지의 반을 네프티스에게 넘겼다.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응? 이게 모야?"
"뭐긴 뭡니까. 오신 김에 방해하지 마시고 채점이나 도와주세요."
"......."
뒤늦게 상황 파악을 마친 네프티스가 헤헤 웃으며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등을 돌려 도망치려 했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나타난 제인이 그녀를 붙잡아 허리에 꼈다.
"으앙! 싫어! 놔줘! 일하기 싫어!"
제인은 버둥거리는 네프티스의 정수리에 다시 한번 일격을 먹여 얌전하게 만든 뒤, 자리에 똑바로 앉히고 시험지와 깃펜을 건넸다.
"제인. 이거 아동학대에 노동법 위반인 거 알아?"
"누가 빌어먹을 아동입니까. 잔말 말고 빨리하세요."
"......네."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깃펜 움직이는 소리만 들렸다. 단번에 시험지 다섯 개를 끝낸 제인이 슬쩍 네프티스 쪽을 곁눈질로 살폈다.
토라져서 볼을 잔뜩 부풀린 채 시험지를 채점하던 네프티스가 틀린 문제 위에 '바보'라고 적고 있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장난치지 마세요."
다시 한번 자비 없는 정수리 공격이 이어졌다.
네프티스가 맞은 부위를 양손으로 감싸며 울먹거렸다.
"그치마안! 얘 진짜 완전 바보인걸! 맹독학 2번 성분 문제는 맞혀놓고, 바로 아래에 비교문제는 틀렸단 말이야!"
"흠."
제인이 문제를 살펴보더니 피식 웃었다.
"2번은 공식을 써서 풀었고, 3번은 뇌를 거치지 않고 상식으로만 풀었군요. 학생들이 흔히 하는 실수죠."
"바보야 바보! 얘 이름 뭐야?"
네프티스가 시험지를 넘겨 가장 앞면을 보았다.
"응?"
이름이 가려져 있었다.
"블라인드 평가입니다. 이름을 보고 채점하면 편견이 들어갈지도 모르니까요."
"......고작 테스트일 뿐인데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철저하네."
"고작 테스트라고 해도 흥미로운 표본들이 많습니다."
제인이 채점이 끝난 시험지 중에서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이건 네프티스 님이 채점한 것과는 반대의 경우입니다."
"뭔데?"
"1번에서 15번, 점수를 받으라고 낸 기초 문제들은 거의 틀렸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시험지를 뒤집었다.
"20번. 가장 고난도의 문제에 도전했더군요."
가장 뒷장의 20번 문제.
시험지 전체가 어지러울 만큼 빼곡한 수식들이 적혀 있었다.
"이게 다 뭐야?"
"칠흑역학의 고대 룬어, 소환학의 인스턴스 스켈레톤 수식, 저주학의 이그저스트 계산법."
"......설마?"
제인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 학생은 선행학습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저번 주에 배운 수업 내용으로만 치밀하게 조합해서 답을 추론한 겁니다."
네프티스는 시험지를 읽어내려갔다.
"뭐야, 칠흑량 계산 문제인데 소환계 공식을 썼잖아? 저항을 칠흑량 손실률에 비례한다고 가정해서 푼 거네."
"네."
"그래서 맞춘 거야?"
제인이 고개를 저었다.
"테론 공식을 쓰면 답은 '1,200,000'으로 딱 떨어집니다."
"그럼 이 학생이 쓴 답은?"
"1,200,146."
제인의 표정이 무섭도록 진지해졌다.
"문제가 의도한 정답은 아니지만, 정답에 더 근접한 답을 내놨습니다."
네프티스가 슬쩍 시험지를 보았다.
그 엄격한 제인이 20번 문제를 정답 처리해둔 것을 알 수 있었다.
"네프티스 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왜 저를 1학년 수업에 배정하신 겁니까. 그것도."
그녀가 이름에 블라인드 처리된 흰 종이를 뜯었다.
[시몬 폴렌티아]
"이 소년이 있는 A반에."
네프티스가 턱받침을 하고는 방긋방긋 웃었다.
"헤헤, 무슨 소릴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제인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하여간 300년 묵은 여우 같은 사람.'